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신학생 CAL세미나 참가자 2인
잠자고 있는 거인, 평신도를 깨워라
본 원고는 2012년 6월에 열린 신학생 CAL세미나에 참가한 신학생들의 『평신도를 깨운다』 우수 독후감 2편을 부분 발췌한 것이다.
평신도는 교회의 주체, 그들을 바로 세우라
김현정 전도사_ 백석신학대학원대학교
2008년도 3월, 나는 시골의 한 교회에서 제자훈련의 첫 발을 내딛으면서 『평신도를 깨운다』를 처음으로 접했다. 그 당시 정말 충격적이었고, 너무도 획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제자훈련을 받을 당시만 해도 내 관심은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명과 작은 예수가 되어 살아야겠다는 제자도에 있었다.
평신도는 교회의 주체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목회 철학과 교회론에 포커스가 맞춰져 이전에 보지 못했던 많은 내용들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CAL세미나를 들으면서 옥 목사님의 광인론에 기대한 것보다 더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역시 ‘한 영혼’에 대해 주님이 품으셨던 마음과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간절하게 찾는 목자의 마음을 닮은 듯, 옥 목사님도 한 영혼을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걸었던 것이 아닌가.
한국 교회의 부흥이 질에 있어서는 앞서지 못하고 양적인 급격한 팽창으로 허수(虛數), 허세(虛勢), 허상(虛像)이라는 삼허 현상(三虛 現象) 후유증을 자초한 가운데 옥 목사님은 그 해결책으로 평신도를 재발견하는 것, 한 영혼이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바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으셨다. 참으로 귀중한 깨달음이었고, 이것은 성도교회 청년부를 통한 옥 목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라면, 그 평신도를 바로 세우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 그리고 학생들 역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얻은 값진 교훈이었다. 나는 제자훈련에 나의 목회 생명을 걸겠다고 다짐했다(『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중에서).
옥 목사님은 여기에서 제자훈련 목회에 대한 좀 더 확고한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찾고자 하셨고, 유학 생활 중 한스 큉의 책을 접하면서 그의 교회론을 통해 종교 개혁 이후 로마가톨릭의 것으로 오해받아 사장될 뻔한 ‘사도성’이라는 보화와 같은 교회의 본질을 캐내게 된다.
옥 목사님은 “교회는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이 만든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 한스 큉의 말을 바탕으로 칼뱅이나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처한 상황에선 교회의 순결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기에 교회가 정적으로 치우쳐 사도성이라는 개념이 약화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교회의 사도적 본질을 회복하는 것으로 평신도의 병폐를 해결하며, 교회론을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사도성의 계승자
그렇다면 교회의 사도적인 본질, 사도성이 도대체 제자훈련과 어떻게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한스 큉은 사도성을 교회의 본질을 결정하는 다른 모든 속성 즉 통일성, 보편성, 성성(聖性)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보았다. 또한 다른 본질을 평가할 수 있는 표준으로 보았다. 즉 교회가 무엇보다 사도적일 때 그 교회는 통일성과 보편성과 거룩성을 가질 수 있고, 만약 이 사도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다른 본질들마저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도성은 성령에 의해 참된 내적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며, 사도성의 계승자는 소수의 개인이 아닌 전 교회다. 즉 성직자나 평신도를 가릴 것 없이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가 그 계승자로서 자격을 가진다.
왜 평신도와 목사 간의 차별 의식이 커지며, 목사만이 소명을 받은 사람인양 인식되어 평신도를 나약하게 만들고 있는가? 이것은 목사들이 ‘평신도 당신이야말로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다 순교한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소명을 가르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신도에게 바른 인식을 심어 주어야 한다. 즉 평신도를 제대로 깨워야 하는데, 사도의 계승자라는 증거가 되는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각자가 소명자임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평신도의 사도성 회복에 제자훈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비 목회자로서 앞으로 감당할 사역에 대해 분명한 목회 철학이 있어야 한다. 목사의 위치를 논하기 전에 먼저 평신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평신도는 누구인가? 옥 목사님은 성경에 근거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그 안에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벧전 2:4, 5). 이 제사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기도와 찬양과 감사와 회개의 열매를 드리는 영적 제사이다.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는 전혀 차이가 없다. 성령으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라는 점에서도 둘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 교회의 구성원인 평신도는 엄연히 교회의 주체이며 교회라는 공동체 그 자체인 것이다(『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중에서).
평신도는 교회요, 교역자는 섬김의 종
그렇다면 교회의 주체인 평신도와 목사 사이에 구별이 없는 것일까? 신분상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교역자에게는 사역상의 권위가 있다. 이것은 불편한 권위, 속박당하는 권위, 평신도를 포함하고 있는 전체 교회에 종속된 권위이다. 즉 교역자의 권위가 세상의 권위와 다른 것은 섬기는 권위라는 데 있다. 설교와 가르침도 섬기는 일인 것이다.
교역자와 평신도 간에 바른 관계를 원한다면 평신도는 교회요, 교역자는 그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들을 온전케 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임명된 종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한 목회 철학을 발견하고 거기에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를 움직이는 추진력인 목회 철학을 바르게 정립하기 위해 교회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으며 어떻게 평신도를 세울 것인지에 대해 ‘제자훈련’이라는 해답을 분명히 제시하고, 그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다음의 질문에 스스로 분명히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지금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진통하는가? 왜 한국 교회의 엄청난 잠재력이 묻혀 있는가? 사람을 만들어내는 데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새벽기도를 통해서, 구역예배를 통해서, 주일학교 통해서 얼마나 많이 성경을 가르쳐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머리를 향해서만 망치질을 했을 뿐, 그 심령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대답 잘하는 사람이 신앙 좋은 사람인양 대접받아 왔으니, 교회 안에 쭉정이가 얼마나 많은가(『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중에서).
그렇다. 이제 정말 평신도를 변화시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제자훈련 하는 데 미치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영혼에게 주목하시고, 그 영혼을 준비시키신 후 그를 통해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 목회자의 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종의 자리다. 목회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평신도를 섬기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가 종의 자리를 제대로 지킬 때 주님은 당연히 받으실 자신의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평신도를 깨우고 싶은가? 주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몇 명의 양들을 놓고 그 자체가 완전한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섬기는 작은 지역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목회 현장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뀔 때 한 영혼을 붙들고 예수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미친 사람처럼 헌신할 수 있다. 날마다 큰 교회를 곁눈질하는 목회자는 제자를 절대로 만들 수 없다. (중략) 그러므로 아무리 작고 초라할지라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중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성장한 나는 제자훈련 과정에서 한 영혼의 인격에 대해 무한한 기다림과 인내를 필요로 하며, 그럴 때 그 영혼이 서서히 변화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 제자훈의 부작용으로 오히려 기수를 따지고 서열을 매기는 등 여전히 제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평신도를 깨운다』를 재차 읽고, 다시금 깨달은 바는 그래도 이 방법밖엔 없다는 것이다. 한 영혼에 무한한 가치와 기대를 두고 1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함께 울고 웃으며 말씀으로 그 인격이 조금씩 변화되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제자훈련’뿐이다. 어떻게 하면 부작용을 줄이며 정말 한 영혼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의 효과를 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 지역 목회자와 CAL-NET이 고민해야 할 몫인 것 같다.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백성이요 세상으로 보냄 받은 제자
진대훈 전도사_ 대신대학교대학원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교회의 주체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평신도를 성숙하도록 훈련시켜 사역자로 헌신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시키는 제자훈련 사역의 최고의 교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 교회 내에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킨 책이며, 초판이 출간된 이후로 지금까지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쳐왔다.
따라서 제자훈련 목회에 관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평신도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안목을 갖게 될 것이며, 교회의 본질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뜨거운 화두, 평신도
지난 기독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교회는 언제나 세상에서 살얼음을 걷는 듯한 불안감을 숙명처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가 위축되어 있을 당시에는 그 시대 나름대로의 긴장 때문에 자책과 진통을 피할 수가 없었고, 교회가 부흥 일로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 다음에 따라올지 모르는 부패와 세속화 걱정에 늘 마음을 놓지 못했다. 오늘날의 상황은 후자인 듯하다. 옥한흠 목사님께서 늘 외치시던 말씀이 자주 떠오른다.
“한국 교회 성도 1,200만 모두가 만약 진실 된 그리스도의 제자였다면, 세상은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평신도는 오늘날의 교회에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먼저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면 교회가 가장 희망을 두고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최선의 잠재력이라 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편으로 발전되어 가느냐는 전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의 재발견’이라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분명 대단히 무거운 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목회 방향과 강조점을 대폭 수정해야만 하는 엄청난 변화의 진폭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해 25년 동안 목회해온 옥한흠 목사님의 평생 목회 철학이자 실천보고서라 할 수 있다. 저자인 옥 목사님은 교회의 본질을 제자도라는 시각에서, 평신도를 자신과 함께하는 동역자로 세우는 사역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지상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다”(『평신도를 깨운다』 중에서).
목회자만 제자이고, 평신도들은 끊임없이 돌봄을 받아야 하는 영적 어린아이로 취급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온전한 자’, ‘완전한 자’로 세우심을 받아 세상으로 파송 받아야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평신도인 것이다.
왜곡된 ‘평신도’라는 용어
옥 목사님은 평신도 운동을 20세기에 들어와 교회에 새로운 빛을 던졌던 각성 중 하나로 꼽고 있다. 그것은 성경적인 각성이었으며 교회 역사의 맥박이기도 하다. 저자는 평신도의 정의를 내리며, 지금까지 왜곡되어온 ‘평신도’라는 용어를 지적하고, 잠자고 있는 거인인 평신도를 깨워야 한다고 외친다.
또 한편으로 만인 제사장을 앞세워 교역자의 직분과 평신도의 직분을 대비하며, 현대 교회에서 교역자는 좀 더 낮은 자리로 내려와 앉을 필요가 있으며, 반대로 평신도는 그들을 섬기는 교역자가 지닌 종의 권위에 겸손하게 복종하면서 본연의 역할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실제로 첫 사역을 시작했던 오순절 교단의 모교회가 엄청난 부흥과 성장을 뒤로 하고, 둘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다. 성령의 역사로 보이는 어떠한 신비적인 체험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말씀과 성령의 조명에 의해 훈련된 성도가 없는 교회는 사상누각일 뿐임을 온 몸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옥한흠 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평신도의 역할이 가슴에 와 닿는다.
제2부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에서 옥한흠 목사님은 목회 철학에 대해서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CAL세미나 기간 중 광인론을 통해서 가장 깊은 도전을 받았던 부분이 바로 이 목회 철학에 대한 부분이기도 하다. 옥 목사님께서 진리라고 전제하시며 인용하시는 릭 워렌의 말, “모든 교회는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인다”는 곧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교회를 움직이는 추진력, 이것이 목회 철학이다. 옥 목사님께서 왜 교회론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목회 철학을 언급하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한 교회 지도자인 담임목사의 비전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목회 철학의 강한 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 사역 현장 속에서 그 어떤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제자훈련의 철학을 가지고 부족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하나님께서 일해 주셨고, 변화된 공동체를 통해 그분은 영광을 받으시며, 제자훈련의 토대를 성령께서 스스로 놓아주셨다. 정말 가슴이 요동치게 하며 심장이 뛰게 하는 하나님 앞에 변화되는 영혼들을 보았다.
확실한 철학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옥 목사님은 이어서 교회론을 설명하고 있는데, 명확하고도 세밀한 그의 교회론은 그동안 교회에 대해 잘못된 정의를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지상 교회는 예수님이 오셔서 실현하신 하나님의 통치의 유기적, 제도적, 세상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도의 계승자
아울러 ‘지금의 교회는 종말을 알리는 사인이며, 앞으로 무엇이 도래할 것인가를 알리는 게시판과 같다’는 말씀 앞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자신의 옷깃을 다시 한 번 여며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옥 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교회의 사도적 본질은 교회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의 사도성은 주후 325년 니케아신조에서 교회의 네 가지 속성 가운데 하나로 확정된 것이다. 아울러 교회는 사도의 교훈을 계승하고, 사역을 계승한다.
그런데 오늘날 전도와 선교를 하지 않는 교회들이 늘어만 가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성령과 사도성의 관계를 통해 교회의 사도적 본질과 성령의 불가분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으며, 즉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과 그의 위에 기름 붓듯 넘치게 임하셨던 성령의 관계는 바로 사도들과 성령,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옥한흠 목사님이 역설하시는 바와 같이, 성경적인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하며, 사도적이기 위해서는 평신도를 포함한 전 교회가 사도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정말 가슴 뛰지 않는가? 사도적 사역은 완성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사도적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그것은 땅 끝까지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사도적 사역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위한 장엄한 역사에 우리가 파트너로 초청을 받았고, 1,200만에 가까운 이 나라 교회의 평신도를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도의 계승자로 깨우는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무장시켜야 할 책임이 오늘날 목회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을 위해 죽었느냐?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늘 죄책감이 있었다. 오늘날 목사들의 삶과 초대교회 사도들의 삶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늘 성경이 말하는 제자의 삶과 내 실제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내 사역지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부유한 사역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 들은 옥 목사님의 광인론은 내 심장에 강한 대못을 치는 듯했다. 또한 그분의 제자들 한 분 한 분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역자의 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한 영혼 철학이었다. 과제를 하기 위해 펴든 『평신도를 깨운다』와의 또 한 번의 만남은 거친 파도와 같았던 감동의 여진을 다시 느끼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실제로 사역자들을 바라보며 한탄했던 시간이 있었다. 제자훈련을 하고 있는 사역자들조차도 그냥 교회에서 요구하는 사역이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하고, 또 제자훈련을 목회 철학으로 가지고 있다고 외치는 사역자이긴 하나,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해 성도들로 하여금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는 사역자들도 많이 보았다.
물론 나조차도 자유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말로만 귀로만 듣던 옥 목사님의 실체를 두 눈으로 보고, 『평신도를 깨운다』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낀 이 시간은 내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고, 이 땅에서 어떤 목적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결단하게 해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미쳐야 한다. 더 미치고 싶다.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았고, 무엇을 위해 죽었느냐가 문제다”라는 안토니 블룸의 말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