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옥한흠 목사
이 글은 1999년 6월 14일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 제1회 전국 수련회에서
옥한흠 목사가 ‘바울의 낙관’(롬 11:1~6)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것을 재정리한 것이다.
외로운 십자가의 길을 걷는 한목협
우리가 처음 ‘한목협’을 시작할 때 이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갱신합시다’, ‘일치합시다’,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합시다’ 등 어느 말을 놓고 한국 교회를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해 옴을 누구나 다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저변에 그만큼 위기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갱신합시다’, ‘일치합시다’ 하는 이런 기치를 든 운동에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사적인 일을 포기하고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러한 열기가 쉽게 달아오를 수 있다면 그 환경에는 일치도 갱신도 필요 없습니다. 다 잘 되고 있는데 뭘 갱신하고 뭘 일치합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갱신하자고 해도 다들 콧방귀를 뀌고, 일치하자고 해도 정치적인 생각을 갖고 저울질하는 풍토이기 때문에, 이처럼 한목협의 시작은 외로운 길이요,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신문사 기자가 저를 인터뷰하면서 “목사님은 한국 교회 향후 10년을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전들 압니까? 모르죠. 어떻게 될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비관론이 제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대답하면서도 비관적인 색채를 깔고 있는 겁니다. ‘과연 한국 교회가 다시 건강한 교회로 거듭날 수 있을까? 어렵지 않겠는가?’
말씀과 생활이 불일치한 한국 교회
한국에 10년 이상 강해설교를 하기 위해 오시는 OMF의 선교사 데니스 레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참 위대한 인물이자 정말 탁월한 주의 종입니다. 그분이 한국 교회에 대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그는 “한국 교회는 지금 꼭 100년 전의 영국 교회와 흡사하다”고 했습니다. 100년 전만 해도 영국 교회가 부흥한다고 세계에 소문이 났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교회는 스스로 자만하고 만족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한 채 들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불과 10~20년만에 교회당이 텅텅 비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지 않습니까? 아마 지금 세계에서 가장 초라한 교회를 꼽으라면 영국 교회를 꼽을 것입니다. 너무나 높은 정상에 올라갔던 교회이기에 그 추락한 모습이 그만큼 추한 겁니다.
이처럼 데니스 레인은 자기 나라 교회를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꼭 영국 교회 같다고 말입니다. 그 말은 잘못하면 한국 교회도 영국 교회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강점은 기도와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점은 말씀과 생활이 전혀 일치되지 않는 이원론적인 모순된 삶이다.”
우리가 얼마나 기가 막힌 모순 속에서 삽니까? 우리가 모두 왜 기도합니까? 순종하려고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기도하는 목적이 따로 있어요. 그 기도 맨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주여’ 삼 창을 천 번 해도 순종이 따라가지 않는 기도는 다 염불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헌신이 뭡니까? 헌금 좀 바치는 것이 헌신이고 열심입니까? 교회 일에는 누구나 다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중생받지 못한 사람도 직분을 주면 죽을 듯이 충성합니다.
그것으로 건강한 교회라고 측량할 수 있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교회는 좀 적게 배워도,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조금 적게 해도 “주여”, “주여” 하고 요란을 떨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열정을 갖고 사회로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을 때, 그 교회가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교회에 헌신을 많이 하면 할수록, 광신자라는 욕이나 얻어먹고, 아니면 세상에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스트레스나 푸는 집단으로 오해를 받는 겁니다. 왜냐하면, 삶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영국 교회가 과거에 그랬는지 모릅니다. 사회로부터 교회가 따돌림을 받고 매력이 없어져 결국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부터 하나둘 떨어져 나갔습니다. 지금 보십시오. 한창 부흥할 때 지어놓은 교회당을 처리하지 못해서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팔아넘겨 교회당이 호텔 아니면 수련회장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이 와서 한국 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우리의 위기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한국 교회를 볼 때마다 마음에 은근히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비관적인 감정이 깔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바울의 낙관을 주목하라
그러다가 저는 로마서 11장을 주목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제1회 수련회를 열었습니다마는 몇 명이 모이는지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인 여러분들이 중요합니다. 우리 실무진들은 적어도 1,000명이 모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갱신과 일치와 책임’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놓고 뜨거운 가슴으로 거리가 멀든 짧든 간에 달려올 수 있는 사람 1,000명이 있다면 금방 다 되는 거죠. 한국 교회는 걱정 안 해도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로마서 11장을 보면서 반성하게 됐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종족 유대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복음을 핍박하며 바울을 못살게 굴면서 따라다니는 이들을 말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낙관적으로 본다” 그 말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도무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민족이지만 나는 낙관한다,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비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동족 구원을 놓고 비관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은혜요, 하나는 남은 자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장 5절을 잠깐 봅시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은혜’요, ‘남은 자’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을 생각하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게 바울이 은혜를 설명하는 핵심입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그다음에 말이 없어요. 그럼 무엇을 더 삽입해도 되는 말씀이냐 하면 “나 이스라엘인 중의 이스라엘인이요”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 씨에서 난 베냐민 지파 중에 독종 아닙니까? 그래서 얼마나 예수를 핍박했습니까?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을 증오했습니까? 얼마나 남보다 더 앞장서서 기독교를 박해했습니까? 그런 나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 나 같은 것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 민족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만큼 강하고 풍성하다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동족은 지금 예수를 믿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는다. 계속 멀리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 같은 놈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 있는 이상, 내 동족은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믿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믿는 이상 절대로 절망할 수도 없고, 비관할 수도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비관을 깨는 은혜의 파격성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비관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청소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 못할 악인은 없습니다. 은혜에는 놀라운 파격성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소지한 격이라는 것, 이 격을 깨뜨리는 파격성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격에 맞는다고 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 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아, 저런 조건이면’ 하는 나름의 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 격을 깨는 데에 굉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격에 맞는다고 하면 은혜는 오히려 약화됩니다. 우리가 보기에 격에 안 맞는다고 하는 곳에는 은혜가 왕 노릇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특징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스데반이 아닌, 사울을 이방의 사도로 택했을까요? 완전히 격을 깨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스데반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 스데반은 ‘NO’ 하시고,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을 이방을 위해서 불렀단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격을 깨는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 있기에 우리는 비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영국에서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여서 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전 세계로부터 모든 종교에 대해 박학다식한 학자들이 수십 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토론하는 주제 중 하나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독특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성육신의 교리도 나왔는데, ‘기독교에만 성육신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꼭 기독교의 독특한 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다른 종교에서도 죽었다 살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나온다. 그러기에 꼭 기독교만 부활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어떤 종교에 비슷한 내용이 있으면 전부 배제를 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전혀 없는 것, 오직 기독교만 가진 유일한 독특성이 무엇이냐 하고 한참 토론을 하는데, 이때 C. S. 루이스 박사가 그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요란하게 토론을 하고 있는 그 학자들에게 루이스 박사가 물었답니다. “도대체 무엇을 갖고 그렇게 토론을 하고 있느냐?”고 그러자, 그들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가장 독특한 것이 무엇인지를 토론한다고 하자, 루이스 박사가 주저하지 않고 “아, 그건 아주 쉬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루이스 박사의 말을 듣고, 학자들이 또 은혜를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장시간 토론한 결론이 뭐냐 하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독특한 것을 하나 찾아내라면, 그것은 은혜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는 피안에 이르기 위해서 8가지의 길을 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힌두교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슬람은 많은 계율을 가지고 선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거기에는 은혜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만 값없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기독교는 조건도 없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종교인 것입니다. 은혜는 기독교의 유일한 특징입니다. 칼 바르트가 수천 페이지의 교회론을 쓰고 난 후, 마지막을 한마디로 정의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교리를 종합해서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이상 우리는 비관하면 안 됩니다. 오늘도 저는 이 은혜만은 풍성하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부패하고 지도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 은혜는 지금도 왕 노릇 합니다. 넘치고 있습니다. 은혜의 문은 아직 닫히지 않고 있습니다. 활짝 열어놓고 계십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낙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히든카드, 남은 자 7천 명
또 하나 바울이 낙관한 이유는 남은 자 때문입니다. 7천 명! 하나님께서 아합 시대에 7천 명을 남겨놓았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밖에 남지 않았는데, 자신의 목숨도 풍전등화와 같다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염려하지 마라. 내가 7천 명을 남겨놓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하나밖에 안 남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엘리야의 계산보다 7천 배나 많은 자신의 종들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남은 자’라는 하나님의 히든카드를 깨달은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우리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히든카드를 갖고 계신다. 남은 자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교회가 영적으로 어려워지면, 걱정하는 사람들은 흔히 엘리야와 같이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무력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항상 히든카드를 갖고 계십니다. 7천 명이 있습니다. 남은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한 자들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21세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히든카드! 그 7천 명이 누구입니까? 저는 종종 30, 40대 후배 목사들을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히든카드로 사용하시려고 준비하실까? 아니면 저 교회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일까? 저는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에 대해 여러 위기의식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의 히든카드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7천 명이 있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7천 명이 누구입니까? 우리입니까? 한목협에 소속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입니까?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외에도 준비하시는 7천 명은 여기저기에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내일을 위해 분명히 준비하실 것입니다. 사울 시대와 같이 온천지가 암흑으로 덮여 있을 때, 다윗과 그의 시대를 조용히 준비하시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해 준비하시는 7천 명의 히든카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목협은 하나님께서 숨겨놓고 준비하시는 이 7천 명을 주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걸 믿으면 낙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낙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내일을 낙관할 수 있고, 21세기를 낙관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온 세상이 썩어지는 극한 상황에서도 비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히든카드, 남은 자가 있습니다. 한목협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남은 자 되기를 바라고, 한목협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온 세상을 향해서 쏟는 하나의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한국과 세계를 향해서 충만하게 쏟아지는 역사가 우리 한목협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