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18년 05월

다시 드러나는 섬

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1. 숫자 밑으로 사라지는 아이들
“이번에 평균이 10점 올랐어요!”
“몸무게가 5kg 줄었어요!”
“키가 5cm 자랐어요!”
요즘 아이들은 삶의 많은 부분을 숫자로 말한다는 점에서 어른들과 많이 닮았다. 반에서 등수가 줄어야 행복한 줄 아는 아이들, 키를 나타내는 숫자가 커져야 자신의 행복이 자라는 줄 아는 아이들, 체중계의 숫자가 적을수록 근심의 무게도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십대들이 숫자로 자신의 행복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러나 숫자가 있는 그곳에 정작 아이들은 없다. 숫자를 위해 살아가는 아이들은 오늘도 숫자 밑으로 사라지고 있다.
십대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저 아름다운 아이들이 가끔씩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하는 이야기가 있다.
“목사님! 저 같은 건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성적이 원하는 만큼 잘 나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이어트에 실패했는지…  어떤 숫자가 아이를 아프게 했는지 알 수는 없다. 짐작할 수 있는 건, 그토록 원하던 숫자가 ‘행복’이 아니라 ‘가시’가 돼 아이의 마음에 깊이 박혀 버렸다는 사실뿐이다.


#2. 공주의 섬, 저자도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고 이름 지어진 섬이 있다. 세종이 둘째 딸 정의공주에게 하사한 섬으로 봄에는 살구꽃이 만발하고, 아지랑이가 잔뜩 피어 신비와 아름다움이 쌓인 섬이었다. 여름 장마에 사라졌다가 과일이 익는 시절이면 닥나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던 이 섬은, 1970년대 압구정동의 개발과 함께 사라졌다. 세상의 숫자를 위해 수면 밑으로, 아니 숫자 밑으로 가라앉혀진 것이다.
 숫자로 환산된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1970년대에 사라진 그 섬이 요즘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류에서부터 내려오던 흙이 쌓이면서 조금씩 그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공주의 섬이 자연의 기억으로 다시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3. 숫자를 위해 살았던 사람, 삭개오
성경에도 숫자를 위해 사느라 본모습이 사라졌던 인물이 등장한다. 세리장 삭개오다. 그는 더 많은 재물을 위해서 나라를 배신하고, ‘죄인’의 굴레에 자신을 던져 버렸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눅 19:2).
그는 많은 재물이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고, 더 큰 평수의 집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세상의 숫자가 구원의 약속보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주님으로 인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숫자로 더럽혀지고 죄 아래로 사라졌던 그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부르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b).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정결함’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4. “더러워! 엄마, 쟤 토했어”
한 초등학생의 외침으로 갑자기 버스 안이 분주해졌다. 토한 아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한 중년 남자는 안타까움과 인자함이 섞인 미소로 토한 아이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아버지였다.
자녀가 곤경에 처했는데 도망갈 아버지는 없다.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 앞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아버지는 없다. 남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아버지에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소중한 자녀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더럽다고 말해도 아버지에게 자녀는 여전히 소중하고 정결한 존재다.
삭개오는 더럽혀지고 사라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더러울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이름이었다. 그도 예수님의 자녀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예수님 앞에서 ‘정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시대의 십대들도 예수님 앞에 서 있다. 청소년들은 이 시대의 정결함, 곧 ‘삭개오’의 이름을 가졌으며, 다시 드러나야 할 왕의 섬, 공주의 섬이다.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