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015년 12월

기획2 * 다시 십자가 앞에 서다

기획 이기혁 목사_ 대전 새중앙교회

세월의 두께가 더해 갈수록 달라지는 것이 있다. 일의 ‘속도’보다는 일의 ‘내용’으로 삶의 중심이 기울고, ‘소란스러움’보다는 ‘침묵과 정숙’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많음’이나 ‘보임’보다 ‘단순함’이나 ‘의미’를 묻는 일이 더 잦아지고, 내면에 더 기웃거리는 습성이 생기는 듯하다. 어쩌면 눈부신 아침보다 고즈넉한 황혼의 매력에 발걸음을 멈추고 싶어지는 것 같다.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어지러이 흐트러진 서재도 정리해야 해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생각 조각들도 빈 상자에 주워 담아야 한다.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시간 선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금년과 내년을 나누는 먹줄도 없지만, 일출봉이라도 찾아가 새로운 도전과 다짐을 통해 잃어버린 점수를 만회하고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깊어가는 이 밤에 지나온 시간들, 접어 둔 책장 사이에 끄적인 흔적들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내가 밟고 지나온 시간들, 손때 묻은 사역들과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에게서 내일을 위한 의미를 헤아린다. 그리고 보다 나은 ‘다음’을 다짐하려고 한다.
요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이 습관처럼 돼 버렸다. 지난 6개월 동안 십자가를 주제로 설교한 탓이기도 하지만, 자꾸 생각 속에서 십자가가 새록새록 선명하고 굵게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자가 앞에 다시 서서 피로 얼룩진 십자가를 올려다본다.
십자가에는 삼원색이 있다. 저주와 사랑과 비전이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교훈을 포함한다. 십자가가 내게 말을 건넨다. “방향을 잃지 않도록 바른길을 가라. 후회하지 않도록 올바른 일을 하라. 부끄럽지 않도록 본질적 사역에 집중하라. 그러면서도 하늘 선비의 자태를 잃지 말라.”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십자가는 내게 분명한 방향을 보여 주는 표지판이다. 우리 주님께서 매달리셨던 그 십자가만이 내게 생명과 삶의 의미를 준다. 쓰레기란 더 이상 곁에 둘 가치가 없어 버려진 폐품이 아닌가. 사용할 가치도, 의미도 잃어버린 존재에 불과하다. 그게 내 모습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 올린 존재가 바로 나다. 지금까지 나는 가면 속에 자신을 감춘 채 추하게 거드름을 떨었다.
가면을 벗기면 일그러진 자화상이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거짓의 가면을 벗겼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본래의 내 모습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 앞에서 침묵하며 머리를 조아린다.
제자훈련을 할 때에나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 그리고 목양의 동역자들을 만날 때에 ‘십자가 앞에서의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신 주님의 은혜에 만족하고, 그 사랑에 눈물 흘리던 순간들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할 수만 있으면 나서지 않고 침묵하며, 지혜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일에 더욱 집중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사역에 집중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죄악들로 말미암아 절규하며 몸부림치던 나를 포근하게 안아 주시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중학교 2학년 때 외로움 속에 웅크린 내게 다가오셔서 위로해 주시던 우리 주님,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수련회 때 식장산 계곡에서 나를 부르시던 주님의 음성, 신학교 4학년 때 삼악산 바위 밑에서 나를 찾아오신 나의 사랑,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나 같은 죄인을 품으신 주님은 한결같으시며 위대하신 사랑이시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눈물이 맺힌다. 철없던 29살의 어린 나이에 목회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교회를 개척해 지금까지 온 모든 순간순간, 주님께서는 방향을 잃지 않도록 나를 이끌어 주셨다. 주님은 언제나 피 묻은 십자가 아래에서 내가 본래의 모습을 잊지 않게 하셨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시기에 천 번을 불러도 눈물이 고이는 십자가의 그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분주하게 달려가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다. 나름 바쁘게 사역했다고 생각하며 질주했는데,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계속 고집스럽게 달려간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스스로 만족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불행이다. 십자가 앞에 서면 나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주님께서 쏟으신 피로 나를 살리신 사랑의 신비 앞에 온몸이 떨린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고 주 앞에서 의인이 된 그 은혜가 십자가 앞에서 나를 덮는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십자가 앞에 서면 더 이상 나의 존재감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십자가 앞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 드러내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만이 높임받으셔야 한다. 이것이 ‘Coram Deo’의 삶이다.
현대의 목회 환경은 사회적 가치관에 익숙하도록 강요한다.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반복해서 부추긴다.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고, 자신의 가치관이 의미 있고, 자신의 비전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맛을 내고,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라고 설득한다. 자신만의 가치를 상품화하는 것이 곧 성공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곳이 교회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채워진 물이 되고 싶다. 아무 맛도 없는 그런 물 말이다. 맛이 없는 물이 가장 좋은 물이다. 정말 좋은 물은 색깔도 없다. 순수 100%의 물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물이 되려면 익숙하고 길들여진 맛을 제거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먹음직스럽게 하는 색깔도 지워야 한다. 그래야 순수한 복음을 드러낼 수 있다.
가면 속에 온갖 탐욕과 명예욕을 감춘 채, 그것을 비전이라 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억지 부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좌표를 확인하고,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은 십자가 앞에서만 가능하다.

 

부끄럽지 않으려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십자가 앞에 머물러야 한다. 십자가 없는 명분이 아무리 정당해도 그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변명일 뿐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것이 불변의 진리다! 여기에는 어떤 설득이나 논리도 없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에는 자기 부인이 따른다. 주님을 위한 비전이라고 항변하는 야망을 부인해야 한다.
제자훈련을 할 때는 허세를 버리고, 거짓도 버려야 한다. 정직이 능력이다. 나를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훈련생들을 가리켜 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일 뿐이다. 나는 함께 제자훈련을 받고, 사역훈련까지 받은 형제자매들을 내 제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 교회 여섯 분의 장로님들은 모두 나와 함께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받으신 분들인데, 그중에는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고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받으신 분도 계신다. 나는 그분들을 나의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다. 동일한 제자임을 잊지 않으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요한계시록 2장에 등장하는 에베소교회를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에베소교회는 바울 사도가 눈물로 세운 교회다.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를 이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교회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신다.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이 정도의 칭찬을 받은 걸 보면, 이 교회는 꽤 규모도 있고 조직도 갖췄을 것으로 보인다. 시스템에 의해 빈틈없이 움직이는 교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로 기록된 4절만 없었다면, 에베소교회는 교회 성장 학자들의 이론으로 평가할 때 아마도 100점 만점에 그 이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에베소교회는 누가 보더라도 건강한 교회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교회였던가? 얼마나 모범적인 교회인가? 당대를 대표할 만큼 모델이 될 만한 교회가 아닌가? 우리는 이런 교회를 꿈꾸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보더라도 칭찬받을 만한 교회다. 이만한 교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판단 기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평가는 사뭇 다른 것 같다.
교회 성장 학자들은 강점으로 일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치명적인 약점을 묵인하지 않으셨다. 그 점 때문에 에베소교회는 폐쇄 직전에 놓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긴장한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심정이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주님의 평가가 두렵다. 그래서 십자가 앞을 떠날 수 없다. 제자훈련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다르게 평가하신다면 오금이 저리는 일이 아닌가?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엄한 어조로 분명하게 강조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이 대목을 읽을 때면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 사도가 평생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는 다시 오실 주님을 한 시라도 잊은 적이 없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흠모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바울은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값없는 곳에 낭비하지 않았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십자가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다짐해 본다. 제자훈련이 허울 좋은 제자훈련이 되지 않도록, 기술적인 훈련이 되지 않기를 다짐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영문 안에 있는 평온함이나 안정된 보금자리를 떠나 영문 밖으로 나아감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그런데 어느덧 영문 안에서의 삶에 익숙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존경받을 때 만족스러운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상석에 앉아 은근히 나를 과시하려는 속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나 자신이 밉다. 더 늦기 전에 십자가 앞에 무릎 꿇으려 한다. 입에 재갈을 물어야 한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내가 어떤 존재였던가를 기억해야 한다. 더 부끄러움을 당하기 전에 말이다.

 

하늘 선비로 살아가려고
나는 ‘선비’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왠지 고상한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친을 생각나게 하는 단어여서 좋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그야말로 선비셨다. 글을 좋아하셨고 조용하셨다. 누구와 다투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을 존중하며 대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셨고, 어떤 경우에라도 은연중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교훈하셨다. 지금도 내게 ‘아버지’는 선비로 남아 계신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칭 ‘하늘 선비’라 칭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어서다.
선비의 길은 구별돼 있다. 소위 거룩함이다. 나는 누구와 경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함께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저 묵묵히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살고 싶다.
경주에 가면 경주 최 씨가 운영하는 ‘요석궁’이라는 한식 전문점이 있다. 오가는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는 것을 가훈으로 삼았던 최 씨 가문의 자랑스러운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정성 가득한 음식으로 품격을 갖춰 접대하면서도 결코 위압감을 주지 않는 가풍이 좋다.
나는 하늘 선비로서 품격을 잃지 않고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고,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한다. 보다 더 자세를 낮추고, 보다 더 친밀하도록 다가서고, 누구보다 먼저 섬기는 태도를 갖고 싶다. 우리 주님은 섬김받으려고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 오히려 섬기려고 오셨다. 섬김의 백미는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는 것이다.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시간에 얼마나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는가를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종종걸음으로 가던 길을 재촉해 남은 길을 걸어가리라. 이것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기혁 목사는 총회 개혁신학연구원과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Fuller Theological Seminary.(D. Min.)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를 대전 CAL-NET 대표, 학원복음화협의회 충청 대전 지역 공동대표, 대전 새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