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야기 김영현 목사
피상열 목사는 서울중앙신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서울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산골 교회인 내설악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해 12년째 제자훈련 사역을 하고 있다.
김 목사 : “엄청 춥네요.”
피 목사 : “제가 4월에 부임을 했는데, 수도가 얼어서 물이 나오지 않더군요. 추운 날씨 때문에 이곳에서는 황태가 잘됩니다.”
김 목사 : “네, 오면서 황태 덕장들을 몇 개 봤습니다.”
피 목사 : “황태가 잘 되는 곳이라는 의미는 사람 살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내설악교회 피상열 목사와 처음 만나 나눈 대화는 이 지역이 얼마나 추운지를 잘 말해 준다. 도로 사정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위치한 이 교회를 찾아가는 길은 휴가를 떠난다는 생각이 아니면 쉽게 갈 수 없는 거리였다. 내설악교회가 위치한 용대리는 황태덕장과 백담사로 유명하고, 밭농사를 짓는 강원도 산골 동네이다.
이 지역에서 제자훈련하는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라도 빨리 가서 현장을 보고 싶었다. 제자훈련을 몇 기까지 수료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강원도 산골에서도 제자훈련 목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부터 꽁꽁 얼어붙은 강원도 산골 토양에 어떻게 제자훈련의 씨앗이 심겨지고 싹이 나올 수 있었는지 직접 찾아가 보도록 하자.
황태 말리는 농촌 교회로 부임하다
목회자와 교회의 만남은 마치 부부의 만남과 비슷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적 있는 사람과 소개팅 자리에서 다시 만나 결혼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설악교회와 피상열 목사(당시 전도사)의 만남도 그랬다. 피 목사가 철원 지역의 한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중·고등부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 수련회를 떠나면서 우연히 내설악교회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문득 ‘이런 지역에서 목회를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시 섬기고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피 목사에게 바로 내설악교회를 목회지로 추천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은 피 목사 부부는 29개월과 7개월짜리 두 아들과 함께 2001년 4월 1일 내설악교회 담임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고생을 각오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부부가 맞닥뜨린 교회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여행객으로 방문한 것과 실제 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온도 차이가 컸다. 내설악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은 불교 문화가 팽배한 곳이다. 실제로 백담사, 봉정암, 오세암 등 한국 사회에 꽤 많이 알려진 사찰들이 즐비했다. 셔틀버스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사찰이 있었고, 불교 관련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웃해 있는 ‘만해 마을’은 한용운 선생의 유적지로 불교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반면에 교회는 초라한 모습으로 제대로 관리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일상생활도 불편한 점이 많았다. 4월임에도 아직 수돗물이 얼어서 나오지 않았다. 부임 후 한 달 동안은 얼어붙은 수도 때문에 2층에 있는 사택에서 아래층으로 일일이 물을 길기 위해 위험한 계단을 오르내리곤 해야 했다. 아주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것이다. 하지만 추운 날씨보다 피 목사를 더 움츠리게 만든 것은 당시 내설악교회의 상황이었다.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처음 교회당에 들어왔을 때가 기억납니다. 강대상 옆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져 있었지요. 4월에 말입니다. 건물도 을씨년스러웠습니다. 황량한 벌판에 놓인 기분이었습니다. 침체기로 접어든 교회에는 8명 정도의 성도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얼어 있던 수도는 5월에서야 녹았다. 그때서야 목회 환경의 변화로 인해 잠시 얼어 있었던 피 목사의 마음도 녹아내렸다. 이제 얼어붙어 있는 목회 환경을 녹일 차례였다. 부교역자 시절에도 환경을 탓하며 사역을 피하지 않았던 그였다. 사실 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좋아질 일만 남았다는 마음의 확신도 얻었다. 실제로 더디지만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고, 많지 않은 성도들이지만 한 명 한 명 열심히 섬겼다. 피 목사의 부임 초기를 회고하는 홍해경 집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는 피 목사님이 부임하시기 불과 몇 달 전부터 내설악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갓 전도되어 교회에 나온 완전 초신자였죠. 당시 성도 가운데 제가 43세로 제일 어렸습니다. 나머지는 60세 이상 되신 분들이었죠. 목사님은 용대리에서 멀리 진부리에 사는 저 같은 초신자 한 사람 때문에 새벽에 차량을 운행하시면서 정말 열심히 사역하셨습니다. 한번은 차가 미끄러져 뒤집히는 사고까지 당하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피상열 목사가 당시 얼마나 열심히 사역을 했는지 성도들은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말 그대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며 먹이고 사랑한 것이다.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가 났는데도, 멈추지 않고 열심히 새벽기도를 드리며 기도에 힘썼다. 그가 알고 있는 목회의 모든 것을 시도하면서 정말 열심히 목양했다.
CAL세미나와 열악한 목회 현실의 괴리
피 목사가 처음 제자훈련을 접한 것은 서울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옥한흠 목사님이 직접 하시는 강의를 들었고, 거기에 도전을 받은 피 목사는 담임 전도사의 신분으로 CAL-NET 지역 대표의 추천을 받아 CAL세미나도 수료했다. 하지만 곧바로 내설악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실시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설악교회와 같은 시골 교회는 제자훈련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피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신학교 채플에서 옥한흠 목사님이 강의하시고 질의응답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우 중에 한 사람이 “인천 달동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그런 곳에서도 제자훈련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한 질문에 옥 목사님은 역 질문을 하셨습니다. “옥 목사가 그곳에서 목회를 한다면 어떤 사역을 했을 것 같냐?”고 말입니다. 그때 그 학우는 “옥 목사님이라면 제자훈련을 하셨겠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옥 목사님에게 있어서 제자훈련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목회의 본질이고, 중심이 되는 사역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제자훈련을 자기 사람을 만드는 수단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런 오해를 풀 수 있었지요. 하지만 실제 저의 목회와는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CAL세미나에서 참석하면서 피 목사는 다시 한번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목회 현장으로 돌아온 후에는 좀 더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포기했다. 인천 달동네는 몰라도 강원도 산골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스스로 한 것이다.
지역의 한계를 넘어 ‘복의 근원’이 되는 교회로
젊은 전도사가 열심히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인근 군부대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없어 말씀을 듣지 못하는 아이들을 내설악교회로 보내기 시작했다. 젊은 군인들도 하나둘씩 모 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조금씩 성장해 갔고,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목회자로서 영혼을 돌보는 것에 보람을 찾으며 5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데 피 목사는 갑자기 큰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피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앞서 교회를 담임했던 교역자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분들에게 사명감이 부족했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점점 힘이 빠지고 자신감을 잃어가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군인 가족들이 자주 지역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유입되고 빠져나가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주일학교가 부흥하다가 어떤 때는 저희 아이들만 남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말 못할 사정으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게 되더군요. 선임 교역자들도 동일한 문제를 경험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있는 용대리에는 아직 남아 있는 군인 관사가 있었다. 주로 미혼이나 자녀가 없는 신혼부부 군인들이 사용했다. 대부분의 군 관사는 더 큰 도시인 원통 쪽으로 거의 옮겨간 상황이었다. 군인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환으로 학교와 병원이 상대적으로 시설이 열악한 지역을 떠나게 되었다. 군인들마저 살기 힘든 마을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 보라. 그것도 어느 정도의 양육과정을 마치고, 정이 들만 하면 떠나가니 함께 일할 동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한 목회자에게 있어서 교인들의 이동은 사역의 힘이 빠지게 했다. 그것도 지역이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로, 교인들의 유동성의 문제는 목회자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매번 맞이하게 했다. 피 목사가 가장 힘들었을 때는 내설악교회 부임 후 시작한 신학대학원 과정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기 직전이었다.
“제자훈련 철학으로 목회를 하는 지금은 짧은 기간이라도 군인 가족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파송하는 기쁨을 가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교인들은 노력한 만큼 영적 성장이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목회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평생 목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치 전쟁에 무기 없이 나가는 군인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상열 목사는 어떻게 했을까? 피 목사는 우연한 계기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느끼고, 다시 내설악교회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선배 목사가 소개한 영성훈련 세미나에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목회의 새로운 목표를 얻은 것이다. 바로 지역과 세계를 축복하는 ‘복의 근원이 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미자립 교회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복의 근원자’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2절이 그동안 어려운 현실이라는 천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무엇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내가 ‘복의 근원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이런 깨달음 후에 피 목사가 시작한 것이 지역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축복하고, 10/40창 지역의 선교를 위해 특별히 중보기도 하는 사역이었다. 물질로 하는 선교가 아니라 기도로 하는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중보기도 사역은 피 목사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물질보다 더 귀한 것을 흘려보내고, 나누어 줄 수 있는 목사와 교회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사명감을 회복하고, 제자훈련 시작
다시 찾은 목회의 소명과 함께, 훈련 목회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깨우쳐 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설교를 듣고 양육을 받아온 평신도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몇몇 성도들이 자신들을 훈련시켜 달라고 피 목사를 찾아온 것이다. 피 목사의 말이다.
“제가 좀 둔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훈련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음에도 저는 우리 교회에 아직 제자훈련이 이르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처한 상황이나 교회의 크기로 인해 자신의 사역을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피 목사의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사역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의 사역을 이용하셔서 성도의 심령을 변화시키신다.
피상열 목사는 사명감이 회복되고, 목회에 대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제자훈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성도들이 더 준비되어야 함을 느꼈다. 그때 신학대학원 시절 접했던 제자훈련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훈련을 실시하기 위해서 양육반을 먼저 시작했다. 2007년에 드디어 내설악교회에서 8명의 성도들과 함께 확신반, 성장반 양육과정이 시작되었다.
한 해 동안 실시한 양육반을 수료한 인원 가운데 여자 성도 4명과 함께 1기 제자반을 시작했다. 도중에 군인 가정인 한 사람이 타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떠났지만, 제자훈련 교재 3권 후반부는 통신과정으로 진행해서 4명 모두가 수료했다. 그리고 1기 훈련생들은 2009년에 곧바로 사역훈련으로 돌입해 수료를 했다.
제자훈련 사역을 시작하고 피 목사를 통해 진행되던 목장(소그룹)은 이제 목장리더 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목회자와 같은 교회론을 가진 평신도 리더들과 함께 교회의 말씀 사역을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인천 달동네보다 더 낙후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강원도 산골에서도 제자훈련의 꽃이 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제자훈련의 강도, 타협할 필요 없다
제자훈련의 대상은 사모와 세 명의 여 집사가 다였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50대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육체적 활동이 많은 농사일을 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암 치료를 위해서 공기 좋은 지역을 찾아 귀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시작 전부터 정말 힘들다는 제자훈련 과정을 이들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고민 끝에 피 목사는 사랑의교회의 제자훈련과 비교해서 약간 강도를 낮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제일 힘든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말씀 암송’에서 특히 그러했다. 각 과에서 요구되는 2개의 암송 구절을 1개로 줄여 과제로 준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가장 은혜를 받고 즐거워한 훈련의 영역이 말씀 암송이었다. 이명순 집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는 2004년도에 암 치료 후 요양차 이곳으로 내려왔어요. 예수님을 믿은 지 한 5년쯤 되었었죠. 경기도에서 섬기던 교회에서 주일학교 사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조그마한 아이들이 말씀을 암송하는게 저는 너무 힘들어 보였던 경험이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암송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런데 말씀을 배우고 훈련을 하면서 이전에 경험한 세상 것들이 아니라 말씀으로 저를 채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딸에게 스탠드를 하나 구해 오게 해서 가족이 잠든 밤에 혼자 말씀을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말씀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사역반 때 외웠던 로마서 8장을 반복해서 암송하고 다닙니다.”
이 집사는 훈련을 수료하고, 목장 리더로 섬긴지 3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도 제자반과 사역반에서 외운 말씀들이 인터뷰 중간 중간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용되는 것을 보며 과연 암송에 큰 은혜를 받았다는 표현이 틀린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암송에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명자 집사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훈련생인 홍해경 집사도 훈련에서 얻게 된 가장 큰 소득이 말씀 암송이라고 말한다.
“제자훈련 교재 2권 2과 예레미야 31장 32절에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라는 말씀이 있지요. 제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고 저의 죄인된 것을 고백하게 된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제가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농사일도 힘들고, 남편의 눈치도 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모두 열심히 훈련에 참가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말씀 앞에 서면서 은혜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피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는 집사님들이 로마서 8장을 암송하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훈련의 강도는 내가 판단할 것이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군부대에 가서 군인들을 훈련하는 사역을 몇 년 간 해왔는데요, 특수부대 군인들도 제대로 말씀 암송을 해 오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집사님들은 대학 시험 준비하듯이 제자훈련에 임했습니다. 배우지 못했던 마음을 말씀으로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훈련 2기의 시도와 실패
피상열 목사는 1기 제자훈련을 마치고, 사역훈련을 시작하면서 2기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절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훈련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기는 두 명으로 시작했는데, 한 사람은 군인 가정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훈련 도중 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다면 모르지만, 제자훈련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 정도의 목회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 의미를 찾게 되었다. 피 목사의 말이다.
“중간에 소천 당하신 분은 깊은 산골에 천막을 치고 살다가 집도 짓고, 이제 조금 살 만할 때 돌아가셨어요. 남편에게 억눌리고 한 많은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었죠. 배움이 짧고 부족했지만, 말씀으로 훈련받고자 하는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으셨어요. 돌아가실 때 ‘목사님, 제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예수님 만난 게 은혜였고, 제자훈련이 있어서 즐거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다른 사람에게는 제자훈련이 하나의 프로그램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분에게 있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이지요. 훈련은 마치지 못했지만, 저는 오히려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천국으로 파송하고, 군인 가정은 다른 지역으로 파송했다. 피 목사는 그렇게 모든 훈련생들을 훈련받고 흩어지는 파송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제자훈련 전 단계인 양육의 단계만 거치더라도 충분한 훈련의 효과를 볼 수 있도록 귀납적으로 말씀 공부를 인도했다.
제자훈련은 아니지만 꾸준히 전 성도들을 대상으로 양육과정을 실시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양육과정을 수료했다. 성도들이 목장으로 나누어져 리더들과 함께 귀납적인 방법으로 소그룹 성경공부를 하고, 양육과정도 소그룹에서 진행해 왔기 때문에 올해는 5명 정도의 성도들이 제자훈련을 함께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세계를 품고 중보기도 하는 교회로 입소문 자자
피상열 목사가 지역을 위해 ‘복의 근원’이 되는 교회가 되기로 결정하고, 시작한 것이 중보기도 사역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새벽마다 모여 기도한다. 눈길에 새벽시간에 모이는 것이 너무 힘들 때는 저녁시간에 모여서 꼭 중보기도 사역을 감당한다.
중보기도 사역은 담임목사의 비전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이제는 피 목사와 같은 교회론과 비전을 가진 평신도 리더들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집중하는 사역이 되었다. 금요일마다 목장에서도 성경공부 후에 중보기도 사역이 진행된다. 수요예배도 중보기도를 중심으로 드려진다. 목장 모임에서 드려진 헌금은 모두 선교헌금으로 드려진다. 5,600만 원의 1년 예산에서 선교비가 차지하는 금액이 1,000만원을 넘고 있다.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다.
“처음에 물질도 흘려보내자고 장로님께 마음을 나누었더니 웃으시더군요. 지금 목회자 사례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데, 물질을 나눈다고 하니 말이죠. 결국 목장헌금을 일반 재정으로 포함시키지 않고, 특별헌금으로 모아 모두 선교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선교를 위해서만 드리게 된 것이지요. 다음 해에 결산을 해 보니, 당연히 목장헌금만큼 부족해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 이상으로 주님께서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면 되는구나’ 하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지속적으로 선교를 위해 기도해 온 결과, 선교사들도 내설악교회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되었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감사한 것은 내설악교회가 속한 성결교단 양인(양구/인제)감찰회에서 진행하는 선교사 수련회가 내설악교회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내설악교회가 ‘복의 근원’이 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10년 가까이 꾸준히 기도해 오다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직접 선교사님들을 모시고 쉼과 재충전을 제공하는 사역을 주도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내설악교회가 가진 비전 중에 하나는 선교사들을 위한 비전센터를 건립하는 것이다. 지금은 교회당 건물만 교회의 소유이지만, 교회 옆 사택이 있는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서 준비중이다. 그 마중물이 된 것이 피 목사 사모의 보험금 사건이었다. 2011년 말, 갑상선 암 선고를 받고 나서 사모는 암의 크기가 더 자라기를 기도했다. 2cm가 넘어야 보험금 3,000만원이 나오는데, 검사결과 1cm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도의 응답(?)으로 보험금을 받게 되었고, 그 금액을 온전히 건축헌금으로 드리게 되었다. 사역을 하면서 만난 사모의 암 선고! 흔하고 완치율이 높은 갑상선암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부부는 그것 역시도 슬픔이 변하여 기쁨 됨을 보여 주었다. 보험금을 마중물로 사역을 계획한 그들의 결단과 헌신을 통해 주님께서 주신 비전을 바라보며, 그 어떤 풍랑과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길을 걸어가는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직 40여 명이 출석하는 시골 교회지만, 훈련받은 4명의 리더를 중심으로 내설악교회는 지금도 세계를 향해서 기도하고 있다. 이명순 집사의 말처럼 도시의 큰 교회들이 내설악교회와 같이, 주님의 제자들로 가득 찬 작은 교회들로 인해 부끄러워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상황에도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
제자훈련을 하면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말해 실패가 아니다. 지역의 특성상 젊은이들은 중간에 타 지역으로 떠나게 되고, 어르신들은 천국으로 떠나시기도 한다. 그럴 때는 그것을 파송이라 여기며, 수료를 하지 못하더라도 수료하지 못한 것에 집중하기보다 다음을 준비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다.
지금도 강원도 산골 용대리는 차가운 겨울을 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아무리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쳐도 내설악교회의 성도들은 본인이 맡은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세계를 바라보는 중보기도 사역자가 되었다. 피 목사의 말이다.
“훈련을 마친 집사님들과 양육과정의 성도들도 목사인 제가 느끼기로는 신앙을 흔들 만한 어려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계십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가정을 버리고 떠나고 싶을 정도로 큰 문제이지만 믿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서 저도 강한 도전을 받습니다.”
피상열 목사가 용대리에 남아 지역을 축복하고, 믿지 않는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을 비전으로 삼으면서 내설악교회에 남아 있는 것처럼, 훈련받은 성도들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조만간 그 지역이 불교의 메카에서 기독교의 메카로, 내설악교회가 제자훈련 모델 교회로 자리매김할 날을 기대해 본다. <김영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