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정국 사무총장_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선교와 전도의 기쁜 추억
선교와 전도를 무엇으로 표현할까?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 그때 느꼈던 구원의 감격이 남달랐기에, 전도할 때마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것을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고(故) 옥한흠 목사님은 제자훈련 받고 뜨거워진 대학생들이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말리곤 하셨다. 오히려 세상과 직장에서 전문직 사역자로서 예수의 제자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기 바라셨다. 그러나 그런 분이 내게만큼은 “너는 신학교에 가라”라고 권유하셨다.
당시 나는 갓 예수를 믿었지만 어떤 말씀이든지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던 시절이었다. 스승이시던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말씀의 요점을 딱딱 집어 가르쳐 주셨고, 제자훈련을 통해 나는 말씀의 단맛을 풍성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뜨거워진 열정은 성도교회 대학부 선교부장을 맡았을 때 전도로 표출됐다. 마침 서강대학교 CCC 창단 멤버로도 활동을 병행했는데, ‘선동의 은사’가 있었던 나는 청년들을 이끌고 빌리 그레이엄 선교대회나 엑스폴로 선교대회 등 선교 관련 집회에 자주 가곤 했다. 당시 얼마나 전도에 열심이었던지 남산 공터에 올라가 간증을 외쳐대면 사람들이 이를 듣고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시내버스 안에서도 전도를 했었는데, 지금도 가끔 그때의 순수한 열정이 떠오른다. 내 절친한 친구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전도에 목숨 건 내게 ‘사도 바울’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이후 종합무역 상사맨이었을 때나 국제 선교 무대에서의 나의 닉네임은 늘 ‘Paul Han’이었다.
불교 믿던 가족들을 주님 품으로
우리 집안은 무속 신앙이 강한 불교 집안이다. 나는 오랫동안 집안에서 눈엣가시였다. 가족들은 대놓고 나를 미친놈 취급했다. 형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번은 집에서 식사기도를 하는데, 아버지가 머리를 세차게 때리셨다. 그래서 네비게이토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영어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고, 성경은 신문지로 싸 들고 다녀야 했다.
당시 꽤 큰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은근히 내가 마음을 돌이켜 사업의 대를 잇기 바라셨다. 그런데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자 그런 기대마저 산산조각이 났던 아버지는 모든 게 무너졌다는 표정으로, “다시는 내 집에 오지 말라”라고 명하셨다. 그러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냉랭하시던 어머니가 소천하기 3년 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를 불러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것 같다. 형제들 중 네가 가장 평안해 보인다”라며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이후 형제들이 하나둘씩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정의 복음화는 먼 친적들에게까지 번졌다. 어느 해 연말 깊은 밤, 인도네시아 선교지에 있을 때였다. 미친놈이라 욕했던 형이 사랑의교회 서리집사로 임명받자 내게 전화를 했다. “잠이 안 온다. 이 기쁜 소식을 네게 가장 먼저 전해 주려고 전화했다”라며 흥분된 목소리로 고마움과 기쁨을 전했다. 그때 나는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신학교에 다니며 선교의 뼈대를 세우다
5년 반 동안 종합무역상사와 미국 회사의 서울 지점장과 성도교회 재직회 부서기로 30세까지 섬기던 나는 선교사로서 삶의 방향을 전환하게 됐다. 여기에는 아내와의 불화가 씨앗이 됐다. 아내 역시 대학교 4학년 때 선교에 도전을 받긴 했지만, 내가 선교와 사역을 위해서는 가정생활에 소홀해도 된다고 생각해 한쪽으로 치우친 제자훈련에 열심을 내자 그만 폭발해 버린 것이다.
부부 싸움 끝에 아내는 내게 이혼을 이야기했다. 충격을 받은 나는 한얼산기도원에서 3일 동안 기도로 매달리며, 예수 안에서 또 한 번 새로운 삶을 결단했다. 앞으로의 삶은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한 나는 합신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옥 목사님으로부터 신학교에 가라고 권유받은 후 7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리고 합신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하시던 옥 목사님과 다시 만났다. 그때 나는 옥 목사님이 강의하신 ‘제자훈련과 전도학’을 들으면서 선교의 뼈대를 세울 수 있어 뿌듯했다. 당시 나는 신학교를 다니며, 남서울교회 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했다. 제자훈련을 통한 신앙의 뼈대와 논리적 구성, 사람에 대한 관심은 옥 목사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역동적인 설교 스타일과 실수를 용납하는 마음은 홍정길 목사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남서울교회에서 3년 반 사역한 후 목사안수를 받자마자 OMF 선교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1년 전 인도네시아 칼리만타섬(보루네오섬)에서 사역한 일본인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거기만큼은 못 가겠다”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1985년 12월 OMF 지도자들이 나를 그 섬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순종하겠다고 결단했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비자 추천 허가가 나지 않았다.
사람 낚는 어부의 기쁨을 누리다
하나님께서는 예상 밖의 문을 여셨다. 인도네시아 기독교대학(UKI) 경제학 교수로 나를 사용하신 것이다. 31년 전 나는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받아 인도네시아로 왔다. 성경학교로 가는 사역의 문이 열리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나를 일반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보내시며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의 문을 여신 것이다.
성경학교 사역 준비를 많이 한 내게는 의외의 길이었지만, 캠퍼스 사역을 만끽해 봤기에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9개월 정도 인도네시아어를 익힌 채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큰 규모의 기독교대학(한국의 연세대 정도의 대학)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급히 경제학 교수를 구하고 있을 때, OMF 인도네시아 선교부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내 이력을 내밀었고, 이를 통해 그 대학의 초청을 받아 부임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전에 교수를 해 본 적이 없어 쉬운 원론 과목을 가르치기를 원했으나, 내게 들어온 과목은 고등 과목인 ‘국제경제학’과 ‘경제 발전론’이었다. 첫 시간 강의실에 들어설 때 나는 엄청나게 긴장했다. 인도네시아어로 강의하는데 땀 흘리며 첫 강의를 마쳤고, 질문이 있는지 물었을 때 아무 질문이 없음에 안도했다.
사자 굴에서 사자들의 입을 봉인하는 다니엘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크게 감사했다. 그러나 3주 후 학생들이 나의 서툰 인도네시아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얼마나 낙담했는지 모른다.
인도네시아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던 첫 학기의 긴장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죽하면 기도하다가 울면서 내 입장을 하나님께 항의해 보기도 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왔지, 경제학을 가르치러 이곳에 왔습니까?”
첫 학기를 마치고 둘째 학기가 시작될 때 학생들은 내 배경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학생들은 “한정국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목사라면서 왜 우리에게 국제경제학을, 선교사라면서 왜 우리에게 경제발전론을 가르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뻘뻘 흘리는 땀을 닦아가며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학생들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교수 사택에 놀러 오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여러 팀이 나를 방문했다.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나는 내가 대학교 1학년, 죄 중에 방황하던 시기에 나를 만나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이후 거의 날마다 전도의 기회가 생겼다. 내가 학교 별명을 ‘기회의 대학’이라고 붙일 만큼 전도의 기회가 많았다.
또 주말에는 순다 족속 교회에 출석하며 뒤늦게 ‘족속’의 개념을 깨닫고, 선교 현장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미전도 족속에게로 가서 제자훈련 해야 함을 자각한 것이다. 순다족 교단은 성도 수가 2만 3천 명에 달하는데, 나는 주말 교회 개척 사역과 특별 목회 사역을 하며 선교에 눈뜨게 됐다. 이미 균형 있는 제자훈련을 터득한 나는 현지인 제자훈련에 재미를 붙였고, 수많은 현지인들이 예수의 제자로 세워져 가는 모습을 보며 큰 기쁨을 느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전도자와 선교사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시간이다. 세계 최대의 회교 인구수를 자랑하는 인도네시아에서는 저잣거리 또는 공원에 가서 큰 소리로 복음을 외칠 수가 없다.
감사하게도 나는 우리 집 소파에 앉아서 나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제발로 우리 집을 찾아오는 물고기(학생)들에게 복음을 마음껏 전하며, 사람을 낚는 어부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동창생 한인권 형제(사랑의교회 장로 겸 의사)가 내게 전한 예수의 복음을 그대로 전했을 뿐인데 말이다. 감사하고 신기한 일이다.
어두운 그림자와 같았던 1년
그러던 나는 빛이 강한 날 그림자가 유난히 짙다는 것을 인도네시아 열대 지방에서 사역하는 동안 경험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생소한 국제경제학 교수로 사역했던 첫 1년은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세월이었다. 인도네시아어를 9개월간 배우고 그 어려운 국제경제학을 1년 동안 가르쳤고, 서툰 내 인도네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을 대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게 전도의 기회가 됐으니 감사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선교지에서의 그림자와 같은 상황에 대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시 44:22)라는 시편 기자의 하소연을 종종 인용했다.
첫 1년 동안 강의를 위해 집 문을 나서는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내게 전도의 기쁨을 가져온 전제가 됐다. 부활의 기쁨이 있기 전에 암울했던 십자가의 고난이 전제된 것처럼 말이다.
동전으로 비유되는 선교와 전도의 기쁨
대학교 1학년 때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일이 다시금 떠오른다. 한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자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는 독실한 샤머니즘 불교 신자였다. 벽에 못 박는 일 하나에도 점쟁이에게 날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 집안에 이단인 예수쟁이가 생겼으니 핍박은 당연했다. 점쟁이가 한 지붕 밑에 두 종교는 저주라고 했으니 말이다. 주일 아침이면 조그마한 성경책을 신문지에 꼭꼭 싸서 탈출을 감행하는 탈옥수처럼 집을 나섰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예수님을 믿는 기쁨은 이전에 느낀 긴장과 스릴이 있었기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나와 같은 일을 겪는 신자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오늘 전도의 기쁨을 누리는 전도자들도 과거에 남모르는 수많은 눈물의 씨를 뿌렸을 것이다. 동전의 양면에는 서로 다른 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다른 모양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처럼, 선교와 전도는 기쁨과 어려움이 함께할 때 그 가치를 더욱 발한다.
한정국 선교사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M.A)과 합동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했으며, 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사무총장과 한국미전도종족선교연대(UPMA) 대표로 섬기고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 순다 족속 리서치 및 네트워크 사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