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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3월

새 학기, 친구를 추가하세요

과월호 보기 김경덕 목사 (사랑의교회 교육연구소)

새 학기, 친구를 추가하세요

 

스마트하게 친구 맺기
친구 맺기 참 쉽다. 참, 스마트한 세상이다. 카톡을 통해 스마트하게 맺은 친구들의 숫자가 오늘로 무려 636명! 내 스마트폰 속 수많은 친구 목록을 스크롤하다 말고 잠시 생각한다. 친구란 뭘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친구란 두 개의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라고 말했다.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을 뜻하는 ‘관포지교’라는 말도 어렴풋 기억나는 것 같고. 유안진 님의 시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읽으며 우정에 관한 로망을 키웠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 모두에게 친구는 중요하고, 십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제임스 파울러(James W. Fowler)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육체적, 정서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변화를 익숙하게 해 줄 ‘거울’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 거울은 신뢰할만한 다른 사람의 눈과 귀를 의미하며, 바로 친구 관계에서 형성된다. 그것이 십대들에게 친구가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다. 십대에게 친구는 거울이요, 상담자요, 조언자요, 스승인 것이다. 3월,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는 새 교실에서 우리는 이 낯선 얼굴들을 우리 인생의 친구들로 추가하게 된다.

 

친구입니까? 확실해요?
카톡 가입자 수는 중복 가입자 포함 7,000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 친구의 초대로 카톡방에 들어간 한 친구의 이야기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명의 아이들이 다른 한 아이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아이들은 수치심이 느껴질 욕설들을 한 아이에게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친구는 카톡 알림음을 ‘무음’으로 만들고, 다른 일을 하다가 휴대전화를 켰더니, 불과 몇 분 사이에 욕설이 몇 천개 올라와 있더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욕설을 당하는 아이가 안쓰러웠지만, 끼어들었다가는 자기도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어 그냥 보고만 있었단다. 그런데 그렇게 욕설과 왕따를 당했던 그 아이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카톡방으로 초대한 뒤 단체로 욕설 퍼붓기, 초대한 뒤 한꺼번에 나가버려 왕따 친구만 카톡방에 남게 하기, 반대로 왕따 친구가 카톡방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계속해서 ‘초대하기’를 하는 일명 ‘카톡 감옥’ 등으로 친구를 괴롭히는 신종 왕따가 유행하고 있다.
요즘 교실에서 친구를 때리거나 욕을 하다 걸리면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될 수도 있기 때문에 대놓고 폭력을 행하는 일은 줄어든 대신, 카톡과 같은 스마트폰 메신저를 이용한 집단 욕설이 학교 폭력의 또 다른 모습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스마트폰 메신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오게 했다. 이제 아이디나 전화번호만 알면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과 얼굴, 인격과 인격의 교감이 없이도 가능해져 버린 우리 시대의 친구 관계는 ‘우정’ 본연의 숭고함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Jesus, My Friend
친구는 한두 번의 손가락 터치로 맺어지고 끊어질 수 있는 가벼운 관계가 아니다. 성경은 우정을 가치 있게 여긴다. 성경은 아말렉 전투의 위대한 승리가 기도하는 모세의 팔을 붙들어 주었던 기도의 친구들(아론과 훌)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알려준다. 성경은 바벨론의 전쟁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사자굴과 풀무불을 이겨낼 강력한 우정을 나누었던 다니엘의 친구들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한 하나의 왕좌를 사이에 둔 경쟁 관계였으나 상상 이상의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왕자 요나단과 다윗의 특별한 우정을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는 말씀처럼, 십대인 우리는 친구들과 나누는 체온과 탄식, 그리고 환호 속에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그렇게 서로를 빛나게 할 것이다. 오래지 않은 내일에 우리는 그 시절 친구들과 나누었던 이야기와 눈물과 토닥임이 우리를 이만큼 자라게 했다는 사실에 으쓱해질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 14).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우정의 크기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친구가 되셨다. 친구는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다. 친구는 다르고 각자이지만, 하나인 두 인격이다.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한 그라시안처럼, 우리는 친구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또 하나의 우주를 소유한다. 누군가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이 쉽고 간단해지는 시대, 우리의 우정만큼은 더 진중하고 더 책임 있고 더 무게 있는 그것이길 바란다.  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