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우은진 기자
거제도 믿음의 집안에서 출생
1938년~1957년, 10대
옥한흠 목사는 1938년 12월 5일 경상남도 거제도 산골마을에서 아버지 옥약실과 어머니 이희순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옥주래 영수가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은 후 바로 상투를 자르고 제사를 폐해, 당시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마을 안에서 상당한 핍박을 받았다. 옥 목사의 외가 집안 역시 증조부의 전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 됐는데, 어머니 이희순 권사의 믿음이 퍽 단아했다. 많이 못 배웠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하는 법 없이 소박하게 주님께 순종했다.
그런 어머니를 따라 교회도 다니고, 당시 유행하던 사경회란 사경회는 다 쫓아다니던 어린 옥 목사는 거제 일운초등학교 3학년 때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뜨거운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다. 이후 거제 지세포대광중학교 시절 부산 모 수련회에서 또 한 번 십자가의 강력한 은혜를 체험하게 됐다. 옥 목사에게 있어 이 일은 그의 평생의 신앙을 붙들어 주는 사건이었다.
그의 마음 안에는 예수님 한 분만이 가득 찼다. 외삼촌을 졸라 선반 위에 얹혀 있던 표지도 없는 낡은 성경책을 얻어 어린 나이에 열심히 성경을 읽어나갔다. 그런 그를 가장 가까이서 60여 년 동안 지켜보며 목회자가 될 것을 새벽마다 기도했던 이가 바로 어머니 이희순 권사였다.
평신도로서 설교하고 주일학교를 지도하다
1958년~1960년, 20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던 그에게 교회 어른들은 자주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가난한 농가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족들이 고생하는 게 싫어 궁핍한 목회자의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부터 그는 ‘믿음 좋은 젊은이들이 다 신학교에 가면 누가 세상을 변화시키나? 잘 믿는 사람이 공무원도 되고 장군도 되어야 사회 구석구석에 전도가 되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게 아닌가?’라며 ‘평신도 지도자’를 꿈꾸었다.
그래서 그는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당시 1950년대 중후반은 가난하던 시절이라 돈 안 내고 다닐 수 있고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사관학교가 인기있었다. ‘꼭 해군 장교가 되어 선상에서 사병들과 예배도 드리고 복음도 전하며 살아야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보여주며 살 거야’라고 생각했던 그는 사실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한 탈출구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고혈압’이라는 판정을 받아 시험도 보기 전에 자격이 박탈됐다. 다시 도전하기 위해 재수를 해야 했던 그는 증조부가 세웠던 초가 교회로부터 주일 설교와 주일학교 지도를 해주면 방 하나와 재수 생활 뒷바라지를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가난한 교회다 보니 교역자를 청빙할 수 없어 성경 말씀을 잘 아는 학생으로 소문나 있던 평신도 옥한흠을 부르게 된 것이었다.
성균관대·총신 신대원 입학과 결혼
1961년~1968년, 20대
1년 후의 두 번째 도전에서도 실패하고 나서야 그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실패의 쓴맛 때문에 자살 충동도 느꼈지만, 다시 시골 교회 마룻바닥에 엎드려 하루 종일 물고기 뱃속의 요나처럼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며칠 후 하나님께서 목회의 길을 가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이 그의 마음에 깃들었다. 1961년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부산 모 신학교의 부속 기관 대학부를 2년간 다닌 그는 다시 집에 내려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차에 군대 영장을 받고, 그해 12월에 군대에 입대했다.
그때,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극 대처하는 목회를 하기 위해 일반 대학을 갈 것을 결심했다. 논산훈련소로 가면서도 입시준비 책을 가지고 갔고, 들고 간 책들이 신기하게 통과됐다. 덕분에 훈련 중에 화장실에서도 공부하는 괴벽을 가지게 됐다. 낮에만 근무하고 밤이면 밖에 나가 입시준비를 해서, 당시 야간 대학으로는 가장 인기가 높았던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수석으로 1962년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3, 4년 늦게 단기 복무하는 졸병의 신분으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첫 1년간 부대 일과 학업 사이에 끼인 채 매번 파김치가 되었다. 급기야 1963년 폐결핵 판정을 받는다. 대학 2년간의 처절한 투병 생활 끝에 완치된 그는 동생 옥재순 권사의 소개로 김영순 사모를 만나 1965년 4월, 27세의 나이에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김영순 사모의 내조 덕에 가난하나마 생활이 안정되어 갔고, 1967년 2월 장남 옥성호 집사가 태어났다. 한편, 김영순 사모의 어머니 신명년 권사는 옥함흠 목사가 친어머니 이상 사랑한 분으로 그의 목회를 위한 기도의 불을 끄지 않았던 기도의 어머니였다. 1968년 그는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해 차남 옥승훈 집사도 태어났다. 그러나 서울에서 단칸방이라도 마련할 여유가 없었던 그는 결혼 후 5년 가까이 가족들과 헤어져 지내야만 했다.
총신 신대원과 성도교회 부교역자 시절
1968~1974년, 30대 초반
그가 총신 신대원에 들어간 1968년 무렵의 신학교 동기생들 중에는 신학과 목회에 뜻이 분명했고 개성도 강한 이들이 많았다. 그중 장발에 지적인 외모, 열정적인 학구열 등 옥 목사의 개성이 가장 강했다.
교수진 역시 박형용, 박윤선, 하비 콘, 김의환, 명신홍, 최의원 박사 등 이론이 아닌 육화된 학문과 인격과 삶이 배어 있는 신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그가 이런 학구적 분위기에서 공부했던 것은 행운이었으며, 동기생들과 함께 신학연구단체를 만들어 신학공부에 매진하며 <그람마>라는 회지도 만들었다.
총신 뒷산 언덕에 작은 토굴을 만들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혔던 그는 그곳에서 기도도 하며, 혼자 희열을 즐겼다. 1968년 서울 은평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그는 신학교 3학년 무렵 부당하게 행동하는 장로와 부딪쳐 교회를 사임했다. 당시 주일학교 출석인원을 100여 명에서 500여 명으로 열심히 부흥시켰던 그는 정의감으로 충돌했다가 갑자기 쫓겨나게 되니 막막했다.
그때 마침 총신에서 소선지서를 강의하던 성도교회 김희보 목사의 요청으로 1970년 성도교회 주일학교 사역자로 부임했다. 그해 12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당시 성도교회는 600명가량 모이는 중형 교회로, 합동측에서 한동안 싸움이 잦아 상처의 골이 깊은 교회였는데, 김희보 목사의 부임으로 분위기 좋은 교회로 변화되면서 유명세를 탄 교회였다. 주일학교를 6개월간 지도하던 옥 목사는 젊은이 사역에 은사가 많은 것 같다는 김희보 목사의 제안에 따라 그의 인생의 분수령이 된 성도교회 대학부를 맡게 된다.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목회를 가르쳐준 김희보 목사가 1972년 총신대 학장으로 떠나자, 후임으로 김성환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김성환 목사는 옥 목사에게는 아버지 같은 목회자로, 성도교회 대학부 사역을 소신껏 사역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했다. 옥 목사는 197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동서울노회에서 34세의 나이로 목사안수를 받았고, 1974년 9월에는 삼남 옥성수 집사가 태어났다.
제자훈련의 모태, 성도교회 대학부
1971년~1975년, 30대 중반
1970년대 당시 대학 캠퍼스에는 네비게이토선교회, CCC, IVP, 조이선교회 등 파라처치 미니스트리(ParaChurch Ministry)가 뜨겁게 보급돼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학교 3, 4학년 때까지도 옥 목사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전통 목회라고 확신했다. 한번은 신학교 친구의 권유로 삼각산에서 열린 IVP 수련회에 갔으나 하루 만에 도망쳐 나왔다. 찬송가에 익숙하던 그는 가스펠송에 이질감을 느꼈고, 소그룹에서 귀납적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잡담처럼 여겨졌다.
그런 그가 성도교회 대학부를 맡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당시 한국 교회는 주보에 출석교인 통계를 내는 게 관례였는데, 성도교회는 양심적으로 수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가 새로 맡은 성도교회 대학부 출석통계는 단 1명뿐이었다. 당시 한국 교회 대학부는 모두 선교단체에 젊은이들을 빼앗겨 버린, 지리멸렬 상태였다.
대학부에 출석하던 그 1명이 바로 서울 공대에 다니고 있던 방선기 목사였다. 대학부 회장이었던 그가 서울대 네비게이토선교회에 들어가 그들이 부흥하는 비결을 배우고 싶다는 말에, 옥 목사는 거기서 배운 모든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줄 것과 모든 자료를 가져다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옥 목사는 대학생들이 기성 교회에서 빠져나가 선교단체로 모이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선교단체 지도자들이 신학교 출신도 아니고, 성경공부 교재를 봐도 텅 빈 공간이 많았다. 그런데 대학생들은 놀랍게 변화됐다. 그러다 방선기 목사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자훈련과 양육이라는 단어였다.
모든 자료를 분석하고, 방 목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옥 목사는 선교단체에는 있고, 기성 교회에는 없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복음, 훈련, 비전이었다. 즉, 선교단체에는 십자가와 복음이 살아 있었고, 성경공부하면서 사람을 키워냈으며, 세계가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키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옥 목사는 당시 방 목사가 배워온 제자훈련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대학생 12명과 함께 성도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그들은 학교 가는 날 외에는 모든 사생활을 중단하다시피 했고, 공휴일도 없이 성경과 도시락을 싸가지고 산속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대학생들도 한 명씩 변화되기 시작했다.
옥 목사는 대학생들에게 3M(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갖고, 신학교보다는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크리스천이 될 것을 주문했다. 이때의 열매로 훗날 많은 성도교회 대학부 출신들이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훈련 후 제일 먼저 변한 사람은 옥한흠 목사였다. 십자가와 복음이 회복됐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갖게 됐다. 이때부터 광인(狂人) 옥한흠의 삶이 시작됐다. 그리고 광인 옥한흠이 되면서부터 불행히도 가족들을 돌보는 것은 소홀하게 됐다. 성도교회에서 5년을 사역하면서 사택이 남산 밑에 있었는데, 한 번도 가족들과 함께 남산에 올라가본 적이 없었다.
반면, 성도교회 대학부는 해마다 부흥해 5년 사이 한국 교회 안에서 가장 큰 대학부가 됐다. 난방이나 에어컨도 없는 그곳에 대학생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하루 종일 복음을 이야기하며 행복해 했다.
1명이던 대학부는 어느새 350명으로 부흥했다. 당시 120개의 다른 교회 대학부에서 그 비결을 배우러 매주일 성도교회 대학부를 참관하러 왔을 정도다. 옥 목사는 좋은 것을 항상 다른 이와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이때 성도교회 대학부를 오픈한 것은 훗날 CAL세미나를 통해 제자훈련과 사랑의교회 다락방을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오픈한 시초가 됐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을 통해 사람이 바뀌니 성도교회 대학부 체질 개선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예배 중심에서 교제 중심으로, 지도자 중심에서 구성원 중심으로, 일방통행식 대화에서 쌍방통행식 대화로, 조직 중심에서 유기적 조직으로, 행사 위주에서 양육 위주로 바뀌었다. 꿈같은 5년을 보냈던 옥 목사는 거기서 자신이 제자훈련에 미쳐버렸다고 매년 열린 CAL세미나 ‘광인론’ 강의시간마다 고백했다.
유학, 제자훈련의 신학적 검증의 길
1975년~1978년, 37세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이 자신이 평생 걸어가야 할 길임을 확신했다. 그런데 한 가지 그의 마음속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논리와 성경적 체계가 필요했다.
옥 목사의 학자적이고 완벽주의적인 기질이 제자훈련에 대한 뿌리가 되는 신학적 검증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훈련이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도 동일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는 절반의 장학금을 지급하겠다 제안하였고, 칼빈신학교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주저 없이 칼빈신학교를 선택했다.
가난했던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없어 다시 아내와 자식들을 진영의 처가로 보내고 또다시 이별을 하게 된다. 1975년 37세 나이에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그렇게 홀로 신학적 한계를 뛰어넘기위한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칼빈신학교에 도착한 그는 제자훈련에 관심 없는 그곳 분위기에 실망하고 학교 공부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 갔다. 대신 틈만 나면 도서관에 들어가 제자훈련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질적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잠시 한인 교회 목회를 했던 것도 그에게는 큰 추억이었고, 훗날 한인 교회 제자훈련 목회자들을 이해하는 경험이 됐다. 미시간 주에 소재한 그랜드 레피즈 한인 교회였는데, 주중에는 공부에 전념하고 토요일과 주일은 사역을 하며 신학과 목회의 균형을 맞추고, 생활의 여유도 좀 생기게 됐다. 이는 장년 제자훈련의 작은 실험장이 됐는데, 대학생들에게서 봤던 동일한 영적 변화가 그들에게도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한스 큉의 『교회론』과 운명적 만남
1978년, 40세
1977년 5월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본래 계획했던 3년 중 남은 1년 동안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자리를 옮겨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그곳 역시 실천신학 분야가 취약해 선을 조금만 넘으면 자유주의 사상이라며 보수적 울타리 안에서 신학을 선호해 또다시 실망하게 된다. 그는 다시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했다.
그런데 그때 제자훈련의 풀리지 않았던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구내 서점에서 한스 큉의 『교회론』을 발견한 것이다. 한스 큉은 가톨릭의 진보적인 신학자인데, 제자훈련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근거를 『교회론』에서 피력했다. 즉, 교회론의 본질인 평신도의 사도성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옥 목사는 자신이 왜 제자훈련에 미쳐야 하는지, 평신도를 왜 제자로 깨워야 하는지, 이것을 왜 목회철학으로 삼아야 하는지 확고한 신학적 답을 얻었던 것이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는 다원주의자가 된 한스 큉의 종적에 대해 옥 목사는 그의 성경책 한 켠에 아니길 바란다고 적어 놓을 만큼 몹시 아쉬워했다.
해답을 얻은 그는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개척을 해서 제자훈련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졸업논문 과정이 까다로웠다. 현장에서 3년 동안 사역하면서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그는 개척과 논문 프로젝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주임 교수에게 3년 후 프로젝트를 내지 않겠다고 말하고 귀국해 버렸다.
귀국 전 그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제자훈련의 산실인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있는 네비게이토선교회 본부를 방문했다. 또 미국에서 나름대로 제자훈련을 적용하고 있는 여러 교회를 3개월간 탐방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제자훈련 모델 교회 현장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은 점은 평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을 깨우는 목회현장은 무척 건강하고 부흥한다는 사실이었다.
강남은평교회 개척과 사랑의교회로의 개칭
1978년~1981년, 40대 초반
기성 교회가 얼마나 제자훈련을 하기에 어려운 토양인지를 잘 안 그는 교회 개척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고생하던 아내의 반대에 부딪혀, 담임목사 제의가 들어온 서대문교회 등 기성 교회로 갈 것인지, 교회를 개척할 것인지 갈등을 반복했다.
그 무렵 과거 주일학교를 섬겼던 은평교회 배기주 목사로부터 교회 개척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았다. 은평교회 교인 몇 명이 강남으로 이사를 했는데, 거리가 멀어 은평교회로 오기가 힘드니 강남에 개척을 한다면 안심하고 옥 목사에게 교인들을 맡기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옥 목사는 기성 교회로 가고 싶은 유혹을 끊기 위해 1978년 6월 귀국하자마자 서둘러 그해 7월 23일 주일 오후 3시 강남 서초동 유스호스텔 앞 3층짜리 건물의 2층에서 강남은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창립예배는 배기주 목사의 사회, 김희보 학장의 축사, 그리고 내수동교회 대학부 학생들이 찬양을 맡았다. 당시 오정현 목사는 내수동교회 대학부 회장으로 있었다. 옥한흠 목사는 1978년 7월 내수동교회 대학부 송추수양회에서 강사로 말씀을 전하면서 대학생들을 복음으로 뒤집어 놓았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옥 목사의 사랑의교회 개척을 축하하기 위해 특송을 했다. 이 만남은 25년이 지나 오정현 목사가 사랑의교회 후임 목사가 되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이날 창립예배의 특이점은 관례를 깨고 담임목사인 옥한흠 목사가 설교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새로 시작하는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첫 메시지는 그 교회의 목표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왜 이 교회를?”(마 9:35~38)이라는 주제로 직접 설교했다. “우리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 받은 소명자로서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목회의 비전을 두어야 합니다.”
1981년 9월 개척의 밑거름이 돼준 은평교회 배기주 목사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강남은평교회로 명명하였으나 3년 후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지역 이름을 교회 이름으로 붙이던 한국 교회 정서상 사랑의교회는 특이한 이름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9)라는 말씀 안에 내포된 십자가 의미를 좋아했던 옥 목사는 ‘사랑’이란 말과 ‘의’라는 소유격을 붙여 그만의 감각과 목회철학을 교회 이름에서부터 드러냈다.
제자훈련에 미치다
1979년~1981년, 40대 중반
제자훈련 목회의 포부를 안고 사랑의교회에서 1기로 시작한 제자반. 김영순 사모를 포함해 처음 인도한 여자 제자반은 마지막에 사모 혼자만 남고 실패로 끝났다. 부유하고, 신앙 연수만 오래된 평신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언제 처음으로 느끼셨습니까?” “구원 받으셨습니까?”라고 구체적으로, 원색적으로 말씀을 도전하니 훈련생들이 얼굴이 빨개지며 쩔쩔매기 일쑤였다.
당시 그는 강남에서 세상적인 재미를 느끼며, 신앙적으로도 정상에 오른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그들의 태도에 내심 분노가 깔려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니 첫 제자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 여자 제자반은 영적으로 큰 변화를 맛보았다. 훈련을 통해 대학생들에게 맛보았던 변화와 영적 성숙이 성인들에게서도 나타나자 옥 목사는 교회 밖의 모든 모임이나 집회 요청을 거절하고 제자훈련에 완전 집중했다. 두더지 굴 파듯 교회 안에서 여자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제자훈련에 점점 미쳐갔다.
여자 제자반이 성공하자, 1979년 남자 제자반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훈련 중인 아내들의 영향을 받아 제자훈련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남자 성도들의 변화를 기다렸던 옥 목사는 1기 남자 제자반을 통해 남자들도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남자 성도들은 권위적인 면이 없고 열정적인 옥 목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때를 기점으로 남자 성도들이 증가해 사랑의교회는 여자와 남자 성도의 비율이 균형을 이루게 됐다.
또 개척 초기 젊은이들이 너무 많고 성인이 적어 의도적으로 젊은이 사역을 약화시키기도 했는데, 훗날 1987년부터는 젊은이선교를 위해 전문부서를 따로 두고 활성화시켰다. 이 당시 사랑의교회 젊은이 사역을 통해 한국 교회 안에서 쓰임 받는 전문 청년 사역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1979년부터 1981년 사이에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여자 성도들은 모두 사랑의교회의 터를 닦고, 제자훈련의 틀을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또한 첫 남자 제자반의 훈련생 9명도 1982년 1기로 모두 장로로 세워졌다. 그러나 두 번째로 시작한 남자 제자반은 준비가 안 된 상태로 급히 제자반이 구성되는 등 훈련이 실패했던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제자훈련의 대가 옥한흠 목사라고 해서 제자훈련이 모두 다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훈련생들이 자신의 제자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바랐고, 초창기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은 이런 실패와 성공의 과정을 거듭하며, 하나하나 오늘의 제자훈련 체계를 갖춰 나갔다. 제자훈련을 통해 평신도로서 소명을 깨달은 성도들은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해 나갔고, 그 열매들은 사랑의교회 안에 가득 넘치게 됐다.
사랑의교회만의 브랜드들
1982년~1984년, 40대 중반
옥 목사는 성도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름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구역장을 순장으로, 구역예배를 다락방으로 이름부터 파격적으로 바꾸었다. 소그룹에서 말씀을 공부하며 치유되는 은혜를 나누기 위해 기존 구역모임을 다락방으로, 소그룹 리더는 담임목사의 손을 거쳐 제자훈련과 사역훈련 2년을 받은 후 순장으로 세워졌다. 그는 이들을 종종 ‘작은 목자’라고 불러 자신의 동역자임을 강조했다.
또한 예배를 중요시했던 그는 주일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의 설교에 생명을 걸었고, 주기도문송, 세례자 간증을 넣어서 성도들이 복음을 예배 시간에 만나도록 했다. 특히 그의 제자훈련 목회철학은 ‘공동체고백’(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한 세상으로 보냄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으로 압축돼 나타난다.
또한 1982년 10월 사랑의교회는 제1회 사랑의생활화 세미나를 열게 된다. 당시 한국 교회는 총동원전도집회나 일일부흥회가 유행이었는데, 사랑의교회는 1980년과 1981년 9월 딱 두 번 부흥회를 열었다. 그러나 옥 목사의 설교에 익숙한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윽박지르는 듯한 부흥사 스타일의 전도집회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옥 목사는 외국의 모범적인 전도폭발 프로그램들을 연구하고 임상훈련해서 ‘사랑의생활화 세미나’를 열었다. 후에 대각성전도집회로 이름이 바뀌어 진행됐는데, 1년 전부터 태신자를 품고 기도하며 전도집회 당일 기존 신자에게는 대각성을, 태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대각성전도집회는 총 28회를 거치면서 옥 목사만의 전도시스템을 구축했고, 제자훈련 하는 교회는 전도가 약하다는 단점을 극복하도록 했다.
합신에서 강의 그리고 합동 교단으로 복귀
1979년~1985년, 40대 중반
1979년 예장합동 교단이 신학과 교권 문제로 주류와 비주류(개혁, 지금의 합신)로 분열되었는데, 이때 그는 개혁 쪽으로 나왔다. 그는 남서울교회에서 설립예배를 드린 합동신학교(이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쳤다.
그때 군소 교단의 작은 신학교지만 학생들을 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했고, 사랑의교회 초창기 교역자들은 모두 이때 옥 목사로부터 강의를 들은 합동신학교 출신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원래부터 교단 일치를 주장하던 옥 목사는 합동 측에서 분열된 다른 교파들을 모아서 한 교단으로 일차 합한 다음, 합동 측과 원래대로 다시 한 번 크게 연합하는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1985년 합신 교단에서 다시 합동 교단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사랑의교회가 다시 합동 교단으로 돌아가면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새로운 교역자를 선택할 때 총신 출신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기존 교역자들은 합신 출신이어도 문제가 안 되는데, 새로운 교역자는 총신 출신이어야만 했다. 그때 합신 출신으로 군에 갔다가 다시 교회로 복직해야 하는 교역자도 있었는데, 옥 목사는 이를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유능한 교역자면 꼭 합동 교단 출신만 고집하기보다는 유연성을 뒀고, 다른 이에게 한 번 일을 맡기면 실수를 해도 전적으로 위임했다. 그러나 그것은 방목이 아닌 전적 위임을 통해 더 사역에 집중하도록 하는 열매로 나타났다. 그의 사람을 키우는 정신은 부교역자들에게도 적용돼 여러 명의 부교역자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냈다. 불시에 특유의 조용한 발걸음으로 교회 각 부서마다 돌아다니며 직원들의 일하는 모습을 점검하기도 했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으면 질책하기도 했다.
카타콤 같은 지하 교회, 사랑의교회 건축
1983년~1985년, 40대 중반
개척 1년 후 100여 명으로 교인이 증가하자 서초동 진흥아파트 옆으로 교회를 이전했다. 그러다 또다시 옥 목사의 탁월한 설교와 제자훈련을 통해 배출된 순장들의 전도로 교인이 500여 명으로 증가하자 교회건축을 결의하고, 1983년 7월 서초동 지금의 부지에 성전건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1984년 6월에는 예배실 천장의 콘크리트슬래브가 내려앉는 사고와 시공회사가 부도가 난 일도 있었다.
그러나 1985년 1월 사랑의교회는 성전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해 서울시 건축상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소음을 없애기 위해 카타콤처럼 지하로 예배실을 만든 점과 건축비가 모자라 가장 싼 적벽돌로 지은 것이 오히려 경건한 운치를 자아냈다. 십자가 대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를 강대상 앞에 붙였는데, 천정 채광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햇살 사이로 하나님의 평안함을 예배당에 들어서는 교인들에게 안겨줬다.
이렇게 옥 목사의 탁월한 감각과 섬세함으로 고안된 제자훈련을 비롯한 다락방과 순장, 대각성전도집회, 강대상 앞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문구, 주일예배의 주기도문송 부르기와 간증자 세우기, 공동체고백 등은 모두 사랑의교회만의 브랜드가 됐다.
이는 이후 한국 교회 안에 유행하게 됐는데, 사랑의교회 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해 강대상 앞을 꾸미는 교회도 많아졌고, 제자훈련을 하면서 다락방과 순장이라고 소그룹 명칭을 아예 바꾸며 건강하게 성장한 교회들도 늘어났다. 옥 목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제자훈련과 귀납적 성경공부 역시 그가 처음으로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선교단체의 전유물이었던 것을 개 교회 현장에 성공적으로 접목시켜 건강한 목회철학을 낳은 한 시대의 개척자가 됐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평신도를 깨운다』 출간
1984년, 46세
건축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4년 6월 옥 목사는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다.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한지 5년이 되자 제자훈련이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열매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중간결산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3개월간 제자훈련 자료들을 모은 후, 1984년 제자훈련 겨울방학을 이용해 용인 벧엘수양관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원고를 집필했다.
7주 만에 완전히 탈고한 그는 책 제목을 정하는 일이 고민이었는데, 자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제목이 떠올라 이를 제목으로 정하고 만족스러워했다. 옥 목사의 『평신도를 깨운다』는 학구적인 면이 강하고 대중성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2010년 9월 현재까지 103쇄나 인쇄됐다.
또한 번역 작업도 일부러 진행한 것이 아니라 현지 국가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졌는데, 현재까지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중국어, 벵골어 7개 국어로 번역됐다. 그 외에도 러시아어, 캄보디아어, 독일어, 에스토니아어, 태국어로도 번역이 진행 중이다.
한국 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아직까지도 자신의 설교를 묶어 출판하는 게 한 흐름인데 반해, 옥 목사는 이미 80년대 초반에 『평신도를 깨운다』와 같은 묵직한 신학적 이론서를 저술한 것은 놀라운 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책이 많은 한국 교회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읽혔고, 사랑의교회 현장 공개와 세미나 개최를 요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CAL세미나, 목회자를 깨워 평신도를 세우다
1986년~1998년, 50대 중반
옥 목사의 사역 스타일은 계획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샘플이 바로 『평신도를 깨운다』의 책 발간과 CAL세미나의 개최였다. 책을 읽은 목회자들로부터 제자훈련 세미나 요청이 쇄도하자 1986년 3월 세미나실(현재 국제제자훈련원)을 설립하고, 1986년 3월 제1기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이하 CAL세미나)를 사랑의교회에서 개최했다. 1주일 동안 진행될 세미나를 위한 숙소는 반도유스호스텔과 서울교육문화회관을 이용했다.
1기 CAL세미나는 옥한흠 목사가 광인론, 제자도, 교회론 등 모든 강의를 혼자 진행했으며, 사랑의교회 다락방 현장 참관과 실습도 참가 수만큼 함께 진행됐다. CAL세미나의 요청은 1989년 대만 목회자를 위한 제자훈련세미나, 일본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로, 1994년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미주 CAL세미나와 2006년 7월에는 브라질 CAL세미나로 점점 확산되었다.
1998년 10월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이 설립되자 숙박공간이 넓혀져 170여 명에서 400여 명으로 참가자를 늘리게 됐고, 한 공간에서 세미나가 진행됐다. CAL세미나 참가자들은 옥한흠 목사의 광인론과 함께, 사랑의교회 다락방 순장들의 모습에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 1999년에는 CAL세미나를 수료한 동역자들이 모여 제자훈련 컨벤션을 열기도 했다. 이후 제자훈련 모델 교회를 중심으로 CAL-Net이 전국 각 지역에 초교파적으로 세워져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됐다. 제자훈련 모델 교회를 가면 모두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공유하고 있어 사랑의교회와 비슷한 영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2003년 11월 사랑의교회 창립 25주년 기념 제자훈련 페스티벌을 개최됐으며, 2006년 6월에는 CAL세미나 2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매년 CAL세미나에는 재수, 삼수하며 참가신청을 간절히 요구하는 목회자들이 줄을 서고 있어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1기부터 84기 CAL세미나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긴장하며, 변질되지 않는 제자훈련 정신이 그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년 진행되는 세미나 강의안을 매번 다르게 매만지며 영적 완벽을 기했던 옥한흠 목사만의 임팩트 강한 제자훈련 강의가 큰 역할을 했다.
안식년과 카메라 그리고 로마서 강해설교로 살아나다
1989년~1992년, 50대 중반
일 중독자였던 옥 목사는 일주일에 제자반, 사역반 3개, 순장반 2회, 교역자 훈련, 주일설교 3회, 또 1년 3차례 돌아오는 CAL세미나 인도에 자신의 모든 진액을 쏟았다. 주일설교를 위해서는 일주일 내내 고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완벽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급기야 그는 1989년 탈진하여, 12년 만에 하와이에서 1년간 안식년을 가져야 했다.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옥 목사는 이때 이후로 사역반까지 모두 부교역자에게 일임하게 된다. 그는 사역훈련까지 내려놓자 목회생명을 끊어놓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제자반과 사역반은 그의 설교의 원천이요, 그의 영성을 지켜주는 우물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훈련사역을 부역자에게 넘기고 나자 그 자신이 다시 소생하기 위해 붙잡은 것은 주일 로마서 강해설교였다. 1991년 9월 1일부터 1992년 12월 27일까지 총 52회 로마서 강해설교를 한 옥 목사는 당시 로마서 강해설교가 자신을 살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당시 건강을 잃고 그가 가진 취미가 바로 사진 찍기였다. 이때 이후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찍은 그의 작품들은 몇 권의 사진집으로 남겨졌다. 한 번 몰입하면 끝장을 보는 그는 카메라와 사진 이론서를 혼자 독학으로 터득하고, 바쁜 목회 일상에서 사진으로라도 잠시 한숨 돌릴 줄 아는 여유를 갖게 됐다.
병으로 한 번 쓰러진 이후 그는 1990년 우물가선교회를 만들어 유흥가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을 선도하고, 드라마와 찬양 같은 문화적 매체를 이용해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이어 1992년 이웃사랑선교부와 호스피스 사역을 통해 소외되고, 고통 받는 성도들의 아픔에 더욱더 귀 기울이게 됐다. 또 사랑부를 통해 1999년 사랑의복지관을 짓고 장애우 아이들을 섬기는 사역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 사역은 많은 장애우 부모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한국 교회 갱신과 연합을 위해 교갱협·한목협 창립
1989년~1998년, 50대 후반
1989년 그는 오엠한국국제선교회가 어렵고 힘들 때, 오엠한국국제선교회 이사장을 맡아 지금까지 한국 젊은이들을 훈련하고 선교사로 파송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그는 사랑의교회 세계선교부를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라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의 제자훈련을 통해 배출된 평신도 선교사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빛도 이름도 없이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공산권 선교를 사랑의교회 창립 3개의 모토 중 하나로 삼았던 그는 하용조, 이동원, 홍정길 목사와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으며, 북한 선교를 위해서도 음으로 양으로 힘썼다. 1992년에는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와 만나 두 교회가 협력해 1992년 9월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워 중국 내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한편, 1996년 3월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교갱협)를 창립해, 합동 교단 내 금권선거를 뿌리 뽑고 제비뽑기 선거를 정착시키며 교회갱신과 개혁을 외쳤다. 1999년 예장 합동 교단 총회에서 금권타락 선거를 막기 위해 “예수님이 울고 계십니다”라는 호소문을 배포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평소 하나 되는 한국 교회를 주장했던 그는 1998년 11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창립해, 한국 교회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며 한국 교회 지도자로 자리매김 했다.
교갱협이나 한목협 사역은 그가 앞장서서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연합하고 갱신될 수 있도록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분이다. 앞에 나설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절제하며, 다른 교단의 지도자들이 더 잘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이런 일면은 사랑의교회라는 동굴 속에서 제자훈련만 한 개교회주의자가 아닌 온정적 에큐메니스트로서 폭넓은 시야와 한국 교회의 진정한 하나됨을 원했던 지도자로서 일면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65세에 조기 은퇴
1998년~2005년, 60대 중반
그는 1997년 1년 동안 장로들과 『새들백교회 이야기』를 읽고 토론했다. 장로들의 순수함과 열정이 회복되고, 꿈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 장로들의 입에서 63세까지 시무장로, 이후 70세까지는 사역장로로서 교회를 섬기겠다는 제안이 나와 실행되어 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반향은 옥 목사 자신이 65세 조기은퇴를 발표한 것이다. 사역이 절정인 시점에서 떠나는 용기를 발휘한 것이다. 그는 평소 교회가 목사와 함께 늙으면 안 된다며, 은퇴 3년 전부터 65세 조기 정년 은퇴를 당회에 알리고, 가랑비 옷 젖듯이 자주 교인들에게 주지시켰다. 이는 당시 한국 교회가 담임목사직을 자녀에게 세습해 한국 사회에서까지 거센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라 더욱더 신선한 자극이 됐다.
그는 2003년 평생을 사역한 사랑의교회를 조기은퇴하고, 동일한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지닌 남가주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위임했다. 그리고 2004년 1월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2004년 국제제자훈련원 원장으로서 한국 교회와 해외 교회로의 제자훈련 확산을 위해 마음을 모았다. 2004년 9월에는 장신대에서 옥한흠 목사가 제자훈련 강의를 신학생들에게 전하고, 사랑의교회 각 부서가 제자훈련 노하우를 나누기도 했다.
한편, 2001년 5월에는 졸업한 지 19년 만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부터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과 현장 프로젝트를 함께 제출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미뤘는데, 학교측으로부터 논문완성 제안을 받고 구체적으로 논문을 준비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랑의교회의 제자훈련 사역을 통해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를 갱신하고 부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 학위수여의 배경이었다. 또 2007년 8월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명예실천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이론과 현장을 겸비한 한국 교회 지도자였다.
100주년 기념대회 설교와 소천
2006~2010년, 70대 초반
생전 그는 두 번의 기억에 남는 명설교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 교회 전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남겼다. 하나는 2004년 4월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한국 교회여, 다시 일어나라”는 주제의 설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2007년 7월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주여, 살려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한 설교이다. 분열되고 썩은 한국 교회를 향한 애끓는 사랑이 담겨 있어, 참석자들은 한국 교회의 소망을 옥 목사의 설교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또한 은퇴 후에도 CAL세미나에서 제자훈련 강의를 통해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목회본질을 붙잡을 것을 질타했으며, 2003년 격월로 발행되던 <평깨>를 월간 <디사이플>로 재창간해 제자훈련 동역자들을 격려하고 본인의 생각을 한국 교회와 나누길 원했다. 또 2008년 6월에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을 창간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CAL세미나에서 옥 목사의 광인론 강의는 폐암이 몸속에 깊게 퍼진 가운데서 선 그의 마지막 강의가 됐다.
평소에도 지병으로 괴로움을 겪었던 그는 2006년 6월 폐암이 처음 발병했는데, 2010년 9월 2일 항암치료 중 급성 호흡곤란증후군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그는 떠났지만,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평신도를 예수의 제자로 세우기를,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한국 교회가 갱신되고 연합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그의 기도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우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