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김영삼 목사_ 금광교회
‘한 사람이 소중하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맞는 명제이면서도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이다. 이 말은 제자훈련 철학을 가진 목회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역의 내용이나 구조와 상관없이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목회자는 하나같이 한 영혼을 위한 마음으로 목회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영혼에 대한 철학을 바로 이해하고 목회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간혹 큰 교회는 한 사람에 대한 소중함이 없고, 작은 교회는 한 사람에 대해 절실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큰 교회에서는 한두 가정이 이사 가거나 교회를 떠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작은 교회는 한 가정만 떠나도 심각하다고 말한다. 참 가슴 아픈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바꿔 말해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한 영혼을 다분히 교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슬픈 이유는 나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훈련의 목적 : 삶의 변화인가, 사랑인가
한 병원에 심방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정신병원 겸 알코올중독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었다. 병원 특성상 자유롭게 면회를 할 수 없고, 환자의 외출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외부와 소통하는 것조차 보호자의 요청에 따라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그곳에 교회 안수집사 한 분이 입원하고 있어 그의 아내 되는 집사님과 함께 면회를 갔다.
그분은 1990년도부터 우리 교회에 나오셨다. 그동안 교회 곳곳에서 열심히 봉사했다. 제자훈련과 사역훈련까지 받았다. 하지만 음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종종 음주로 인해 어려운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그것이 갈수록 심해져서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분에 대한 주변의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그분을 좋아하는 것은 고사하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나는 그분을 보면서 잠시 목회에 회의를 느꼈다. 분명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는데, 그의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은 말씀을 전달하는 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훈련을 하면 다 변화될 것 같았는데, 오히려 전보다 증세가 심해진 것을 보며 훈련사역에 갈등을 느꼈다. 나는 그동안 훈련사역에 대해 자신했었다. 좋은 결과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변화들과 함께 수많은 간증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같은 자긍심에 커다란 흠집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이에 구차한 변명들을 생각했다. ‘예수님도 3년 동안 제자훈련을 하셨지만, 가룟 유다 같은 존재가 있지 않았나?’ ‘3년간 제자훈련을 예수님께 직접 받은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변명에 불과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분석과 전환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나는 제자훈련 목회를 해 오면서 중요한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성도들의 변화를 제자훈련 목회의 최종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목회가 곧 성도들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목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수많은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목회 현장에서 많은 열매를 직접 봤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가 제자훈련 과정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변화’였다. 그것을 위해 과제를 부여하고, 어떻게 성실하게 과제를 완성하는지 주목했다. 큐티를 몇 회를 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읽는지, 주간 계획 점검표를 얼마나 완벽하게 실천하는지 점검하는 것이 훈련의 중요한 과정이었다.
술을 끊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박수를 쳤고, 봉사의 자리에 선 것을 보면서 흐뭇해했다. 훈련생 기록지에도 훈련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지가 주요 관찰 내용이었다. 이런 과정들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극히 정상적인 훈련 과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타성에 젖기 쉽다. 근본 정신을 놓치고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정밀한 진단이 필요했다. 진단의 핵심 물음은 이것이었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철학이 내 목회에 잘 스며들어 있는가?’
예수님의 제자훈련 사역을 다시 살펴봤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간 제자들과 함께 사시면서 드러난 모습들에 주목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는 핵심 철학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훈련자나 목회자가 훈련생이나 성도들을 향해 가져야 할 최종의 목표는 ‘삶의 변화’가 아니라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셨다. 3년간의 세월을 함께했지만 제자들의 삶에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신들의 삶에 좌절해 이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만약 삶의 변화가 훈련의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실패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의 변화되지 않은 모습에도 예수님의 제자훈련이 실패하지 않았음이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훈련 목적이 ‘변화’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사명자로 변화시킨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상황과 변화와 관계없이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것이 결국 그들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됐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는 훈련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 내는 결과다. 훗날 제자들은 놀랍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후에 일어난 일이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을 배반한 제자 베드로를 회복시키는 장면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3년 동안 자신에게서 무얼 배웠는지, 왜 변화되지 않았는지, 너무 실망했다든지 따져 묻지 않으셨다. 그리고 베드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 한 가지를 반복해서 물으셨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사실 그 물음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는 의미다. 사랑이야말로 예수님께서 3년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었다. 베드로는 주님의 물음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주님에 대한 사랑 고백은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다. 그동안 베드로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사명을 회복시키는 터닝 포인트다. 이후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자신이 원하던 길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간 것이다. 이렇게 그를 변화시킨 것은 실수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확인이었다.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이 베드로에게 ‘변화’를 가져다 줬다. 나아가 주님께서는 사랑을 회복한 베드로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신다. 이 역시 세 번 반복하신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목양에 대한 사명을 주신 것이다.
내 양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말에는 목양하면서 두 가지를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는, 목양할 때는 주님에 대한 사랑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분명하게 확인하신 후에 목양을 명령하셨다. 그것이 조건이기 때문이다. 선행돼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절대 목양을 할 수 없다. 목양은 사랑을 전제로 가능하다.
또 다른 하나는, 주님의 양을 내가 대신 목양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양을 대해서는 안 된다. 영혼이 소중한 이유는 내 양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도는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어떤 영혼도 절대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양에 대한 평가는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도록 하시면서 늘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의 명령에 따라 인도할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양이든지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목회자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0장이 잘 보여 준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 서로에 대한 ‘앎’이 관계의 핵심이다. 성경의 ‘앎’은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말한다. 목자는 양의 사정을 꿰뚫고 있고, 양은 목자의 소리를 듣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정도의 ‘앎’은 깊은 관계가 이뤄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결국 목자와 양은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관계다.
주님께서 목회자인 내게 주신 사명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전제 조차도 의미가 없다. 주님께서는 절대 자기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훈련이라는 시스템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변화를 기대하고 기도하며 달려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매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몫이다. 내가 할 일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원로목사님이 담임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김 목사, 너는 어떤 목사가 되고 싶으냐?” 물음의 의미를 잘 몰라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원로목사님이 유언처럼 남겨 주신 말씀이 있다. “존경받는 목사가 되려 하지 말고, 사랑받는 목사가 되라.” 나는 목회를 내려놓는 시간까지 그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붙잡아야 할 것은 사역이 아닌 사랑
나는 설교한 대로 살 수 있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 작은 흠이라도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돌아본다. 그것을 통해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는 별개다.
나는 부끄럽게도 성도들의 행동이나 변화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신앙적인 판단을 해 왔지,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꽤 잘 달려왔다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훈련생 한 명 한 명을 가슴에 품고,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혹시 조금 부족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지언정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모든 성도의 형편을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변명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만나고 상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 내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사역’이 아닌 ‘사랑’이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선순위의 문제다.
몇 해 전에 <울지마 톤즈>란 영화를 감동적으로 본 적이 있다. 고(故) 이태석 신부의 생애를 다룬 영화다. 그 영화가 내게 준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다. 선교는 사역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고 같이 사는 것이 선교다. 그것이 전제되면 하나님께서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보여 주신다.
나는 이 교훈을 깨달은 후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인터뷰할 때 절대 선교사역계획서를 보지 않는다. 단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그들과 함께 살 준비가 돼 있는지만 확인한다. 사역 계획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과 함께 살다 보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동적으로 알게 된다.
선교하면서 자신이 사역하는 지역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을 본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거나 ‘게으른 사람들’이라는 식의 이야기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선교사로서 그의 자격은 끝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파송 선교사들은 일보다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 된 것이다.
사랑이 변화를 가져온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근거도, 3년간 그들에게 보여 주신 것도,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것도 바로 사랑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오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 나는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선다. 앞으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날지 설레고 기대된다.
김영삼 목사는 총신대학교와 총신대신학대학원, 풀러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하다가 현재 금광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