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야기 김영현 목사
서영희 목사는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5년간 중등교사로 섬겼다. 총신 신대원 3학년 재학 중이던 2001년 한중사랑교회를 개척해서 11년간 섬기고 있다. 총신 신대원 여동문회장으로 섬기며, 법무부 지정 동포체류지원센터 대표와 서울출입국 사회 통합위원으로 사역하고 있다.
초대교회를 눈으로 보고 싶은가? 그러면 한중사랑교회를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100% 조선족 동포로만 구성된 교회이다. 800명의 성도가 초대 교회처럼 매주 모여 말씀을 배우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교제하고 기도에 힘쓰는 현장,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담대히 전도에 애쓰는 교회를 <디사이플>이 소개한다.
한중사랑교회가 위치한 곳은 서울 변두리 가리봉동이다. 전철역에서 내려 20분을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성도들은 대부분 두세 번의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교회에 모이고 있다. 멀리서는 강원도, 부산에서도 주일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다. 주일 아침이면 6시부터 봉사자들이 주일 준비로 북적거린다. 8시 30분부터 교구장 모임을 시작하고, 3시간가량 진행되는 주일예배를 드린 후 성도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 오후에는 각종 양육과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대부분 6시가 넘어야 아쉬움을 뒤로하고 저마다의 삶의 터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현대 교회로서는 가장 부적합한 위치와 시설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가 이토록 헌신된 성도들로 가득한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제자훈련 수료생이다
서영희 목사는 신혼 초 고부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시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고 세례까지 받았다. 그러나 전혀 믿음 없이 말 그대로 교회 마당만 밟고 오는 수준이었다.
울산의 시댁에서 서울로 올라와 정착할 무렵 둘째 아이가 뇌에 물이 차는 뇌수증을 진단받았고, 생후 100일 만에 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해도 정상인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엇인가 붙잡을 대상이 필요했다. 서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너무 겁이 나서 ‘아이만 무사하게 해주시면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아들을 목사로 만들겠다’라고 기도를 했어요.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머리에 호스를 꽂아 물을 빼내는 장치를 하고 10년마다 호스를 갈아주는 수술을 해야 했지요. 그래서 연약한 아이를 돌보느라, 교회를 가야 한다는 것을 잊고 한동안 지냈습니다.”
2년 동안 매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서 목사는 노이로제와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좋은 교회를 찾아 헤맸고, 서울대광교회(김명섭 목사)와 연결이 되었다. 당시 김명섭 목사는 1987년 3기 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를 수료하고 한 해 동안 제자훈련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서영희 목사는 1기 제자훈련을 신청했고, 함께한 7명의 제자훈련생들과 함께 열심히 제자훈련을 받았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서 목사의 말이다.
“제자훈련을 시작하고 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이 뜨였습니다. 그냥 설교와 달리,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진리를 확인하는 훈련 과정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성도의 자세,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청지기 정신,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대해 배우면서 신앙생활이 반듯하게 그려졌어요. 그리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시작하고 인생을 바쳐서 할 만한 것이 없는지 고민하던 차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 받은 자가 무엇을 하기 원하실까’를 고민할 때, 전도와 말씀 공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남편 이상부 장로의 말을 들어보자.
“당시 서 집사는 제자훈련을 마치고 전도대에 들어갔습니다. 낯가림도 심해서 낯선 사람들에게 말 거는 것을 참 힘들어했었지요.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면 된다고 하니 하루 3시간씩 기도를 하더군요. 영혼에 대한 열정이 생기면서 제가 출근할 때 같이 나가서 퇴근할 때쯤 들어오는데, 수백 명의 이름이 적힌 노트를 들고 다니며 한 사람을 50~60번 만나면서까지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해는 180명을 전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대광교회 전도왕이었습니다.”
당시 서 목사는 자신이 전도한 사람을 직접 양육시키고 분가하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1988년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훈련을 하면서 성경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이 너무 좋아 신학대학원을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그때 담임목사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만류했다. 은혜 받은 초기의 현상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록 말씀 연구에 대한 그 열정이 식지 않았다. 그래서 집중기도에 들어갔고, 마태복음 4장 19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받고 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 후 전도대장 자리를 내려놓고, 두 달 반 동안 독서실에서 공부에 매진하여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 합격하게 되었다.
한 영혼으로 만족합니다
신대원에 진학하면서 서영희 목사 부부는 주말부부가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인 두 아들과 남편을 집에 남기고, 양지에 위치한 총신 신대원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인의 추천으로 숙식이 가능한 가사도우미를 구했는데, 중국에서 30년 동안 공산당이었고, 17년 동안 초등학교 교장선생을 했던 손정숙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서 목사는 사람만 보면 전도를 하던 때였기에 주말이면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서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진짜 공산당은 대단합니다. 공산당은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4년마다 재임용하는 교장 직분을 17년 동안 가졌다는 것은 실력과 상당한 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점점 변화되어 갔습니다. 불법체류자여서 항상 불안한 심리 상태였는데 안정을 찾았고, 친척 두 사람까지 더 데리고 와서 함께 성경공부를 했어요.”
주일에는 당시 서 목사가 다니던 교회로 출석했다. 그런데 조선족 동포들은 기성 교회에 적응하는 것을 상당히 힘들어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모르고 한국 사회에서 힘든 생활만 반복하고 있는 다른 동포들이 생각이 난 것이다. 그래서 서 목사를 설득하여 4명의 조선족 동포들과 가리동봉의 한 가정집에서 시작한 것이 한중사랑교회이다.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작정을 하고 기도를 하는데 이사야 6장 8절 말씀이 생각나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하고 싶은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서 사역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2001년 2월 추운 겨울 한중사랑교회는 예배를 시작했다. 구역예배를 드리듯이 각 가정을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 한 방에 온 가족이 모여 사는데 어떤 집은 장모와 사위, 그리고 아이들까지 한 방에서 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오전 10시에 예배를 드리러 찾아가면 피곤에 지쳐서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깨워서 예배를 드리고 함께 식사교제를 하면서 복음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쉽지 않은 교회 개척의 시기를 서 목사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개척 초기에 선천적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던 박련옥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희망없는 팍팍한 삶을 비관하며 딸과 함께 죽으려고 했던 분이었죠. 그런데 그 쪽방에서 모이던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너무나도 좋아했습니다. 환경은 참 어려웠지만, 그분의 변화를 보면서 저 한 사람만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척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보내주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시작하는 일이다. 한 영혼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서 목사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얼마나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인지 잘 보여준다. 한 영혼을 향한 서 목사의 깊은 사랑과 조선족 동포들의 상황에 맞는 설교와 양육은 그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방에서 모이는 그 예배를 사모하면서 일주일을 살아간다고 말하는 동포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렇게 1년 만에 50명이 모이게 되었다. 더 이상 가정집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2002년 7월 남편 이상부 장로의 헌신으로 오피스텔 3칸을 구입하여 예배 공간을 마련했다.
복지보다 복음이다
전과 비교해서 교회는 넓어졌지만, 여전히 교회는 시설과 혜택으로 조선족의 관심을 끌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조선족 동포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다른 교회들에 비해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미미했기 때문이다.
검증은 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당시 조선족 사역을 하는 한 큰 교회에서 발급하는 카드를 소지하고 있으면 불법체류 단속에 걸려도 경찰이 풀어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일지라도 10년 전 대부분의 조선족들이 불법체류를 하던 시절, 그런 교회가 가진 외적 혜택들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매력이 있는 교회가 아닌, 한중사랑교회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좋은 복지 조건보다는 복음 자체가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저는 연길에서 99년도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06년 한국으로 나와서 한 조선족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도부터는 한중사랑교회를 다녔지요. 그동안 제가 접했던 두 교회와 한중사랑교회는 너무나 다릅니다. 중국 교회에서는 양육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도 양육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건물과 복지 상태는 한중사랑교회보다 월등히 좋았지만 우리 영혼을 채우는 말씀은 없고, 늘 선교 보고와 행사 이야기만 있었습니다.”(황금선 집사)
“다른 교회와 한중사랑교회와의 차이는 너무나 많습니다. 다른 교회는 우선 새신자들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없었습니다. 건물은 훨씬 새 것이고 크지만 그저 하룻밤 재워주고 예배드리는 것이 다였습니다. 한중사랑교회에 온 첫날 계단을 올라갈 때 표어가 보이는데, ‘한 사람의 새신자가 한 사람의 선교사로 양육되고 파송되는 교회’라고 쓰여져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표어인가 보다’라고 단순히 생각했지만, 첫 주부터 정말 사랑이 넘치는 것을 느꼈고, 몇 주 다녀보니 이 정도로 성경공부 하면 정말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에 이렇게 말씀훈련하는 교회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한순금 집사)
많은 사역자들이 속기 쉬운 부분이 외적으로 시설이 갖추어지고, 기본적으로 편의시설이 있어야 교회에 사람들이 온다는 생각이다. 동포들이기에 불편한 시설도 감안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들이 한중사랑교회보다 더 편리한 시설을 갖추어 놓고서도 영혼의 대한 소중함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말씀 중심의 양육과 훈련 체계가 없이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한중사랑교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상황에 맞는 눈높이 제자훈련을 하라
서영희 목사는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중학교에서 5년간 교편을 잡은 경험이 있다. 그리고 전도현장에서 수많은 불신자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전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회중들에게 설교를 하고, 소그룹에서 훈련을 할 때에도 동포들의 눈높이에 맞는 언어와 표현을 한다.
한중사랑교회 같은 조건에서 제자훈련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몇 가지 어려움은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벽이다. 우선은 시간의 장벽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한중사랑 교인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육체노동으로 피곤에 지쳐 있고, 주일에도 돈을 벌기 위해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사 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비가 와야 교회에 나올 수 있을 정도이다.
두 번째 장벽은 학력과 신앙지식의 차이다. 상당수의 동포들은 중국에서 대학교수, 의사, 교사 등의 직업을 가졌던 지식인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신앙지식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전도사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성이 ‘전’씨고 이름이 ‘도사’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성경을 읽으면 사람 이름인지 나라 이름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입학금이 얼마예요?”라고 묻는 사람들이었다.
또 하나의 장벽이 있다면, 언제 단속에 걸려 출국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한중사랑교회를 다니던 많은 성도들이 실제로 단속에 걸려서 강제 출국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훈련생을 모집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우선 모집 자체가 모험이었던 것이다. 서 목사의 말이다.
“어떻게 하면 제자훈련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도록 할까 고민을 하다가 졸업식을 해준다고 광고를 했어요.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혀준다고 말이죠. 이들 중에는 중학교조차 제대로 못 나온 분들도 계셨는데 그러한 내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죠. 수료증이라는 것도 이들은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이들 가운데 기본적인 양육이 된 8명을 모아서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토요일에 시도를 했지만, 아무도 토요일에 나올 수 없었다. 지금은 토요일에 양육반을 개설하여 운영을 하지만, 결석을 하면 수료를 하지 못하는 제자반의 경우에는 주일 오후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지역도 다양해서 두세 번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서울이면 가까운 곳이고, 강원도와 경상도에서도 오기 때문에 다른 요일은 전혀 불가능했다. 지금은 충분한 양육 과정을 통해서 훈련에 들어오지만 처음에는 말 그대로 대화식 훈련이요 눈높이 교육이었다. 서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옥한흠 목사님의 교재를 사용해서 훈련을 진행했지만, 사실 우리 동포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재의 흐름과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교재의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때로는 즉석에서 동포들의 상황에 맞게 문제를 바꾸기도 했어요.”
서 목사의 열심도 대단하지만 동포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식당일로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면서도 모든 과제를 다 소화해 왔다. 상황이 어려워 독서과제는 못 줄 때가 많았지만, 기도와 큐티, 특히 성경 읽기와 암송은 철저하게 시켰다.
어떤 동포는 가사도우미를 했는데, 쌍둥이인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잠을 자다 깼고, 혹시나 둘 다 잘 경우에도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손바닥에 암송구절을 적어 틈틈이, 심지어 샤워할 때도 암송을 했다. 이렇듯 동포들은 모두 열심히 훈련에 참여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제자반이 8기까지 진행되어 수료생이 232명이고, 올해 9기는 6개반으로 나눠져서 부교역자의 인도로 103명이 훈련 받고 있다. 또 사역반은 5기까지 진행되어 수료생이 99명이고, 올해는 56명이 서영희 목사와 훈련하고 있다.
유물론에서 복음으로
그렇게 한중사랑교회의 핵심 사역이 된 제자훈련의 열매는 어떠할까? 그 변화를 서영희 목사에게 물어보았다.
“우선 유물론에서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포들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유물사관을 배우고 살아왔기 때문에 물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에 온 이유도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기 위해서지요. 공산주의 세계관과 하나님의 진리가 부딪쳐서 진리가 이기는 현장이 저희 교회 제자훈련 현장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었다. 훈련받은 교인이 교회 주변의 담배꽁초를 줍고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입국한 지 얼마 안 된 동포가 “돈도 안 주는데 왜 그런 일 하나? 그러면 사람들이 바보라고 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일반 동포들의 눈에는 이상한 별종의 사람들로 비치게 된 것이다.
그들의 물질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주일 성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원래 주일에 교회를 오기 위해 쓰는 차비 천 원이 아까워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고, 남편이 암에 걸려도 돈이 아까워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는 것은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 하던 사람들도 훈련을 받으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헌금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3기 제자반과 1기 사역반을 수료하고 교구장으로 섬기고 있는 황미옥 집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는 12년 전 남편과 15살 난 아들을 남겨두고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주말마다 등산을 갔습니다.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어서였죠. 때로는 정처도, 목적도 없이 7시간을 걸어다니며 서울 거리를 방황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중사랑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훈련을 받고 나서는 제가 완전히 변했어요. 돈보다 중요한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중국에 있는 남편과 친정 식구들을 모두 전도했답니다.”
황 집사는 지금도 자신을 위해서는 엄청난 깍쟁이이다. 30분 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다닌다. 그러나 교회 일에는 아끼지 않는다. 주6일 동안 일을 하면 20~30만 원을 더 벌 수 있지만, 토요일 양육과 사역을 위해서 주5일만 일을 하면서 140만 원을 받는다. 그리고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하고, 교구가족들을 전화심방하는 데 보통 10만 원, 많게는 19만 원까지 사용한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 매달 일정한 금액을 송금한다.
이는 돈을 벌기 위해서 한국행을 결심한 동포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중사랑교회에서는 황 집사뿐만 아니라 훈련받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사실 한중사랑교회는 설립한 지 11년이 되었고, 현재 등록교인이 일만 명에 달하고, 매주 출석인원이 800명이 넘지만,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은 하지 못했다. 오피스텔 2층의 3칸을 예배실로 사용하는데 300명 정도가 수용 가능하다. 1층의 일부를 사용하고 25개의 오피스텔 방을 구해서 주중에는 숙소로 사용하고 주일에는 예배실로 사용한다. 그렇게 수용 가능한 인원이 총 800명이다. 25개의 오피스텔은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적응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된다.
한 달에 8만원이면 숙소와 함께 하루 3끼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것을 한중사랑교회에서는 ‘사랑의 집 쉼터 사역’이라고 부른다. 인건비와 교회 운영비를 합쳐서 1년에 10억 원 정도 비용이 발생하는데, 자체적 헌금으로 60% 이상을 감당하고, 나머지 부족분은 이상부 장로가 대부분을 감당해 왔다.
서 목사는 동포들이 믿음 위에 확고하게 서기 전에 헌금 부담을 느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헌금을 강조하지 않았지만, 이제 교인들에게 자립을 가르칠 때라고 판단하고 성경적 경제관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십일조를 드리는 교인이 120명에 이른다. 동포들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놀라운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인격의 변화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조선족 동포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관계중심적인 한국 문화’라고 할 것이다. 지속적인 대인관계를 위해 면전에서 싫다는 말을 못하는 게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정서라면, 동포들은 단번에 관계를 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매사에 부딪히는 편이다. 교회 창립 초창기에 제직회 모임 때면 몹시 시끄러웠다고 한다. 또한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바라보기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나 배려보다 비판하고 욕하는 일에 우선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중사랑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이러한 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4기 제자반과 2기 사역반을 수료한 황금선 집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에는 한 번 마음이 상하면 두 번 다시 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받으면서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원래는 한순간에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역사하시니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는 이것이 제일 이상합니다. 성령님께서 제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황금선 집사에게 요즘 기도제목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주인집 아들의 대입 시험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다. 지금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집은 서울 명문대 교수 부부인데, 친정어머니가 교회에 열심인데도 최고 명문대 교수인 딸이 어머니가 믿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집 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다.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밝히면 주인집에서 싫어하기 때문에 말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동포들이 많이 하는 일은 식당일과 간병인, 그리고 가사도우미 등인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을 구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월4회 주일을 쉴 수 있는 일자리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은 보수여도 주일을 지킬 수 있다면 감사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직장을 위해서, 그 가족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하는 사람들이 한중사랑교회 제자훈련 수료자들의 모습이다. 때로는 인신을 모독하는 말을 들어가며 일해야 할 때가 있다. 그래도 성경의 가르침대로 주께 하듯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제자훈련의 힘이다.
민들레 홀씨 되어
개척 초기에 복음을 영접하고 서영희 목사에게 사역의 기쁨을 맛보게 했던 박련옥 집사의 이야기를 조금 더 소개하고자 한다. 서 목사는 박 집사 한 사람만 있어도 목회할 맛이 났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이던 박 집사가 단속에 걸려 중국으로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당시를 회상하는 서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보통 일주일이면 출국되는데 박 집사는 감옥에 한 달이나 구금되어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귀가 어두워서 비행기표를 빨리 구하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거예요. 당시에는 저도 불법체류 등 관련 법률을 잘 모르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그 한 달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매일 기도를 하며 중국에 돌아가면 교회를 시작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물어보니 ‘전도사님(당시 서 목사는 전도사였다)이 하는 것을 보니까 한 사람만 있어도 교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라는 것입니다.”
당시 박 집사는 한중사랑교회에서 양육을 1년간 받고 제자훈련 수료를 한 달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 있으면 온전한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침내 그는 흑룡강 성 해림 시에 교회를 개척했고, 한중사랑교회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한중사랑교회에서 훈련받은 수많은 동포들이 중국으로 돌아간 후 지금 어느 곳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는지 한중사랑교회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갑자기 한국을 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아 연락할 방법이 묘연하기 때문이다.
한중사랑교회의 영구표어는 ‘한 사람의 새신자가 한 사람의 선교사로 양육되고 파송되는 교회’이다. 그동안 230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제대로 중국에 파송되지는 못했다. 한국 법률에 의해 불법체류자로 단속이 되어 강제 출국을 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훈련이 중단되고 이별을 해야 하지만, 서 목사는 낙망하지 않는다. 그동안 배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또 하나의 복음의 씨앗이 중국 땅에 뿌려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양육과 훈련에 집중한다. 어느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서 목사를 굳건한 제자훈련 목회자로 세우는 계기가 있었다.
한중사랑교회가 운영하는 ‘사랑의 집’에는 평균 120명의 동포들이 머문다. 그들은 대부분 한국에 입국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다. 저렴한 가격에 숙소와 식사를 제공받고 보통 6개월을 머물면서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한중사랑교회의 모든 교역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관리하며 일대일 성경공부를 시도한다. 이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집에 머물지는 않지만 교회를 출석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중사랑교회의 모든 양육과정은 제자훈련이나 다름없다. 사실 많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교회의 일꾼을 양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운영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하지만 제자훈련의 핵심은 부름 받은 평신도가 훈련된 후 세상으로 파송되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에 있다. 한중사랑교회는 제자훈련의 핵심을 가장 잘 실천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한중사랑교회는 주일 아침 8시 30분, 94명의 교구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교구장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주일 예배 후 각 교구로 가서 소그룹을 인도한다. 그리고 집사 직분을 받은 성도가 한 달에 한 번 이상 결석하면 직분을 내려놓고 그 해는 집사 직분을 다시 가질 수가 없다.
교구장들은 모든 교구를 출석부 원칙에 의거하여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왜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하고 양육을 하는 것일까? 이상부 장로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자.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가혹하지요. 그런데 목사님 생각은 이렇게 훈련하지 않으면 중국에 가서 신앙생활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면 사탄의 세력이 많을 뿐더러 주위 사람들은 교회 다닌다고 비아냥거리고 못난 사람 취급을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돈과 주일성수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안 되면 중국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역 대상인 동포들은 언젠가는 중국에 가서 살 사람들이니까요.”
故 옥한흠 목사는 선교단체의 전유물이었던 제자훈련을 사랑의교회에 접목하고 건강하게 성장시켰다. 제자훈련 목회의 철학과 실제를 알고 싶어 하던 목회자들에게 CAL세미나를 통해 이것을 소개했고, 지금까지 20,000명이 넘는 수료자를 배출했다.
국제제자훈련원에서 파악하지 못한 제자훈련 교회가 국내외 여러 곳에 퍼져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바람은 그렇게 제자훈련 철학을 날려 보내는 것이다.
한중사랑교회에서 날아간 복음의 씨앗은 중국에만 뿌려지지 않는다. 북한 땅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복음적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꼭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 동포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서영희 목사의 생각이다.
“동포들이 저에게 한국 사람들은 아직 통일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직 조선족조차 끌어안을 수 없는 한국 사회가 북한 동포들을 끌어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지적에 백퍼센트 동의합니다. 중국 동포들은 북한과 자유왕래가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중국 동포들이 지금 중국사회를 바꾸고 있는데, 앞으로는 북한까지 바꿀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접시꽃 목사와 민들레 성도
한중사랑교회와 서영희 목사의 활동은 2008년 한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한중사랑교회 교구장이 불법체류자로 잡혀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이 교회 건물에 있는 ‘사랑의 집’에 와서 불법체류자를 체포해 가는 일도 있었다.
그 후 경찰과 법무부 출입국에 가서 한중사랑교회 현황을 설명하면서 수많은 중국동포들이 한중사랑교회 사랑의 집에 묵고 있고, 해마다 4억 원 이상의 교회운영비를 목회자 남편이 개인적으로 감당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었다.
서 목사의 사연에 감동한 법무부 출입국 직원이 ‘이름 없이 사랑으로 헌신하는 접시꽃 목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만들어 언론에 배포하는 바람에 MBC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소개되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서 목사는 법무부 지정 동포체류센터 대표와 서울출입국사무소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법무부에서는 한중사랑교회에서 중국동포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것을 보고, 한중사랑교회 자체를 법무부 지정 동포체류지원센터로 정하고 법이 바뀌면 바로바로 통보해 준다.
접시꽃 목사라는 별명은 교인들이 지은 것이 아니고, 한 공무원이 감동받아 지어준 별명인 것이다. 세상에 알리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역자와 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높이신 것이다.
그 공무원은 도종환의 시 <접시꽃 당신>을 떠올리고, 자신의 삶의 무게와 함께 다른 이의 삶의 무게를 깨달은 시인의 마음을 서 목사의 아낌없이 주는 행위에 대입했을 것이다. 서 목사는 한중사랑교회 성도들을 향해 민들레 꽃 같다고 표현했다. 직접 그 의미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비록 힘없이 연약하더라도 오히려 그 연약함으로 인해 멀리까지 날아가 또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을 의미하리라.
취재를 위해 평신도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모든 평신도들이 교회에서는 인터뷰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시간을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몇 분의 집사님들께 연락하여 그들이 일하고 있는 강남의 고층 아파트로 찾아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렸던 투박한 조선족 특유의 엑센트는 사실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취재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동안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분투하는 그들의 삶의 태도가 눈물나게 했다.
초대 교회 당시 복음이 거대한 국가 로마를 점령하게 된 것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말씀 보며, 흩어지면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일하면서 서서히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민들레 꽃씨처럼 말이다. 노예로 봉사하며 주인의 가정을 변화시킨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있는 것이다. 이번호 <디사이플>이 찾은 현장은 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다. 초대 교회 제자훈련 현장을 보고 싶은가? 그러면 한중사랑교회로 가보기를 바란다.
<김영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