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야기 이경수 목사
왕재권 목사는 안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Th.M.)을 전공했다.
이후 여수영광교회 담임목사로서 지금까지 섬기고 있다.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가지고 평신도 훈련 사역을 하다 보면 훈련할 성도가 더 이상 없거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교회가 훈련을 지속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들이 있다. 왕재권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여수영광교회는 이러한 면에 있어서 커다란 도전을 준다. 왕 목사는 부임 후 80명의 성도들과 함께 어려운 목회 여건 속에서도 환경을 탓하지 않고, 목회철학을 붙들며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위임받은 이듬해 바로 1기 제자반을 시작한 왕 목사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현재까지 21기 제자반을 수료시켰다. 왕 목사는 성도들에게 한없이 온유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대쪽같이 강직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고, 그 결과 사람을 세우는 제자훈련 사역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왕재권 목사가 사역한 지 14년이 지난 지금, 부임 당시 인원의 10배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여수영광교회의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목회 철학의 부재로 방황하다
1998년부터 14년째 여수영광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왕재권 목사. 그는 할아버지 쪽으로는 3대째, 할머니 쪽으로는 4대째 신앙을 가진 믿음의 가문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에는 목사, 장로 등 쟁쟁한 사역자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그런 배경 때문인지 정작 왕 목사는 목사가 되기 싫어서 원불교 계통의 고등학교에 진학해 이과계열을 선택했다.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로 도망치고자 했지만, 결국 그는 대신대학교에 입학해 신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왕 목사는 목사 안수를 빨리 받고자 하는 여느 신학생들과 달리, 목사 안수를 받지 않으려고 자그마치 12년 동안을 신학생의 신분으로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왕 목사의 이런 방황 아닌 방황은, 사실 기성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되었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갈등 관계들을 오랫동안 봐오면서, 굳이 그런 목회자의 대열에 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 유학 시절 나성엘림장로교회에서 사역할 때,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교회와 당시 오정현 목사가 담임했던 남가주사랑의교회를 경험한 이후 목회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왕 목사는 그 길로 사역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사역자의 신분을 버렸다. 그리고 남가주사랑의교회로 옮겨 새들백교회와 남가주사랑의교회의 사역을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97년에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열린 제33기 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이하 CAL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옥한흠 목사의 광인론을 만나게 되었다.
목회와 목회자에 대해 여러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왕 목사는 자신과 같은 고민을 가지고 씨름했던 옥한흠 목사로부터 제자훈련 목회철학에 대한 도전과 위로를 받았다.
“CAL세미나 때 옥한흠 목사님께서 강의를 하시는데, 본인도 자라오면서 한국 교회의 부조리한 모습들과 목회자와 교인들의 갈등을 많이 봐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을 듣는데 저에게 참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 마음속에 ‘이제 나도 좋은 목사가 되어야겠다’라는 작은 바람을 갖게 된 것이죠.”
왕 목사는 남가주사랑의교회에 머물면서 목회에 대한 눈을 떴고, CAL세미나를 통해서 앞으로 평생 붙잡고 나아갈 목회 철학을 세웠으며, 사람을 세우는 목회를 꿈꾸게 되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뒤로하고 도망쳤지만, 니느웨 앞에서 박넝쿨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왕 목사는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미국 유학 시절에 자신이 평생 붙잡게 될 목회 비전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 들어갈 때만 해도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죠. 안다고 말했지만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남가주사랑의교회와 새들백교회, 그리고 CAL세미나를 통해서 목회 철학을 세우고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목회에 대해 나름의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부임 초기, 목회 철학을 붙들다
여수영광교회는 왕재권 목사의 부친인 왕덕원 목사가 1982년에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개척한 교회다.
그런데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시공업체가 부도를 내고 도망가는 일이 벌어졌고, 교회가 자체적으로 건축을 감당하다 보니 부채도 늘어나고 부실도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왕덕원 목사의 건강도 좋지 않아졌다. 몇 번이나 쓰러지는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이 교회를 섬기는 데 온 힘을 쏟았지만, 교회가 성장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여건이었다.
1991년에 헌당을 할 때 교인 수는 50명. 이제 이런 상황에 놓인 여수영광교회를 감당해야 할 사람은 왕재권 목사뿐이었다. 점점 아버지의 건강은 악화되어갔고, 교회의 상황도 열악해져갔다. 왕재권 목사는 이러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1998년, 여수영광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미시간에 있는 칼빈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Th.M.) 학위를 마치자마자 귀국해 그 해 11월 위임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교인 수는 80명, 지금의 교회 상황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한 여건이었다.
“교회가 개척된 이후 제가 부임할 때 보니 교인수가 80명이었습니다. 예배 때가 되면 그 커다란 예배당에 40명은 성가대석에 앉아 있고, 나머지 40명은 회중석에 앉아 있는 것이죠. 얼마나 예배 분위기가 어색하겠습니까? 그러니 새로운 교인들이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 교회 문제 있는 거 아닌가?’ 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결국 새신자들이 정착을 못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도 새벽예배를 마치고 아내와 손을 잡고 동네를 다니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찬양을 부르며 기도했죠.”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온 왕 목사는 아버지가 개척했던 목양지를 이어받아 힘겨운 씨름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왕 목사는 그런 상황들을 어떻게 버텼을까? 그리고 어떻게 지금의 여수영광교회를 일궈냈을까? 그것은 바로 그의 외유내강 인격에 바탕을 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분명한 목회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회원들과 성도들의 의견을 경청
교회에 부임한 이후 왕 목사는 성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 교회에는 세 명의 장로가 있었는데, 왕 목사는 장로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득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분들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들이 있는데, 그 기득권을 제가 빼앗으려고 하면 시작부터 삐거덕하잖아요. 저는 가급적 목회를 하면서 부딪침 없이, 갈등 없이 하기 위해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들에게 교회 재정권을 모두 넘겨드렸습니다. 저조차도 재정이 필요할 때면 청구인으로서 영수증을 제출하고 청구합니다. 그리고 재정이 지출될 때에도 담임목사의 결제 없이 지출하게 했습니다. 성도들은 제가 목회에만 힘써주기를 바랐기에, 행정적인 부분들까지도 당회원들에게 다 넘겨드렸죠. 봉사직에 임명하는 임명권도 내줬습니다.”
당회는 모일 때마다 담임목사가 주도하지 않으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의사결정이 원만하게 진행된다.
현재 주일학교 부장을 맡아 섬기고 있는 민복기 장로는 6년 전 여수영광교회에 등록해 제자훈련을 받고 장로로 임직을 받았다. 민 장로는 이전 교회에서 지나치게 주도적인 스타일의 담임목사와 성도들이 여러 문제로 갈등 관계에 놓이는 상황을 보며 적잖게 상처를 받았다.
그 후 민 장로는 본인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 교회를 옮겨 신앙생활을 하고자 이곳저곳을 찾던 중, 여수영광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장로로 임직을 받아 당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민 장로는 여수영광교회가 건강한 신앙 공동체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담임목사님께서 먼저 기득권을 내려놓으셨어요. 교회 재정에 있어서 일체 간섭을 하지 않으셨죠. 모든 것이 당회가 중심이 되고, 교회 운영에 있어서도 성도들에게 책임감을 심어줘 아무런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님도 당회에서는 당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제시할 뿐, 당회가 심사숙고한 내용들에 대해서 좌지우지하지 않으시죠.”
왕 목사는 부임 초기에 교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바라는 부분, 목회자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들도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다.
“교인들은 목사가 교회를 비우는 것을 싫어하더라구요. 그래서 교회를 비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예배를 인도해 주기를 원해서 새벽예배도 제가 인도합니다. 그래서 단기 선교를 빼고 지금까지 14년 동안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았죠. 또 한 가지는 목회자가 무슨 세미나를 다녀올 때마다 꼭 교회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바꾸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세미나에 안 가고 안 바꾸겠다고 말이죠.”
한번은 예배당에 드럼이나 전자악기를 들여놓는 일에 있어서 교인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왕 목사는 새들백교회나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봐왔던 예배 분위기를 생각하며 악기를 들여놓으려고 했고, 대부분의 교인들도 원했다. 그러나 이 일을 원하지 않는 성도도 있었는데,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정치 헌법의 예배모범을 언급하며, 예배 중에는 복음성가를 부르거나 악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반대를 한 것이었다.
“아흔아홉 사람이 원해도 그 한 분이 원하지 않았고, 그분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원칙이고 명분이었기에 그것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죠. 그렇게 8년의 시간이 걸려서 우리 교회도 6년 전부터는 예배시간에 악기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 말을 건네는 왕 목사는 분명 교인들의 입장에 서서 교인들을 이해하고 품어주고자 하는 부드러운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왕 목사는 지역사회에서도 성격 좋은 목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처럼 그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만이 아니라 그 약속을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외유내강의 인격 위에 목회 철학을 세우다
왕 목사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성도들을 품고 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마음씨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왕 목사는 성도들에게는 관대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성도들과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자신이 세운 원칙, 그리고 성도들과 나눈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왕 목사가 가지고 있었던 분명한 목회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목회 철학을 부여잡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세우는 사역에 자신의 목회 인생을 내걸었다.
왕 목사는 자신의 목회에 대한 정의를 ‘순교목회’요, ‘선비목회’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죽이고 비우는 것이 순교적 목회이며,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내어주고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선비적 목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왕 목사의 목회에 대한 신념은 성도들과의 신뢰를 두텁게 쌓고, 그가 유일하게 외쳤던 목회 철학에 성도들이 따르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왕 목사는 세 가지의 목회 철학을 고수하고 있다.
첫 번째는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이다. 교회의 모든 사역의 핵심을 제자훈련에 맞추고, 이 과정을 통해서 교인들이 자생력을 갖도록 돕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이 교회에 뿌리를 내리며, 삶 속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교회 내 평신도 지도자로 세워지기 위한 핵심 발판이 되는 철학이다.
두 번째는 단기선교와 전도집회다. 왕 목사는 매년 단기선교와 전도집회를 통해서 교회가 영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새 생명을 품는 사역에 소홀하지 않도록 했다.
세 번째는 봄, 가을에 드리는 특별새벽기도회다. 특새를 통해 영적인 야성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왕 목사는 지난 14년간 이 세 가지 목회 철학을 멈추지 않고 어김없이 지켜왔다. 이것은 강도 높은 자기반성과 책임감이 아니고서는 꾸준히 지키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왕 목사는 목회가 쉽다고 말한다.
“저는 목회가 참 쉽다고 봅니다. 어렵게 여기는 이유는 자신이 누릴 것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이죠. 내려놓으면 참 쉬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누리고 싶지만 절제하고, 가지고 싶지만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것저것 복잡하게 안 합니다. 분명한 목회 철학을 갖고, 이 세 가지만 붙잡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다른 것 안 합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목사님들이 저를 보고 교회성장학도 공부했으니 좋은 아이디어나 프로그램이 있으면 풀어놓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다들 우리 교회 얘기를 듣고는 실망합니다. 무슨 그렇다 할 시스템도 하나 없이 제자훈련, 선교, 전도집회, 새벽기도밖에 없냐는 것이죠.”
하지만 왕 목사는 이 부분에 있어 확고했다. 또 그는 이 세 가지 목회 철학을 나누며, 다음의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 번째는 이러한 목회 철학을 바탕으로 14년 동안 한 번도 쉼 없이 일관되게 사역을 진행해 왔으며,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도들이 원하지 않는 목회자의 모습을 철저히 벗어던졌다는 것이다. 그는 현존하는 다양한 목회 시스템이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 그리고 무엇과도 양보할 수 없는 목회 철학이 교회를 건강하게 한다는 것, 이것이 성도들을 성숙한 믿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왕 목사는 이 신념으로 14년 동안 교회와 성도들의 곁을 지켰다.
“저는 14년 동안 여수영광교회를 담임하면서 하나님이 건강도 주셨고, 은혜도 주셔서 지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가끔 외부 집회 인도를 부탁하는 연락이 오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 갔습니다. 나가더라도 교인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돌아와서 잤죠. 이렇게 새벽예배를 강조하니 평일에도 여수영광교회 새벽예배에는 굉장히 많은 성도들이 나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된 제자훈련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그러했듯이, 왕 목사는 교회가 위치한 여수지역의 주변 환경을 세밀히 분석했다. 물론 아버지가 개척했던 교회에 부임했기 때문에 여느 위임목사들과는 달리, 교회의 형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왕 목사는 지역사회의 정서와 분위기를 파악하고, 이를 나름대로 반영해 목회 방향을 잡은 것이다.
“여수지역은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근무시간이나 결혼적령기 등에 있어 독특한 환경적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랑의교회와 같은 강남스타일의 제자훈련을 그대로 적용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죠.”
왕 목사는 교회 운영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교인들을 편하게 해주자는 기본 전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제자훈련 또한 성도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정도의 선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제가 이 지역의 성도들을 분석해본 결과, 훈련을 통해서 영적 갈급함을 채움 받고자 하는 성도들은 20~30%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양육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나머지 70~80%의 성도들을 방치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양육과 훈련을 접목한 제자훈련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왕 목사는 훈련의 기준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제자훈련 사역의 지속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1998년 11월에 위임을 받고서 이듬해 1월부터 왕 목사는 바로 제자훈련을 시작했고, 현재 제자훈련 21기, 사역훈련 15기를 수료시키면서 매년마다 훈련을 멈추지 않고 지난 14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간의 유혹도 있었지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끝까지 훈련생을 수료시키면서 제자훈련 사역이 교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지를 교인들이 공감하고 핵심사역으로 여길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모두가 이 평신도 훈련 사역에 동참해야 함을 주지시킨 것이다. 이러한 사역적 흐름이 끊기지 않기 위해서 왕 목사는 어떻게 해서든 훈련생을 모집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교회에 부임한 후에 80여 명의 성도들 가운데서 훈련생을 선발해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 1999년 1월부터 2000년까지, 2년 동안 중직자들과 교회 내에 역동성을 가진 성도들을 중심으로 제자훈련 1, 2, 3기생을 배출했습니다. 그런데 이후부터 교인들 가운데에서 더 이상 제자훈련을 시킬 훈련생을 선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제자훈련을 지속하려면 교회가 부흥되어야 하고, 전도가 이루어지며, 새 신자가 교회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이 점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죠.”
그러나 그는 교인들 앞에서 세운 목회 철학의 원칙이 흔들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제자훈련 사역이 중간에 끊기게 되면 목회 철학에 대한 명분도 사라지고, 다음에도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핑계로 또 훈련 사역이 중단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훈련을 끝까지 이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제자훈련생에게 2명씩 전도하는 것을 필수과제로 내주며 전도집회에도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훈련생 선발은 힘겨웠죠. 그래도 어떤 기수는 5~6명을 데리고 제자훈련을 시작해서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여수영광교회의 제자훈련 과정은 별다른 양육프로그램이 없는 상황 속에서 양육과 훈련을 접목해, 교회에서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과 동시에 예비 리더로서의 자질을 점검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과정에서 제자반을 수료할 때 훈련생들에게 로마서 8장을 암송시킨다. 이는 평신도 지도자로서 사역훈련에 들어가 훈련을 받을 수 있는지 자질을 확인하고, 동시에 사역훈련에 들어갔을 때 다뤄지는 내용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다. 이렇게 제자훈련을 마치고 나면 본격적으로 사역훈련 대상자들을 선발해, 1년 동안 하나의 구역을 섬길 구역장을 세우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된다. 그 시간 동안 왕 목사는 훈련생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부여하며 한 사람의 구역장이 또 하나의 교회를 책임지는 목자임을 강조한다. 목자로서 양떼를 돌보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제자훈련에 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왕 목사의 사역 방향은 시간이 갈수록 교인들에게 점점 더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심어주게 되었고, 교인들은 신앙의 성숙을 위해 제자훈련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변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다른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성도들조차 영광교회의 제자훈련은 무엇인가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고 다시금 훈련받는 것에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에 제자훈련을 마친 강해수 집사는 여수영광교회에 오기 전까지 수십 년 간 방송국에서 근무를 해오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송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주말이 더 바쁜 날이었기에 주일성수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업무 환경도 신앙인으로서 버티기 힘든 구조였다.
날마다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서 신앙생활도 늘 같은 자리를 맴돌며, 형식적인 종교인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어도 그저 잠에 취할 뿐이었다. 그러나 제자훈련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저는 회사에서 일 잘한다고 인정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일로 일주일 중 6일을 술을 마시며 보내는가 하면, 하루 4갑의 담배를 피워대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끊어진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들어도 전혀 감동이 없고 꾸벅꾸벅 졸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제자훈련으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내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내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게 됐죠. 예배를 드릴 때 감동이 찾아왔고,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이해되고 내 마음에 새겨지니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매사에 작은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되었죠.”
또한 김희정 집사는 강해수 집사와는 달리 모태신앙으로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꾸준히 믿음생활을 해왔다. 여수로 이사를 온 후 교회의 첫인상이 좋아 여수영광교회를 찾아오게 된 김 집사는 교회에 오자마자 제자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자훈련이 시작되자 자신의 신앙이 연약한 상태라는 것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겸손히 제자훈련에 임하면서, 고목에서 꽃이 피어나듯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변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김희정 집사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모태신앙이지만 기도도 할 줄 몰랐습니다. 훈련시간에 목사님이 갑자기 대표로 기도를 시키시는데,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구역예배에 나가도 구역장에게 기도시키지 말라고 부탁하는 저였는데, 훈련을 통해서 신앙의 기본부터 다지게 되었고 지금은 구역원들에게 기도를 잘한다고 인정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훈련을 받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제자훈련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간증을 나누고 말씀 앞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내가 참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훈련시간에 눈물도 참 많이 흘렸습니다.”
한편 기성 교회를 보면 남녀비율에 있어서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여수영광교회는 남녀 비율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 이유는 부부가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왕 목사는 이 또한 제자훈련의 귀한 열매라고 말한다.
반드시 거쳐야 할 수료 과정
여수영광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마치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할 수료 과정이 있다. 바로 2명 이상을 전도하거나 아니면 단기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는 제자훈련을 통해 훈련되고 성숙된 신앙이 영혼 사랑의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며, 평신도 지도자로서 사역할 수 있는 현장을 마련해주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렇다 보니 여수영광교회에서 진행되는 전도집회에는 수평 이동하는 성도보다 믿음생활을 해보지 않은 초신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왕 목사가 부임 이후부터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했던 전도집회를 통해서 현재 275명이 등록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 전도사역은 제자반을 수료한 성도들이 담당하는 새 가족 정착 프로그램 바나바 사역과 연계되어 진행되고 있다.
요즘 여수지역에 신앙의 열기가 더해지면서 신천지 또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여수영광교회도 한 가정이 신천지로 옮겨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그래서 제자훈련이 교회 내에서 신앙의 기본을 더욱 견고히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신앙의 기본이 없는 성도들이 무방비로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역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구역장들에게도 거룩한 부담감을 부여했다. 이전 교회에서 여러 가지 교재로 훈련을 받았던 민복기 장로도 이 부분에 있어서 제자훈련이 중요한 사역임을 강조했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성경의 기초에 관련된 신학적인 내용들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었습니다. 특히 요즘 신천지가 여수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얻게 된 것은 제자훈련의 커다란 열매입니다.”
왕 목사는 구역장에게 역할과 책임을 부여하면서 그들이 사역훈련 후 흔들림 없는 리더십으로 설 수 있도록, 2년에 한 번씩 성경연구원 과정을 개설해 구역장 재교육을 하며, 구역이 잘못된 거짓 진리에 휘둘리지 않도록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 제자훈련생들이 당시 훈련을 받으며 제출했던 과제물이나 간증문과 같은 자료들을 목양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매너리즘에 빠지려 할 때마다 꺼내보며 자신과 성도들을 담금질한다고 한다. 이런 그의 모습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갱신에 힘쓰는 강인한 목회자 리더십을 엿볼 수 있었다.
훈련을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하다
제자훈련이 성도들의 머리만을 키워서 오히려 목회가 어려워지게 만든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훈련을 통해 영적인 성숙을 이룬 평신도 지도자들이 사역할 수 있는 사역의 현장을 마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앙적 열정이 영혼을 사랑하는 봉사와 섬김의 현장으로 이어져야 건강한 영적 상태를 지속할 수 있다.
왕 목사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몸소 실천을 보이는 목회자다. 점점 공간이 부족해가는 여수영광교회에 재건축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왕 목사는 더 이상 재건축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왕 목사는 지난 2010년에는 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부목사의 분립개척을 지원했다. 교회에서 불과 5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본 교회 세례교인 16명과 필요한 개척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앞으로도 여수영광교회 부교역자에게는 지속적으로 개척을 지원할 계획을 밝혔다. 2012년에는 교회에서 후원하고 있는 선교지에도 3개의 교회를 더 개척했다.
이러한 섬김의 사역이 말씀의 훈련을 받은 성도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설립 30주년이었던 작년에는 교회 내에서 행사를 가지며 감사와 축제의 시간이 교회행사로만 그치지 않도록 지역사회와 함께 공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들을 주변 상인들과 나누는가 하면 ‘이웃사랑 나눔 프로젝트(거저주기)’ 행사 등을 준비해 이웃을 섬기는 노력에 성도들이 마음을 모았다. 지역아동센터 등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 선물을 나누며 꿈을 나누고, 소년소녀가장과 독거노인을 위한 ‘한 끼 나눔’ 사역을 통해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며, 물 부족으로 고통당하는 아프리카에 우물을 설치하는 프로젝트 등을 진행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여수영광교회가 훈련을 통해 세상 속에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목회자가 밀알이 되는 교회
교인들의 상황을 헤아리고 그들의 영적 성숙과 변화를 위해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으면서도 분명한 목회 철학을 붙잡은 왕재권 목사를 보며 ‘동굴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졌던 옥한흠 목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신도가 자의식을 일깨우도록 그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배려해주고 끌어안는 목회자. 그러나 본인에게 있어서는 양보할 수 없는 원칙과 철학을 가지고 높은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며 날마다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는 목회자. 이 시대가 바라고 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세워가는 목회자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여수영광교회의 왕재권 목사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았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했다. 그 열매가 지금의 여수영광교회인 것이다. 물론 여수영광교회의 제자훈련은 지역적 정서와 목회적 상황에 의해서 알맞게 재조정된 부분들이 있다. 무심코 제자훈련을 쉽게 생각하고 수준을 낮춰버리면, 그만큼 훈련생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러나 여수영광교회가 훈련의 열매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사역훈련을 통해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에 더욱 집중했던 것, 그리고 성도를 위한 교회로 세우기 위해 왕 목사 자신의 철저한 자기 복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유내강의 성품과 삶으로 승부했던 여수영광교회의 제자훈련의 경우에는 성도가 편안하게 훈련받는 만큼 목회자는 그 이상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왕재권 목사는 14년간 여수영광교회를 담임하며, 부임초기 80명이었던 성도가 주일학교를 포함해 950명으로 10배 이상 성장하는 은혜를 경험했다. 이제 그 성장 속에서 제자훈련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초양육시스템을 조금 더 보완해 나간다면, 더욱 업그레이드 된 영적 성숙과 교회 성장이 보조를 맞출 것으로 본다.
은혜의 발걸음으로 걸어왔던 여수영광교회는 이제 성도들을 제자 삼아 이웃을 섬기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교회, 다음 세대의 리더를 키우고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교회의 ‘비전2020’과 같이 앞으로 10년 뒤가 더욱 기대되는 교회다.
이처럼 원칙을 붙잡고 분명한 목회 철학을 세우며 교회와 성도를 아끼고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세워질 때, 이 시대에 편만해가는 어둠이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밝히는 빛으로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 은혜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이경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