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기혁 목사_ 대전새중앙교회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 수가 성에는 유명한 유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야곱의 우물’이다. 이 우물을 야곱 시대에 팠다면 그것은 최소한 1,700년이라는 역사를 지닌 유적지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마르지 않아 여전히 사람들이 그곳에서 물을 길었다면 대단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 된다. 하루 평균 50명이 이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면, 1,700년 동안 최소 3,000만 명 이상이 이 우물물을 마셨을 것이다.
이 유서 깊은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름 모를 한 여인을 만나셨다. 대인 기피증이 있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을 예수님께서는 독대하셨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생하는 생명수를 공급하셨고, 잔뜩 움츠렸던 여인의 영혼에 불을 지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짧은 시간에 한 여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셨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던 여인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셨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던 여인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인으로 바꾸셨다.
‘야곱의 우물’이 교회였다면
만일 ‘야곱의 우물’이 교회였다면 어땠을까? 1,7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교회,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대는 교회, 여전히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교회라면, 그래서 많은 사람이 찾는 교회라면 어떻까? 물론 그런 교회는 없는 듯하다. 영국 스코틀랜드 지역을 지나다 보면 500년 이상 되고, 천 년이 넘은 교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교회가 없을 뿐이다.
오늘날 이런 역사를 지닌 교회가 있다면 그곳에 박물관을 능가하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문을 내걸며,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게 함으로 관광지로서의 선전 효과를 얻었을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최신 음향 시설과 조명 시설을 갖추고 안락한 의자와 테이블을 배치해 ‘야곱의 우물 카페’를 만들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친환경 재질의 두레박을 설치하거나, 더욱 편리하게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도록 첨단 장비를 동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우물까지 나올 필요 없이 각 가정으로 파이프를 연결해 손쉽게 집까지 물을 공급하는 사업을 착수하거나 생수 배달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야곱의 우물’이 교회였다면 그리고 편리 시설을 갖췄다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과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과 영생에 대해 논할 수 있었을까?
지난 6월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지역 교회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곳에서 영국 교회들을 방문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영국 교회 목회자들이 복음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부흥을 갈망했다. 그래서 교회 내에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보며 많은 교회가 사람들의 필요에 주목하고, 그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됐다.
그들은 불신자로 하여금 교회와 접촉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일에 과감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요즘 한국 교회들은 ‘사회봉사’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현대 교회는 사회봉사에 주목하는가?’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은 ‘복음의 접촉점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많은 교회가 사회를 향해 문을 열었다. 사회봉사는 요즘 같은 시대에 정말 필요한 사역 영역이라는 데 동의한다. 교회는 대중과 접촉점을 만들기 위해서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되짚어 볼 부분이 있다. “그것이 과연 사역의 본질인가?”, “부르심의 목적인가?”, “교회의 핵심 가치인가?”, “정말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이다.
섬김의 대상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예수님께서는 대낮에 야곱의 우물가를 찾은 여인을 주목하셨다. 잔뜩 경계심을 갖고 물을 긷던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셨다. 그리고 여인에게 눈높이를 맞추셨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하셨다. 그래서 먼저 물을 달라고 요구하신다. 물을 요구하는 사람의 청을 들어주거나 혹은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여인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생수의 근원되신 그분께서 한껏 몸을 낮추셨다. 섬기는 자는 섬김받는 자를 배려해야 한다. 상대방이 부끄러운 수혜자로 인식하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을 낮춰야 한다. 바쁘고 할 일이 많음에도 이렇게 왔으니, 받을 테면 받고 말라면 말라는 식의 섬김은 상대방으로부터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말고 주는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라는 식의 헌신이나 섬김은 차라리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그것은 섬김이 되기는커녕 상처가 된다.
우리는 섬기는 사람의 편리가 최대한 보장된 섬김을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섬김받는 사람이 존중감을 느끼도록 봉사해야 한다. 여우와 두루미의 식사처럼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 농어촌 교회 여름 봉사를 할 때였다. 여름성경학교 교사팀을 꾸리고 농촌 봉사를 떠났다. 준비해 간 모든 공과 교재와 시상품, 찬양곡, 그리고 농촌 소독을 비롯한 일손 돕기 등을 차례로 풀어 나갔다.
우리는 준비한 것들의 60% 정도만 소화했다. 나머지는 그곳 교사들에게 전수하고 조용히 떠났다. 우리가 떠난 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도시 교회를 동경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흔적은 남는다. 우리는 또한 도시에서 온 젊은이들의 발랄한 행동, 신체 노출 등이 농촌 문화에 상처를 내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주변에서 목회자로 부름받고 사역하는 동역자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많다. 그분들 중에는 소심한 이들이 있다. 처음부터 소심했을 이들은 거의 없다. 목회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심해졌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비하하는 표현을 할 때면 가슴이 미어진다.
내게도 고통이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천군만마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었다. 한 영혼의 소중함에 노심초사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지역의 한 모퉁이에 십자가를 내걸고 고군분투하는 동역자들에게 힘을 주고 격려하는 교회가 되자고 다짐하며, 끊임없이 교우들에게 이를 강조한다. 개척 교회의 곰팡이 냄새나는 지하에서 몸부림치며 흐느끼는 동지들과 함께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런데 교회 자랑을 하지 않으려고 입에 재갈을 물어도 못된 자랑이 어느새 새어 나온다. 첫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스스로 채찍을 휘두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쁘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할 일이 많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에게는 목회를 할수록 밀짚모자를 눌러쓴 농부의 심정이, 국수 한 그릇에 만족하는 소탈함이, 땅바닥에라도 털썩 주저앉는 투박함이 필요하다.
섬김의 성취감을 포기하고
이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성취감을 포기해야 한다. 봉사의 자리에서 성취감을 느끼려는 욕구를 뿌리치는 것도 훈련이다. 섬김 이후에 찾아오는 성취감, 포만감, 자존감, 희열은 섬긴 자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임에는 틀림없다. 얼마나 가슴 벅찬 보람인가. 몸은 극도로 피곤하지만 영혼의 상쾌함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감정 때문에 또 다시 섬김의 현장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성취감을 거머쥐고 싶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마치 아무도 못하는 거대한 사역이라도 한 것인 양 교만의 그림자가 혈관을 뚫고 흐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성취감에 익숙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짓에 속는다. 지나간 것을 잊는 것도 은혜다. 잊히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면 된다.
아직도 성취감의 망령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면,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생각은 포기하는 것이 좋다. 심판주로 오신 주님의 오른편 양들은 지난날의 섬김을 송두리째 잊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들을 떠올리도록 도우셨다. 하지만 왼편의 염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추억들을 뭉개 버리셨다. 비극이다.
영광의 그림자 컬러를 지우고
섬길수록 컬러 그림자를 기대하지 말라. 그림자는 흑백이다. 그림자가 컬러일 수는 없다. 우리의 흔적에 화려한 색상을 입히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허황된 꿈을 정당화하는 버릇이 생긴다. 화려한 꿈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주문에 걸려 한없이 벌여 놓은 사역들을 들춰 보고 과연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새겨 있는지, 아니면 그 신비한 그늘 속에 ‘자신의 영광’이 새겨진 것은 아닌지 스스로 냉혹하게 판단해야 한다.
자신에게 솔직해지자. 치열할 정도로 진솔해지자. 제자의 길을 외치면서 제자의 길을 망치는 일은 없었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결국 자신의 영광과 업적을 위한 투자를 하지는 않았는지 솔직히 자문해야 한다.
사역의 이름으로 자신의 명성을 추구하는 것만큼 치졸한 것도 없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좁은 길이다. 주님께서는 이 길을 걸으라고 말씀하셨다. ‘좁고 험한 길’은 확장 포장되지 않는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의 길은 여전히 험하고 좁은 길이다. 주님께서 이 길을 걸으셨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걷는다는 것은 분명 명예로운 일이다!
받은 은혜를 헤아릴 수 있다면
죄악의 쓰레기 더미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쓰레기만도 못한 나를 주님께서 구원하셨다. 나의 근본은 더러운 죄악 그 자체다. 나 자신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나는 믿을 만한 사람인가? 벌거벗은 채 서 있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존재인가? 나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배움도 턱없이 미천하다. 인격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목회자라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울 때가 많다. 나도 나를 믿을 수 없는데 누가 나를 믿어 주겠는가?
이렇게 수치스런 나를 사랑한다고 공공연하게 고백하신 분이 계신다.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에 기대기는커녕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다. 그분 곁에 가는 것이 두렵다. 그저 멀리서 그분의 그림자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내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깨끗한 주님의 피로 씻어 주셨다. 그리고 따라오라고 부르셨다. 감히 나 같은 죄인에게 말이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찬송을 부를 때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목이 메이고 눈물이 고인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눈물 없이는 걸을 수 없는 길이다. 이 은혜를 받은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앞서 가시는데, 나 자신을 부인하고 그분을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어찌 좁은 길을 떠나 넓은 길로 갈 수 있는가? 어찌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명예의 길을 탐하겠는가.
야곱의 우물 곁으로 가자
예수님께서 서셨던 그 자리에 감히 서서 그분을 바라보자. 대인 기피증에 걸려 벌건 대낮에 물을 길러 왔던 이름 모를 여인을 주님께서 마주 대하셨던 자리에 서 보자. 경계심 가득한 여인을 그녀의 눈높이로 바라보시던 그 자리, 목마른 자신의 영혼을 잊고 육신의 마른 목을 축이려고 물을 긷던 그 여인에게 다가서시던 그 자리, 여인의 가슴속에 피멍 진 상처를 포근하게 감싸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하신 주님의 마음을 구하자.
야곱의 우물 곁에서 지켜 본 목양의 길에서 주님의 뒤를 따르자. 그리고 감히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조차 없을 만큼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버려진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이 너무 감격스럽다면, 야곱의 우물 곁으로 가자. 아무도 없는 시간을 찾아 물을 긷는 이웃에게 다가가자.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키며 눈높이를 낮춰 조용하게 흔적도 없이 그를 섬기자. 바로 야곱의 우물 곁에서 말이다.
이기혁 목사는 총회 개혁신학연구원과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풀러신학교(D. Min.)에서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를 수료했다. 현재 대전지역 CAL-NET 대표, 학원복음화협의회 충청 대전 지역 공동대표, 대전새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