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디사이플
일시 2003년 12월 11일 오후 2시
장소 사랑의교회
진행 옥한흠 목사(국제제자훈련원 원장)
정리 주명석 편집장
옥한흠 목사: 계속 발전하는 한신교회와 건강한 목사님을 보니 참 감사합니다. 또한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가지고 함께 뛰는 관계가 됐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말씀과 한국 교회 안에서의 역할이 많은 분들에게 각인되어 후배들이 각성하고 도전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연말을 맞아 집중하고 계신 사역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이중표 목사: 항상 저 자신을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특별히 연말이 다가오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이 때문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저 자신을 새롭게 정리해야 한다는 과제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는 교회
옥한흠: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제자훈련하는 목사님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자훈련하는 목회자들 대부분이 자기성찰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적 안목에서 볼 때, 지금 우리나라가 여려 가지 면에서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일각에서는 총체적 위기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럴 때 교회가 어떻게 해야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중표: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역사에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의해 끌려가는 교회, 역사의 뒷전에서 관망하는 교회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각성을 요구하며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하면 교회 전체를 의미하지만 교회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역사 앞에 신선한 존재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로서 끊임없는 자기성찰, 자기 갱신, 자기 개혁, 자기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역사 앞에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 해도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항상 이런 고민을 안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에게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체념 또는 자기 한계에 대한 절망감이 깔려있는 듯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민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요? 이대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설혹 배가 가라앉더라도 선장은 끝까지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우리는 큰 문제 앞에서 나무 위축되고,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이중표: 그것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같은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사의 상황속에서 굉장히 초라하고, 역사 앞에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해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사명,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가지면서부터 역사를 바꿔놓는 큰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이 시대 속에서 역사앞에 당당히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도로서 세상에 나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역사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한다는 자기 솜영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만 살아있다면 역사의 현장에서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능히 새로운 동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무엇인가 달라질 것입니다.
목회자의 인격적 신선함 남겨야
옥한흠: 목사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제로는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위해 필요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중표: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교회가 모든 것을 주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회자 자신의 인격적인 신선함만은 사회에 남겨야 합니다. 이것만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워주는 일이 제자훈련이고, 또한 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도자를 깨우는 일은 부흥회화 같은 집회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을 훈련하고 깨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제시한 길 따라가야
옥한흠: 목사님께서 별세신학을 특별히 생각하고 강조하신 저변에도 같은 정신이 깔려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자존감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중표: 별세신학은 저 자신의 철저하고도 일관된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별세신앙이고 이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그것을 찾아낸다면 모든 것을 역사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담을 위해 사랑의교회로 오면서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평신도를 위한 제자훈련 입문서인 『길』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길`을 우리 생각대로 스스로 만들어서 나아가려고 하는 우를 범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제자 된 우리로서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자도이고 별세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재해석해준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는 분명한 신앙을 재확인시켜줌으로 해결되지 않을까요?
저는 한국 교회에서 신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내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구원신앙만 가지고 있는데 오늘 이 시대 속에서 "나는 에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사는 존재다"라는 신앙을 확인시켜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신앙 버리고 실존적 신앙 회복
옥한흠: 정말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주셨습니다. 다만 그걸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아는 데서마 ㄴ머물지 인격이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이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중표: 우리에게는 에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죽은 후에 천국 간다는 구원신앙은 있는데 자기 존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실존적 신앙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주도해나갈 동력이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옥한흠: 제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분명히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것을 알고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상식적으로는 다 아는데 그것을 이념화시키고, 철학적으로 정립하고, 자기 자신의 동력으로 삼는 데 무력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지불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제자도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전적으로 주님께 위탁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로 가려면 지금 받고 있는 대우와 처한 형편에서 상당히 더 낮아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것만을 남겨놓고 정말로 사랑을 실천하는 데 모든 것을 쏟아야 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더 기도하고 고난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느 ㄴ일에 자원하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그렇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목사의 삶은 현실 문화의 수준에 맞추어 적정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물론 모두가 에어컨으 ㄹ켜놓고 있는데 나 혼자 부채질만 한다고 하는 것이 꼭 성자란 의미는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제가 그들과 비슷하게 살면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더욱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죽는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한 실생활 속에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기 부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중표: 그런데 그것으로 과연 목회자가 자기 부인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거지 성자`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거지로 살아야 성자인가? 저는 그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삶은 신부나 승려의 삶과는 달리 수도사적인 동시에 경영자적입니다. 과연 목회자가 수도사적인 삶을 살아야만 목회자로서 이상적인 인격을 세우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세상 문화에서 자꾸 자신을 이탈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이나 고행, 청빈만을 강조해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청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보다는 교회가 역사 속에서 살려주고 돌봐주는 사명에 치중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참 제자도 없다
옥한흠: 지금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조금은 혼란스런 시각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가 우리 목회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성자형입니다. 그래서 청빈할수록, 어떤 면에서는 무소유를 주장할수록 거룩하게 보고, 정말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훈련을 하면서도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점입니다. 제자훈련생들이 볼 때 `목회자들이 너무 고급이다`라는 시각으로 우리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이 제자훈련할 때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 도와야 한다고 가르치니까 그게 마음의 감동이 안 되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을 거지 옷을 입었다고 성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움막에 산다고 해서 낮은 데서 산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문화 환경에 맞게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내가 죽고 에수님이 사는 제자도의 삶을 보여주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중표: 저도 동일하게 하고 있는 고민입니다. 며칠 전 꿈에 신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장로 예정자들과 자기비움에 대한 대화를 하고 자는데, `이중표 목사 거지(巨智)`라는 글귀를 보았습니다. 한자로 보면 크게 깨달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인데 한글로 읽으면 `거지`입니다. 거지에는 `불행한 거지`가 있고 `자원적 거지`가 있는데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원적 거지`였습니다. "너는 거지가 될 수 있느냐?" 이것이 주님이 제게 주시는 끊임없는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옥한흠: 제자훈련을 하면서 진정한 목사의 위상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항상 저를 따라다니는 고민이었습니다. "주님께 위탁하고 나는 죽고 주님이 산다"는 사실을 신앙적으로 고백하지만 성도들이 저를 볼 때 과연 그런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굉장한 고민입니다. 교리나 구호로 끝나는 것이라면 말로만 해서 잘못될 것은 없지만 그것은 구호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말 내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가, 그리고 그런 말을 해도 위선이 되지 않는 자리에 있는가 하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중표: 고민을 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것입니다. 그런 고민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고민을 한다는 것은 목회자로서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기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훈련을 한다고 해서 다 그와 같은 의식을 갖는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진정한 제자가 안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제자가 생겼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는 그저 따라다니는 무리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비로소 제자가 되었습니다. 훈련으로는 어느 모형을 이룰 수는 있지만 스승이 먼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는 참 제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제자훈련의 가장 큰 고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십자가 사건으로만 제자의 재생산 가능
옥한흠: 대단히 중요한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별세신학은 저의 제자도를 한 단계 끌어올려준 중요한 발견이고 외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와 동일하게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구호가 아니라 진짜 죽고 사는 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중표: 제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훈련으로 되는 제자고 다른 하나는 인격으로 되는 제자입니다. 훈련으로 만들어진 제자는 훈련을 통해 또 다른 제자를 재생산하는 것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인물은 될 수 없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인물은 십자가의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나오는 제자입니다. 인격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진정한 제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비록 무식하지만 스승으로 남는 부모가 있는 반면 단순히 부모로 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가 인격을 남겨줄 때, 삶의 방법을 알려줄 때 스승으로 남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지속적인 재생산이 가능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역사의 구심점에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 되기까지는 십자가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십자가 사건이 없이는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제자의 재생산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재생산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그들 또한 순교에 이르기까지 헌신함으로써 역사를 살려왔다는 사실입니다. 제자훈련 지도자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버리고, 살고, 살리는 자아
옥한흠: 우리 모두는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볼 때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적으로나 고백적으로는 죽었는데 실제 목회자의 살메 있어서 죽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토론이 필요할 것입니다. 잘못하면 이상론으로 치우쳐 잘못된 길로 갈 수 있고, 도덕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가난한 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으로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갈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의 문화 속에서 고민하고, 오늘의 문화가 갖고 있는 비신앙적 특성 때문에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는 교인들 앞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지도자의 죽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것이 제자훈련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고 전달되어야 하는가?"는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기도하면서 성경을 통해 해답을 발견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중표: 저는 그 문제를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버리는 자아, 둘째, 사는 자아, 셋째, 살리는 자아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도 바울 등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에 대한 3대 사건은 버리게 하고, 살게 하고, 역사를 살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버리고, 살고, 살리는 3단계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를 떠나게 하고, 자식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한 것은 바로 자신을 버리게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 함께 삶을 이루면서 복의 근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가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건이 일어나고, 자신을 통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살려내는 일이 일어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를 이루었을 때 자기 죽음에 대한 진정한 고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영광과 행복
옥한흠: 참 좋은 말씀입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는 목회자가 제자훈련에 목회의 생명을 걸 때 그와 같은 세 가지의 결과들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중표: 물론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목회자의 의식 전환입니다. 앞서 지적하신 대가지불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가지불을 이야기할 때 뭘 내려놓는다든지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등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보상을 생각한다면 버리는 일이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고, 그리스도의 행복을 얻고,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는 보람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후배들이 찾아와 "목사님, 어떻게 해야 목사님처럼 목회하면서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해서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본 받으려 하는가?"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처럼 큰 교회를 해야 사회사업도 하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더군요. 저는 지금까지 내 것을 가지고 구제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헌금을 가지고 도왔을 뿐입니다. 정말로 그 후배가 구제사업을 하겠다고 한다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자가 되고 순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들 역시 자기 옷을 벗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입혀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영광과 행복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행복 이상의 향락을 추구하면 그건 이미 타락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제자훈련은 목회의 본질
옥한흠: 제자훈련을 하려는 목회자는 많은데 참으로 제자훈련을 통해서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는 영력을 가진 지도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훈련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훈련에서 나타나는 능력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훈련(과정)은 잘하는데 능력이 없어서 훈련이 훈련으로 끝나버리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훈련이 하나의 붐을 타면서 그런 상황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기장측 교회 중에서 제자훈련을 받아들여서 가장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현장으로 한신교회를 꼽을 수 있는데 기장 교회뿐만 아니라 진보적 역사관·신학관에 젖어 있던 많은 분들이 복음적인 면에 눈을 뜨게 된 데도 목사님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 목사님의 사역을 지켜보는 후배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기장측에서도 제자훈련이나 복음에 대한 인식이 180도 가까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생각하실 때 한신교회 제자훈련이 얼마나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평가하시는지요.
이중표: 제가 일찍이 옥 목사님과 함께 제자훈련에 뛰어들었다면 제 목회 현장은 지금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을 것입니다. 제 목회를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제자훈련의 절대 필요성을 알았을 때 저는 이미 너무 많은 일에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개 교회에 전념하기에는 너무 높은 위치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5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제자훈련을 하지 않고서는 목회의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한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작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목회의 행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제자훈련은 분명 목회의 본질입니다. 한신교회가 제자훈련을 하는 데 있어서 저 자신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훈련을 하기에 저는 많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습니다.
옥한흠: 5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제자훈련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하셨다는 것만 해도 가히 혁명입니다. 그것도 목회적으로 실패한 상황이 아니라 성공한 입지에 있을 때 제자훈련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실천하셨다는 것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신교회가 얻은 제자훈련의 열매를 소개해주세요.
이중표: 열매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현황을 소개하자면 제자반은 부교역자들이 담당하고 저는 사도(사역)반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5년 동안 더 박차를 가해 제자훈련이 온전히 정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현재로서는 아직 사랑의교회와 같은 풍성한 열매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력한 제자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저는 강력한 훈련을 시킬 수 있는 리더형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약점(정이 많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제자훈련 이후 성도들이 동역자로서 함께 가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을 볼 때 별세신앙은 제자훈련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저는 절대적으로 제자훈련이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옥한흠: 한신교회에 제자훈련을 접목하실 때 어려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중표: 성도들에게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다만 저 자신의 어려움이 있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어려움이었다면 어려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옥한흠: 사도(사역)반은 몇 그룹이나 인도하고 계십니까?
이중표: 두 개 반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제자훈련은 지도자가 대외적인 활동(관계)에 대해 죽음을 선언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옥한흠: 그 점이 많은 목회자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의 경우 따돌림을 당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대외활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모임이 꼭 필요한 모임인 것은 분명 아닙니다. 결국 산만한 목회 문화를 극복하고 목회의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면 제자훈련에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제자훈련을 위해 죽는 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제댜로 된 제자훈련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 점에 대해 후배 목회자들에게 충고해주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이중표: 목회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순교자형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교회를 추구하는 성공지향형입니다. 전통적인 기존 교회를 추구하는 목회자는 제자훈련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교회에서 목회를 끝내겠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는 제자훈련을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훈련에 대해 만족하고, 훈련을 통해 행복감을 맛보고, 수많은 교회를 살려내는 일에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항상 세 가지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광, 행복, 창조` 이 세 가지 비전은 목회자가 자신에게서 찾아내야 하고, 교회에서 찾아내야 하며, 성도들에게 찾아주어야 하는 비전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소명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곁눈질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또 목회에서 최고의 행복은 제자 되고, 제자 삼고, 성도를 실리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를 충족할 때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창조됩니다. 고난 속에서 몸부림치는 절규라야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남을 수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그런 면에서 참 복 받은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옥한흠: 오늘 바쁜 가운데서 시간을 내주시고 귀한 말씀을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