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학교 앞에서 근심으로 넘어지다
예비 중학생, 예비 고등학생들에게 2월은 고통스럽다. 가슴에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학교 운동장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당시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어른들의 시절과 지금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책보다 딱지를 먼저 챙기던 시절도 끝났다. 꿈처럼 지나간 초등학교를 뒤로하고 새롭게 맞이하는 학교는 ‘입시’와 ‘학원’이란 단어로 우리 십대들에게 근심을 선사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문제와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수학 시험에서 두 개를 틀려 이번 중간고사에서도 전교 1등을 놓친 만년 전교 2등 학생의 근심 사이로 질문을 던졌다.
“그게 뭐예요?”
“가장 작은 근심은 다른 사람의 근심이고, 가장 큰 근심은 바로 나의 근심이란다.”
작은 일에도 항상 웃음으로 감동을 주던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이 새로운 학교 앞에서 너무 많은 고민과 근심에 빠져 허우적대는 십대가 돼 버렸다.
2017년 2월 새 학기 바로 앞에서 십대들은 이런저런 근심과 고민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학교 가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은 새 학기 증후군이라는 일종의 병이 되어 아이들 사이에 전염되고 있다.
램프의 요정? 램프 증후군!
1706년 앙투앙 갈랑에 의해 재편집된 『천일야화』라는 책에는 알라딘이라는 청년과 요술 램프가 등장한다. 요술 램프는 자신을 발견해 준 알라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세 가지 소원을 이뤄 준다. 알라딘은 결국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해피엔딩을 꿈꾸는 수많은 십대들이 오늘도 요술 램프를 찾아 학교라는 동굴로 탐험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저마다 그 동굴 앞에서 램프를 발견한다. 하지만 아무리 램프를 비벼도 기대와 다르게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은 나오지 않고 근심과 불안만 끊임없이 나온다. 결국 요술 램프는 해피엔딩 대신 근심 엔딩을 안긴다. 십대들은 학교 앞에서 요술 램프 대신 *램프 증후군을 얻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많은 일에 대해 걱정을 하지만 사실 걱정하는 일의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리 걱정하고 고민해 그 상황을 더 낫게 변화시키거나 대처할 수 있는 확률은 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십대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필요 이상의 근심과 불안이 존재하고 이 근심은 아이들의 학교 안까지 흘러들어 갔다.
십대들은 이렇게 학교 앞에서의 새로운 변화와 ‘입시’라는 근심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 램프 증후군 :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에 대해 마치 요술 램프의 요정을 불러내듯, 수시로 생각하며 걱정하는 현상
거룩한 근심 안에서 기쁨을 만끽하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 26:38).
예수님께서도 근심으로 가득하셨다. 곧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두려우셨다. 기도하시며 흘린 땀이 피가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였다. 예수님을 괴롭게 하는 것, 이미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을 어지럽히는 근심은 ‘십자가’였다. 그리고 그 근심을 안고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셨다.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해결되는 근심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껏 근심하셨다. 그리고 십자가 앞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그 근심은 사라졌다. 근심은 기도가 되고, 기도는 고난이 되고, 고난은 구원이 돼, 이제 우리에게 기쁨이 됐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근심 가운데 있는 자에게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선포하신다.
십대들은 오늘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 때문에 학교 앞에 넘어져 있다. 사랑하는 우리 십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툭툭 털고 일어나, 손 내밀어~ 하이파이브!”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