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야기

2015년 04월

인천제자교회 *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현장이야기 박희원 목사

장대희 목사는 동국대학교 법정대학과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4년에 인천제자교회(당시 성인천교회)를 개척해 현재까지 사역하고 있으며,
인천 CAL-NET 총무로 섬기고 있다.

 

 

제자훈련은 많은 성도와 헌금, 그리고 큰 건물로 상징되는 소위 성공적 목회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본질적인 사역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 초대 교회의 사도들에게 전해졌던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치고 완전한 자로 세우는” 사역이다. 세상의 저항과 사역자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겉으로 보기에는 약하고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는 사역이다.
제자훈련지도자세미나(이하 CAL세미나) 100기가 열리는 2015년 4월에 <디사이플>이 소개할 현장은 소위 성공한 교회가 아니다. 실패하고 무너져 버린 것같이 보이는 현장, 제자훈련이 실패한 것같이 보이는 교회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고 여전히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현장이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하촌로 55, 상가 건물 6층에 자리 잡은 인천제자교회의 장대희 목사를 찾았다.

장대희 목사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역에 대해서 소개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오병이어를 내 놓는 기분으로, 사르밧 과부가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작은 떡 하나 만들어 내 놓는 심정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지금까지 ‘현장이야기’가 대부분 소위 성공 사례를 다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는 성공 사례에서 배울 수 없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었다.

 

폭넓은 신앙의 유산
장대희 목사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신학교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의 경험과 신앙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장 목사는 외가로는 4대째, 친가로는 3대째 신앙생활을 이어오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안도 신의주, 어머니는 황해도 출신으로, 전쟁 중 피난민으로 부산에 내려왔다가 만나 결혼해 장 목사를 낳았다. 장 목사는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충현교회에 출석하며 전통적인 신앙생활을 했고, 거기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났다.
어린 시절에는 삼촌이 부산에서 의사로 일했고, 부친의 사업도 번창했기 때문에 전쟁 이후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유복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에는 신앙에 대해서 그리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젊은 시절에는 인생의 허무를 느껴 방탕한 생활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동국대학교 법정대학을 다니던 그를 만나 주셨다. 그때 그는 갑자기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치 “면도칼로 창호지를 자르듯” 이전과 생활이 완전히 바뀌는 체험을 했다.
그러다가 1977년 군대 제대 후 청담동에 살면서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합동신학교 교수였던 김명혁 목사가 개척한 강변교회에 출석했다.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송인규 교수가 강변교회 전도사였고 박윤선, 옥한흠, 홍정길, 김상복, 이종윤 목사와 강단 교류가 이뤄지던 교회다. 장 목사는 강변교회에서 전통 교회 분위기와는 많이 다른 새로운 교회문화와 메시지를 체험했는데, 거기서 믿음이 주는 자유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장 목사는 신학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고, 직장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목회의 길을 꿈꿨던 사람들과는 달리, 사회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평신도의 입장도 잘 이해하고 있다.
정리해 보면, 모태신앙, 신앙적 방황, 특별한 영적 체험을 통해 회심했고, 어려서 누렸던 유복한 삶과 이후 가난을 겪기도 해 한마디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던 중 어려움을 만났는데, 그것이 그가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계기가 됐다. 

 

고난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을 받다
어려서부터 부유한 삶을 누리던 장 목사는 결혼 후 경제적 몰락을 경험한다. 그는 이를 부친이 재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에 당한 일이라고 해석한다. 부친이 보증을 잘못 서면서 모든 재산이 무너졌고, 부친의 사업을 도와 일하고 있던 장 목사 역시 경제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장 목사 집안은 인천으로 이주하고, 강변교회를 함께 섬기던 한 집사의 소개로 부천의 제조공장을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장 목사의 마음을 붙들고 있던 생각은 가정 경제의 회복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붙잡혀 있었고, 집안이 어려워지기 전부터 갖고 있던 신학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사실 장 목사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7년 전 아내 이진숙 사모의 반대로 신학교 진학을 포기했었다.
이진숙 사모는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늘 주위에서 “사모감”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다 보니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서울의 직장인이었던 장 목사를 소개받고 도망하다시피 결혼한 사람이었다. 사모는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둘째가 태어나면서 장 목사가 자신에게 “내가 할 말이 있다”며 말을 꺼내려 하자, 즉시 “신학교 이야기하는 거죠? 가세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장 목사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것이 1989년, 37세 때였다. 3년 동안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성마을교회 교육전도사로 섬기다가 1992년에 사임하고 교회를 개척한다.
특이하게도 장 목사의 가정사가 그의 교회 사역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는 것 같았다.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처럼, 장 목사가 개척한 인천제자교회는 다른 교회들이 경험하지 못한 풍성함을 누리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던 것처럼, 인천제자교회도 급작스러운 위기를 경험하며 어려움을 겪는다.

 

기적으로 세워진 교회
1992년 7월부터 장 목사는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개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비한 역사가 일어났다. 자꾸 아픈 사람들의 병이 나은 것이다. 장 목사가 신유를 위한 안수기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기도했을 뿐인데 아픈 사람이 왔다가 병이 낫는 일이 벌어졌다. 술주정꾼이 술을 끊고, 병자가 낫고, 암환자가 설교만 듣고도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30년간 믿던 암환자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구원받게 하려고 자녀들이 모시고 왔는데, 전혀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아서 밥을 먹고, 일어서고 세례까지 받았다. 반신불수가 된 중풍병자가 낫는 일도 있었다. 이후 제자훈련을 하면서도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지니 자꾸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다가 한상훈이라는 중증 정신질환자의 가족이 소문을 듣고 예배 드리는 집으로 찾아와서는 아들이 장 목사와 함께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모는 집안에 일하는 사람들을 둘 정도로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감당할 수가 없던 것이다. 장 목사 가족도 중증정신질환자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환자가 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자녀들은 깜짝 놀랐다. 환자는 유리창을 깨뜨리기까지 했다.
“그때는 모르고 그렇게 했어요. 그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요.” 그런데 장 목사가 환자를 10개월이나 데리고 있자, 환자의 가족과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거의 10여 명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가 점점 좋아지자 부모가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을 했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함께 동참했다. 
1992년에 아파트에서 가정예배로 시작한 교회는 1994년 10월, 인천 만수동에서 성인천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개척하자마자 크지는 않으나 자체 교회 건물까지 갖게 됐다. 마치 장 목사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것처럼, 인천제자교회는 태동부터 예배당 건물을 가지고 시작했다! 물론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개척하자마자 자기 건물을 가진 놀라운 교회로 보였을 것이다.
같은 노회 목회자들은 장 목사가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돈이 있어서 건물부터 지었을 것이라고 오해하기까지 했다. 정작 장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교회가 다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장 목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성공적인 제자훈련 목회를 경험하다
그러나 장대희 목사는 신유 역사들과 그에 대한 소문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로 인해 땅도 사고, 교회도 세웠지만, 이것이 목회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세미나를 다니며 목회를 알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던 중 인천 은혜의교회 박정식 목사를 만났다. 박 목사는 일면식도 없던 장 목사의 질문에 친절히 답을 해 주고, 목회를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장 목사는 20년 전 인천 은혜의교회가 허름한 임대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제자훈련과 CAL세미나를 알게 된 것도 박정식 목사를 통해서다. 그래서 장 목사는 지금까지도 박정식 목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렇게 CAL세미나 32기를 수료한 장 목사는 바로 제자훈련을 시작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위한 토양 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제자훈련을 받기 전 양육 과정으로 벧엘성서교육을 시작했다. 벧엘성서교육은 2년 과정이었기에, 훈련 기간만 보면 성경대학과 교리대학을 합친 것과 같을 정도로, 상당히 수준 높은 양육 과정인 셈이다. 1996년부터 벧엘성서교육을 시작해, 그것을 졸업한 사람들에 한해서 제자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1998년부터 제자훈련이 시작됐다.
제자훈련을 하자 교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랑의교회와 은혜의교회 사례를 계속 참조하면서 6명으로 1기 제자반을 시작했다. 이미 2년 동안 벧엘성서교육을 한 사람들과 제자훈련을 했기에 훈련의 강도는 상당히 높았다. 이런 이유로 수료자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7년 정도 제자훈련을 하니, 약 50명 정도의 수료자가 생겼고, 그들은 교회를 이끄는 핵심이 됐다.
교회 출석 인원도 계속 늘었다. 무엇보다 출석 인원의 20~30% 정도 되는 평신도지도자들이 교회를 역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늘어난 교인들 대부분은 회심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 지역의 다른 교인들을 끌어온 일이 없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있는 지역에서 이사를 온 경우 외에는, 새롭게 믿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던 사람이 구원받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교회의 기쁨이었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수료한 평신도지도자들이 생기자 교회는 급속도로 역동적인 체질로 바뀌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계속 제자훈련을 하며 너무 재미있었죠. 벧엘성서교육은 2년을 마쳐야 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끊이지 않았어요. 그뿐 아니라, 제자반과 사역반도 계속 진행했고, 2001년에 전도폭발까지 시작하니 교회에 활기가 넘쳤지요. 출석 인원도 늘어, 개척 당시에 지은 교회 건물이 좁을 지경이었죠.”
이진숙 사모는 특별히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통해서 평신도들의 은사가 개발되고, 마음껏 발휘될 수 있었다고 기억한다. 만약 <디사이플>이 당시의 인천제자교회(성인천교회)를 취재했다면, 제자훈련을 통한 전형적인 성공 사례라고 소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면 아래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번아웃(burn-out), 쓰러지다
활발하고 역동적으로 교회의 체질이 변화되는 그 시점에 장 목사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는 목회가 너무 재밌었다. 노회에까지 소문이 나서 다른 교회에서 탐방이 끊이지 않았고, 목회자들이 제자훈련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 노회 내에서 제자훈련 포럼이 열렸고, 교회에서는 탐방객들을 다 감당하지 못해 은혜의교회 박정식 목사에게까지 도움을 청해 따로 세미나가 생길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신학교에서 장 목사를 채플 강사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성도들이 제자훈련을 통해 시야가 넓어지고 점점 역동적으로 변했기에, 성도들이 성장하는 만큼 목회자도 성장해야 했다. 그러나 장 목사는 그들의 변화 속도를 따라 잡기가 벅찼다. “비록 소수지만 강력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훈련받은 평신도지도자들이 경주마처럼 달리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던 거죠.”
장 목사는 당시 벧엘성서교육, 제자훈련, 사역훈련, 전도폭발, 순장반, 각종 예배 설교, 심방까지 모두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 자꾸 사람들이 늘어나니 심방도 늘어나고, 훈련받은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설교를 기대하고, 똑똑한 청년들도 자꾸 늘어나면서 그들의 요구를 채워줘야만 했다.
장 목사의 큰 실수는 사역을 사모나 부교역자, 또는 평신도지도자들에게 위임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그가 다른 이에게 위임한 사역이라고는 사모에게 새가족 사역 하나를 맡긴 것뿐이다. 결국 장 목사는 번아웃(burn-out) 되고 말았다. 쓰러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단계만 넘어가면 사역을 넘겨줘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사역의 위임을 미뤘던 것이 뼈아픈 실수였다. 

 

교회가 무너지다
목사는 지쳐 이전과 같은 열정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는데, 정작 훈련받은 50명의 평신도지도자들은 경주마처럼 교회를 이끌어갔다. 이들의 일하는 스케일은 계속 커지는데, 목사는 훈련의 짐이 무거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지금 생각하면 좀 천천히 갔어야 했어요. 너무 기준을 높게 잡았고, 성도들을 모든 훈련 체계에 들어오게 하려고 했죠.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더 큰 힘을 내야 했는데 말이죠.”
목사가 번아웃 됐는데도, 교회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장 목사는 여러 가지 사역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쳤지만, 사역을 줄이기는커녕 더 많은 큰일을 감당해야만 했다. 교회를 개척할 때 지은 예배당이 너무 좁아 계속 밀려드는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어, 교회 건축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 목사는 교회 건축까지 하나하나 챙길 여력이 없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교회 성도의 소개로 건축에 관련한 일을 믿고 맡긴 사람에게 계약금을 사기 당한 것이다. 2003년 말의 일이다. 예배당 옆을 증축하기 위해 옆 땅을 사서 건축 하려다가 사기를 당해 교회 돈을 날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분쟁거리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평신도지도자 가정 내에 있었던 문제가 드러나면서 교회까지 어려움에 휩싸였다. 사실 장 목사가 사역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기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의 어려움을 장 목사의 탓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장 목사는 교회의 모든 문제가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저의 리더십이었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자 교회를 이끌어가던 평신도지도자들이 하나둘씩 교회를 떠났다. 거의 10년 동안 교회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교인 숫자도 절반 이하로 줄었다. 제자훈련, 사역훈련도 멈췄다. 예배당을 확장하려는 계획 가운데 시작된 어려움으로, 결국 2014년에는 개척 때 지은 예배당까지 청산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은 상가 6층으로 예배 처소를 옮긴 상태다. 
“제자훈련 목회를 장거리 경주로 생각하고 긴 호흡으로 걸었어야 했는데, 그 당시는 너무 힘이 있고 감동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변하는 게 보이니까 완급조절을 하지 못했던 거죠.” 장 목사는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를 자신의 탈진과 리더십 부족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탓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사기를 당한 것도, 평신도지도자들이 떠난 것도 모두 자신의 모자람 때문이고, 사역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장 목사는 자신의 부유했던 가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교회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 제자반은 모집되지 않았고, 성실하고 역동적으로 교회를 이끌며 사역하던 평신도지도자들이 하나둘 교회를 떠났다.

 

포기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천제자교회의 사례를 실패 사례라고 분류할 수는 없다. 인천제자교회의 제자훈련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 목사로부터 훈련받은 사람들이 비록 인천제자교회는 아니지만 다른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사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 목사는 자신에게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모두 떠난 상황에서도, 그들이 다른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사역한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자신의 제자훈련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 중에는 대형 교회로 옮긴 사람도 있는데, 그곳에서도 충분히 자기 사역을 감당할 만한 영성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자신이 길러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리고 그는 인천제자교회의 제자훈련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했다. 이유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 약 10년 동안 제자훈련을 이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2014년에 장 목사는 다시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사실 장 목사는 10년 동안에도 넓은 의미에서의 제자훈련을 중단하지 않았다. 제자반을 모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제자훈련 토양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교회의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말이다.
교회의 어려움 때문에 벧엘성서교육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6개월, 1년짜리 성경 일독반을 진행했다. 분란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으면서도 제자훈련을 위한 토양 작업을 계속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노회에서는 제자훈련 포럼을 진행했다. 장 목사가 제자훈련 포럼 광고를 서기에게 부탁하니 부노회장이 “목사님은 아직도 그걸 하세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지금 거의 만신창이가 됐는데도 아직도 제자훈련을 하느냐고 묻는 거죠. 물론 저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제자훈련은 꼭 해야 합니다.”
부산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인천으로 이사 와서, 2005년 교회가 고난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을 때 인천제자교회에 출석하게 된 조세연 권사는 장 목사가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교회 성도들이 자꾸 떠나니까 좌절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변함이 없으셨어요. 너무 힘드실 것 같았는데도 비전을 놓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목사님의 마음을 잘 몰랐는데, 이번에 CAL-NET 전국 평신도지도자컨벤션에 가서 목사님이 <디사이플> 3월호에 쓰신 글을 보고서야 목사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어요. 목사님께서 ‘개척해야 한다. 편하게 목회하지 않겠다. 지금은 교회가 잘 되지 않더라도 다음 세대에게 교회를 물려줘야 한다’ 등의 말씀을 하실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팠죠. 저는 부산에서는 큰 교회를 다녔는데, 이 교회로 옮기면서 작은 교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작은 교회, 미자립 교회, 선교지에서 섬기시는 분들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됐지요.”
사실 제자반이 다시 시작됐지만 숫자로만 보면, 한 해 더 미루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1998년에 1기 제자반이 6명으로 시작했는데, 10년을 쉬고 2014년에 다시 시작한 제자반은 5명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한 명이 탈락해서 지금은 4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목사는 제자반을 대충 운영하려고 하지 않는다. 10년 만에 겨우 다시 시작한 제자반, 그것도 5명밖에 모이지 않는 제자반이지만 그는 훈련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끌고 가지 않는다.
현재 제자훈련을 받고 있는 구점선 집사는 제자훈련이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아서 힘들지만, 그것을 통해 받는 은혜가 크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제자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조세연 권사는 “제자훈련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으며,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제자훈련은 어떤 상황에서도 받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고백한다.
장 목사는 교회가 겪은 모든 어려움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면서도, 그것은 제자훈련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며, 어떤 어려움이나 비난이 있더라도 제자훈련 목회를 계속 하겠다고 말한다. “교회가 귀중하고 값지기 때문에 제자훈련은 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 저는 욕을 먹든 말든 제자훈련을 할 겁니다. 노회의 어떤 목사님이 제자훈련 포럼을 한다는 광고를 듣고는 제게 ‘목사님, 제자훈련을 통해서 가르치고 충성된 사람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는데 제자훈련을 왜 합니까?’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목사님이 제자훈련 포럼에 오셔서 강의를 들으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전화로 ‘목사님 제가 회개했습니다. 잘못 생각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진숙 사모는 교회의 어려움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만났다고 간증한다. “남편이 신학교 가는 것을 허락했을 때, 저는 이미 하나님 앞에 두 손 다 들었습니다. 부유했던 저희 가정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남편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잘 되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고, 우리의 단점과 어리석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제는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못 내려놓은 것이 있었던 거죠. 성도들이 떠나는 것을 보며 힘들어하기보다 남아 있는 분들을 바라보면서, 그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끝까지 지켜 준 동역자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이제 또 다른 분들이 훈련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조세연 권사는 교회의 아픔을 통해서 교회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전에는 그냥 교회가 있고, 나는 교회에 가서 예배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교회를 내가 얼마나 하찮게 생각했는지 깨닫고 크게 회개했습니다. 제자교회에 오고서야 비로소 시각이 바뀌었지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평신도를 세우는 교회로 쓰임 받을 것을 믿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지켜나가는 것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나 눈물과 기도 없이는 이 작은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깨달음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장 목사는 인터뷰를 마치며 사랑의교회와 국제제자훈련원을 축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는 사랑의교회를 예루살렘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교회가 어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끝까지 제자훈련 교회의 본부로서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합니다. 사랑의교회와 국제제자훈련원이 잘 돼야 합니다. 제자훈련 본부가 무너지면 교두보가 무너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터뷰를 마치면서, 지난 10년간 인천제자교회와 장대희 목사가 잃어버린 것은 오직 하나, 예배당 건물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눈물 흘리며 하나님 앞에 다시 일어서는 장 목사와 인천제자교회를 보면서, 사실상 그들이 예배당을 잃은 게 아니라 그것을 주고 더 귀한 것을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영혼을 사랑하고,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사랑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이 교회에서 길러지는 한, 그들이 받은 모든 상처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귀한 예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통해 이 땅의 상처 받은 성도들과, 고통 가운데 있는 교회들이 새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서리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