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017년 03월

기획1 * 제자훈련과 기도, 함께하지 않으면 메마른다

기획 이기혁 목사_ 대전새중앙교회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할 즈음이면 이전과 전혀 다른 DNA의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성경 읽기와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처음 교회에 나와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에 관심을 갖고 질문한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혹은 “어디부터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도는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순간 사람들은 왜 성경과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걸까? 

 

기도는 영적 본능이다
불편하겠지만 기도는 영적 본능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 물어봐도 기도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답한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직분과 관계없이 기도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기도에 대한 부담감을 갖는다. 그러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기도하지 못하고, 그런 자신에 대해 자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한 연수가 길수록 기도에 대한 열등감을 갖기도 한다.
기도는 영적 본능이다. 누가 강조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 어느 순간에 “아, 기도라는 것이 있어요? 기도가 뭐죠?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하고 뒤늦게 질문하는 사람은 없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은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도에 대한 방법론적이나 기술적인 문제가 있을지는 몰라도, 기도의 필요성이나 필연성에 대해서는 이미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쯤은 모두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기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기도하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도 본능이 소멸되거나 퇴화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 성경적 기도의 모범, 기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결여되면 기도는 신앙생활의 액세서리에 불과한 영역으로 도태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본능으로 기도는 무한 개발돼야 한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하단 말인가!
기도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기도는 빈부귀천에 따라 분류되지 않는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다. 직분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직결되는 영적 본능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영적인 염색체 안에 동일한 DNA 서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영적 심장이다
보통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기도는 ‘영적 심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호흡이든 심장이든 멈추면 죽는다. 그러나 호흡이 곤란하면 산소 호흡기를 부착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만, 심장이 멈추면 끝장이다. 심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심장은 멈추는 즉시 죽는다. 말씀이 영적 면역력을 유지시키는 필수 요소라면, 기도는 영적인 생명을 유지시키는 필수 요소다.  
피하고 싶겠지만 기도 본능을 자극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갈수록 무서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갈수록 기도하려는 의지도, 기도에 대한 열정도, 기도에 대한 헌신도 급감하는 것이 현실이다. ‘기도무용론’이 실제적 사고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기도 본능은 이미 퇴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능성을 주장하면 할수록 기도의 공간은 좁아진다. 기도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기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실제적 기도의 행위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능성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기도가 조명받지 못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에 효과적인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기도는 관계다
기도는 관계가 기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도로 직결된다. 기도에 집중한다는 말은 기도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기능’은 ‘관계’를 도외시한다. 기능만 수행할 수 있다면 ‘관계’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 세대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다. 어쩌면 교회에서조차 기능성 교인을 양산하는 시스템이 발전하고 있지 않나 염려된다. 기능성 시스템 안에서는 ‘관계적 기도’가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사람들은 단순히 기도에 대해 이해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운전하면서도 ‘기능적 기도’를 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기능적 기도란, 어떤 유형이든 기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기도를 추구하다 보면 기도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실행적 기도’다. 기능적 기도는 따로 시간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항상 기도에 힘쓰라’고 했으니까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행적 기도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정기적이고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도 규칙적으로 기도하셨고, 사도들과 심지어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도 규칙적으로 기도했다. 기도는 능력이다. 기도에 대한 많은 관심이나 역설보다 중요한 것은 실행적 기도에 얼마나 헌신하느냐다. 이에 따라 신앙의 향방과 강직도가 달라진다. 제자훈련에서 기도는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제자는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에서 마지막 코스는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였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시며 땀방울을 핏방울처럼 흘리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운 거리에 두시고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이 무엇을 깨닫기 원하셨을까?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당시 잠들어 있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신비한 능력의 근원이었다. 기도는 깨어 있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죽음의 잠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기도 본능을 자극해서라도 깨워야 한다. 훈련생보다 먼저 기도해야 하고, 훈련생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때로는 늦은 밤, 기도원에라도 함께 가서 처절하리만큼 기도에 매진해야 한다. 보여 주기 위한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도자가 먼저 기도의 씨름에 임해야 한다. 훈련생들이 피곤해서 잠들더라도 지도자는 기도에 집중하자. 갈멜산 자락, 적들에 둘러싸여 외롭게 무릎 꿇어 기도하던 엘리야를 잊지 말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독기 어린 눈동자가 제단 앞에 엎드린 엘리야의 굽은 등판에 꽂히고 있을 무렵, 흔들림 없이 기도하던 엘리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불로 기도 응답을 받았다. 또 3년 6개월 동안 지속되던 살인적 기근을 끝내고, 미혹의 바알 선지자들을 일시에 제거하는 쾌거를 거뒀다.


기도는 실전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겠지만, 기도는 실전이다. 지도자 스스로도 기도에 대한 훈련에 게으르지 않도록 혹독하게 채찍질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형편없고 추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역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기도하지 않은 채 어느 한순간도 지뢰를 밟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처해 있는 영적 환경은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기도는 생각이 아니다. 기도는 이해의 영역도 아니다. 말로만 기도를 강조해서도 안된다. 기도는 흐르는 시간에 정점을 찍고,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나아가는 실제 상황인 것이다.
기도는 폼 잡는 순간이 아니다. 멋을 추구하는 시간도 아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도에 사용되는 실탄은 미사여구로 포장된 공포탄이 아니다. 실탄을 사용하는 실전이다.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가름하는 순간이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mann)은 『시편의 기도』에서 역설적으로 말한다. “기도는 변화무쌍하게 소용돌이치는 삶의 대양에서 끊임없는 위기에 직면하여 일상의 힘으로는 결단코 넘을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들을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언어로 토해 내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원천적 울부짖음을 통하여 자신의 허물을 벗고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가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또한 기도는 영적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만다. 제자훈련을 기도훈련으로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책상머리에서 할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복적 기도를 통해 기도가 일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하루 30분 기도를 의무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가 시간 때우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목회자들은 기도가 생명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반복해 강조해야 한다. 지도자 스스로, 기도의 울부짖음이 잦아들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 뒤돌아보자. 매너리즘에 빠져 기도의 능력을 무릎 사이에서 발견하지 않고 책상머리 서적 속에서 뒤적인다면, 기도의 능력은 이미 ‘그림 속에 남은 불꽃’이 되고 만 것이다. 기도의 눈물이 메마르면 강단은 사막이 되고, 교회는 미세먼지로 뒤덮일 것이다.
감동적인 언어로 청중을 속일 수는 있어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으셨던 주님을 속일 수는 없다. 화려한 언어로 강단을 수놓을 수는 있어도, 메마른 영혼을 시원하게 적시는 물줄기가 될 수는 없다. 기도 없이 훈련생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영혼의 숨결에 생명의 샘물을 터뜨릴 수는 없다. 기도가 없는 제자훈련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기도와 믿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제자는 기도한다
주님은 “내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기도와 믿음을 동일시하시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는데 기도할 수는 없다. 주님은 기도하지 않는다면, 분주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보신다. 제자훈련 현장에서 드러난 ‘기도 미달 사태’는 세상을 향한 ‘영적 무력 증후군’으로 나타나고, 급기야는 스스로 죽은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걷는 시체 증후군’(walking corpse syndrome)이란 병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은 죽었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제자훈련에서 기도는 필수다. 선택이거나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기도에 대해 강조하거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도는 현재 진행형이요, 미완료형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 설득이 아니다.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죄성을 드러내어 십자가에 스스로를 처형하는 순간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기도 결핍증’은 ‘자기 우월증’으로 직결된다. 그것은 제자의 모습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는 ‘자기 죽음’에 직면하고 침묵한다. 그것이 십자가다. 십자가 앞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침묵만 있을 뿐이다. 제자훈련은 언어로 하는 작업이 아니다. 골방의 무릎 작업이다. 자, 이제 그만하고 골방으로 들어가자. 우리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리자.





이기혁 목사는 총회 개혁신학연구원과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풀러신학교(D. Min.)를 졸업하고, Southwestern 신학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대전지역 CAL-NET 대표, 학원복음화협의회 충청 대전 지역 공동대표, 대전새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