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단어 A to Z 소문수 목사 (사랑의교회)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놀랄 수 있다. 온통 “헛되다”라는 말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원래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노래하는 책이 아니던가! 하지만 전도서는 다르다. 게다가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꼽히는 솔로몬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고 있으니 회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말 전도자가 전하고 싶은 것이 인생의 허무와 후회뿐일까? 전도자가 이야기하는 ‘헛됨’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지혜’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솔로몬처럼 지혜롭고 싶어요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상상을 해 봤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셨듯이 내게도 무엇이 필요한지 물으신다면, 머뭇거림 없이 “지혜를 주세요”라고 답하는 상상 말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해 부와 재물과 영광도 함께 얻었다(대하 1:12). 그런데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 말씀 바로 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결국 이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이다. 절망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성경 전반에서 말하고 있는 지혜는, 솔로몬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고 고결할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겐 모두 주시겠다고 약속된 것이다(약 1:5). 그렇다면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약속된 성경적 지혜
일반적으로 지혜는 사물의 근본과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으로 사용된다. 먼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이나 실제적인 지식을 뜻한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석수와 목수의 일이나 금속을 다루는 일(대상 22:15~16), 베 짜는 일(출 35:35)처럼 전문성을 나타낼 때 사용됐다. 또한 왕의 꿈을 해석하거나 왕에게 조언하는 사람들을 ‘지혜로운 자들’(렘 18:18)이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구약의 ‘지혜’는 본래 신학적인 단어임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혜의 원형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질서에 맞추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다.
신약으로 오면서 지혜는 예수님의 현현(顯現)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완벽한 선의 결정체, 죄가 없는 순결함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찾아왔다. 누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충만했다고 기록했으며(눅 2:40, 52), 사람들은 지혜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막 6:2).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표현했고(고전 1:30),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셨다(고전 1:24). 즉, 예수님이 곧 지혜이고, 그분과 연합한 자는 세상이 측량할 수 없는 구원의 비밀을 얻게 된다.
전도자는 옳았다!
성막을 지을 때 쓰임받았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지혜롭다’라는 영예를 얻었다(출 36:2).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지혜의 궁극을 경험한 솔로몬은 이 세상이 헛된 일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세상의 헛됨은 나를 헛되지 않은 것에 집중하고 열망하게 만든다. 헛된 꿈으로 가득 찬 세상이 주는 절망과 좌절은 하나님과 영원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전도서가 지혜 문학으로 분류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는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진짜를 보고 어찌 가짜에 만족하며 살겠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은 솔로몬은 정직하게 세상의 헛됨을 노래한다. 그리고 노래의 행간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원함을 아는 것이 진정한 지혜임을 말하고 있다. 헛된 지혜에 속지 말자. 여호와를 경외함이 참된 지혜의 근본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