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2007년 10월

섬김의 리더십을 보기 힘든 이유

발행인칼럼 김명호 목사 _ 국제제자훈련원 대표

한 대학 총장이 오늘 우리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사회는 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기주의와 독선주의의 수렁에 깊이 빠져있다. 칭찬의 문화는 없고 비난의 문화만 있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렇게 암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받들어 모실만한 스승과 어른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사회를 가리켜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조금은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의 병폐를 제대로 꼬집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죽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일까? 그는 ‘섬김의 리더십’이 그 대안이라고 제시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한 리더십이 섬김이다. 그분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은인이라 칭함 받는 이 세상의 리더십과 구별되게 섬김의 리더십을 요구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섬기기 위해서라고 천명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 섬김이다.
  존 맥스웰 목사는 대야를 가지고 섬김의 리더십을 설명했다.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담긴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겼지만 빌라도는 똑같은 물을 가지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 사용했다. 예수님의 물은 남을 위한 일에 사용되었지만 빌라도는 자신을 위한 일에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의 대야는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반면 빌라도의 대야는 섬김을 받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의 핵심가치는 섬김이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섬김의 리더십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섬김의 리더십을 찾아보기 어려울까? 사도바울은 섬김의 리더십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설명한다(빌립보서 2:5~8). 섬김의 리더십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또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 때 가능하다. 섬김의 리더십은 자신의 소명과 아이덴티티가 분명할 때 가능하다. 섬김이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섬김의 리더십은 선택이다.
  자신에 대해서 불안한 사람은 섬김의 리더십을 선택할 수 없다. 자신의 지위와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섬기는 자리에 설 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을 조정하려고 애쓴다. 자신의 업적과 권위를 내세우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를 강요한다. 자신에게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없는 학력도 만들어내고 없는 이력도 허위로 만들어낸다.
  요즘 연일 보도되는 허위 학력 파문도 자신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현재 자신의 모습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원하는 콤플렉스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부르신 소명의 영광스러움이 무엇인지 분명한 확신이 없게 될 때, 목사보다는 박사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학위를 돈 주고 사는 일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은 외모를 중시하고 학력과 같은 겉치레를 높이 사는 경박함과 단순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서만은 이러한 것에서 초연한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
  오늘 한국 교회에 쏟아지는 세상의 비난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소명에 확신있는 지도자는 지위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수건을 들고 섬김의 자리에 설 수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새로운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불안한 지도자는 결코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빌라도의 대야와 예수님의 대야 중 어떤 대야를 가지고 있을까? 죽은 우리 사회와 교회를 다시 살리는 길은 예수님의 대야를 선택하고, 섬김의 리더십을 회복하는 것이다.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며, 그분의 은혜와 부르심 앞에서 만족할 수 있을 때 섬김의 리더십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