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김명호 목사 _ 국제제자훈련원 대표
목회자는 늘 교회의 변화를 꿈꾼다. 목회 현장과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모습 사이에 드러나는 큰 간격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지만 뭔가 아쉬운 구석이 있다. 때로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거나 낙심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믿음 속에 기쁨을 누리고 세상을 향해 거룩한 영향력을 발하는 그런 교회를 꿈꾸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섬겨온 교회를 돌아볼 때 과연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얼마나 건강하게 세워졌는지, 교회가 진정 소외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섬김과 봉사를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최근 수년 동안 제자훈련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하며 목회하던 선배 한 분을 만나서 목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은 제자훈련을 하면서 자신이 놓친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 제자훈련을 통해서 훈련생들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도 한다.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사역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힘이 없고 무기력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일까?
교회의 본질을 논할 때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들이 있다. 복음 선포를 의미하는 케리그마, 성도의 교제를 의미하는 코이노니아, 세상을 섬기는 봉사로서 디아코니아, 교육을 의미하는 디다케가 그것이다. 제자훈련은 코이노니아와 디다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소그룹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의 변화를 추구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자훈련이 제대로 되었는지 아닌지는 케리그마와 디아코니아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제자훈련이 교회의 리더십의 지위를 보장하는 하나의 과정이 되어 버린 곳이 있다. 교회를 성장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전락해버린 곳도 있다. 훈련의 초점이 교회 안에만 갇혀버린 제자훈련도 있다. 만약에 제자훈련을 했는데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든지, 이 땅에서 일하셨던 그리스도와 같이 고통 당하는 이들이 치유 받을 수 있도록 섬김과 봉사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 뭔가를 상실한 껍데기 제자훈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사람에게 말씀이 임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구체적인 섬김과 사역으로 열매 맺게 마련이다.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는 시간이 1시간이라면 섬김과 봉사하는 시간도 1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 섬김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주차안내를 하는 수준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약하고 소외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인 섬김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 릭 루소와 에릭 스완슨의 『교회 밖으로 나온 교회』, 데이비드 제러마이어의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스티브 쇼그린과 데이브 핑의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삶』을 추천한다.)
테레사 수녀는 키가 15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왜소한 여인이다. 그녀는 조금 늦은 나이에 선교회의 후원도 없이 콜카타옛 캘커타로 떠났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거리에서 죽어가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거지들을 손수 작은 호스피스에 옮겼다. 그녀가 호스피스로 옮긴 사람들은 3만 명이 넘는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첫 번째 사람을 옮기지 않았다면 3만 번째 사람도 옮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큰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큰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 큰 사랑으로 하는 작은 일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말씀 안에서의 깨달음과 함께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실천이 강조되는 제자훈련을 통해 새로운 에클레시아를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