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제자훈련

2015년 07월

고구마 줄기 제자훈련 이야기

교회와제자훈련 박봉만 목사_ 경산 은혜로교회

“우리 교회는 모두 고구마 줄기입니다.” 내가 은혜로교회에 부임하던 해 수시로 들었던 말이다. 처음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막연히 ‘성도들이 고구마를 좋아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교회 성도들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었다.

 

첫 번째 과제,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된 성도들
우리 교회는 대략 60% 정도의 성도가 일가친척 단위로 구성돼 있다. 올해로 교회 설립 82주년을 맞이하는데, 오랫동안 한곳에서 대를 이어가며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많고 상대적으로 외부에서 온 교인들이 적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교회 내에서도 일가친척 단위의 ‘부족적 신앙’을 가진 그룹들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성씨가 같으면 연결된 집안이 있는지 한번쯤 의심해 봐야 한다. 한 사람을 이야기하면 관련된 사람들이 덩달아 연결된다.
또 친척 관계가 아니더라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이거나, 두 다리만 건너면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줄줄이’ 관계들로 서로 얽혀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고구마 줄기’인 것이다.
이런 고구마 줄기들이 제자훈련 할 때에는 큰 맹점이 된다. 어릴 때부터 아는 관계다 보니, 말씀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고 부끄러운 일이 된다. 과거 전적이나 부족한 모습을 아는 사람 앞에서 “나 이제 변화됐소!”라고 외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교회의 이 같은 특징을 보며 마음에 생겨난 질문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왜 함께 부르셨을까? 야고보와 요한을 왜 동시에 제자로 선택하셨을까? 같은 집에서 자란 형제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을 때, 그들을 제자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주님의 뜻이 완전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족들을 한데 어울려 놓아도 제자 삼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 주셨으니, 나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더 이상 의문을 달지 않았다.
교회에서 처음 남자들을 위한 양육훈련반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두 쌍이 형제이거나 친척 관계였다. 왠지 서로 서먹할 것 같아 반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에너지가 분산될 것 같아 한 그룹에 묶어 놓았다. 염려대로 처음 나눔을 할 때는 쑥스러워하며 서로를 의식하는 모습이 있었다. 이것이 내가 이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했던 첫 번째 과제였다.

 

두 번째 과제, 변화가 더딘 지역성
아마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거의 비슷한 사정일 것 같다. 그러나 그 안을 면밀히 살펴보면 지역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영남권이라도 부산 사람들은 성격이 직선적인 경향이 있다. 좋으면 그 자리에서 좋고, 나쁘면 그 자리에서 나쁜 티를 낸다. 그러나 우리 지역 사람들은 좀 다르다. 좋아도 면전에서는 거의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집에 가서 혼자 생각하고 혼자 좋아한다. 반응이 그렇게 느리다.
내가 처음 이곳에 부임해 왔을 때, 가까이 있는 선배 목사가 한 말이 늘 마음에 남아 있다. “박 목사, 이 지역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10년 후에 보면 틀림없이 변해 있을 거야.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멀리 보고 목회를 해야 해.” 제자훈련의 목표가 ‘변화된 삶’이라고 했을 때, 조급증이 심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열매를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속이 타’ 죽을 수도 있다. 말이 10년이지,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제자훈련을 할 때는 조급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론으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지교회를 맡아 담임목사로 서게 되면 교회를 빨리 부흥시켜야 한다는 조급증이 은연중에 생긴다. 가끔 내가 성도들 앞에서 스스로 위로하며 했던 말이 있다. “우리 교회는 돛단배가 아니라 큰 함대입니다. 비록 출발 속도는 느려도 한번 움직이면 멈추지 않는 큰 저력이 있습니다.” ‘큰 함대’라고 표현했기에 듣기 좋은 말 같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성도들의 느린 속도 때문에 속이 타 들어가고 있음을 애써 위안 삼아 표현했던 말이다.
가까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 목사도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지역은 제자훈련으로는 재미를 못 보는 지역이야.” 그때 고(故) 옥한흠 목사님의 주옥같은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달동네에 가더라도 제자훈련을 했을 것이다.” 목사님의 말씀을 내 목회에 실제적으로 접목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주위 이야기들은 내 마음을 어렵게 했다.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이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여기서는 제자훈련보다는 평이한 수준의 양육 프로그램들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결국 내가 제자훈련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이유는 “사람을 세우는 일은 지역이나 환경에 제한받지 않는다”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가 따라야 할 본질적인 목표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영혼’이라면, 모두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나는 제자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깊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응답은 이랬다. “영혼이 변화됨에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40년을 훌쩍 넘긴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변화돼야 할 것이 있는 네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성도들의 변화를 10년간 기다리는 것도 해 볼 만한 시간이 아닌가. 나아가 고구마 줄기라서 서로 너무 잘 알고 지내는 게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서로에게 더 숨김없이 자극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묵은 땅 기경하기
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붙들고 본격적으로 제자훈련을 위한 토양 작업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집중했던 일은 ‘단순한 삶’이다. 복잡하고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버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만 붙들게 했다. 당시 교회에는 매월 크고 작은 행사들이 계획돼 있었는데, 이런 행사들로 인해 겉으로는 교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제자훈련에 방해가 되는 교회 행사들을 하나둘씩 줄여가면서,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제자도’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그 다음은 성도들의 ‘영성’에 집중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묵은 심령을 기경하는 마음으로 두 달에 한 번씩 전교인 산상기도회를 했다. 교회의 전체적인 영성을 올려놓아야 제자훈련에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성도들의 호응이 좋았다. 처음에는 장년 위주로 참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전 교인이 참석하는 분위기가 확산돼 갔다. 요즘 전교인 산상기도회를 할 때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부모를 따라 산으로 올라온다.
제법 영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자 서서히 양육과정을 강화시켰다. 다행인 것은 기초적인 양육과정에 대해서는 앞서 섬겼던 목회자가 나름대로 토양 작업을 잘해 놓은 상태였다. 이전부터 성경대학이라든지 교리대학과 같은 양육 프로그램들이 체계적으로 잘 진행돼 왔기에, 기초 양육과정을 마친 분들이 많았다. 제자훈련이라는 단어도 별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후 양육 과정들은 예수 닮기를 위한 ‘자발적 선택’을 강조하며, 스스로 제자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구별해 냈다.
큐티는 전교인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여러 차례 가졌다. 개인적으로도 실질적인 D형 큐티 훈련을 위해서 ‘날샘 특별새벽기도회’를 한 달에 한번씩 1년간 지속적으로 가졌다. 또한 특새가 끝나는 금요일 저녁집회 시간에는 음식과 함께 ‘순별 큐티발표회’를 통해 특별한 나눔 시간을 가졌다.
‘바라는 것들’의 실제적인 모습도 필요했기에, 몇몇 제자훈련 모델 교회들을 탐방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 교회가 앞으로 제자훈련으로 변화될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뜻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모델 교회를 탐방한 당회원들과 리더들의 반응이 굉장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하나같이 제자훈련으로 변화될 은혜로교회의 미래를 그려보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드디어 제자반이 모집됐다. 1기의 중요성을 알기에 면담하며 신중을 기했지만, 교회의 특성은 역시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성도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이 바로 자신의 내면을 여는 것이었다. 처음 모임을 가졌을 당시에는 친척 혹은 지역 선후배라는 틀에 가로막혀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나는 다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무형의 법정(?)에 서야만 했던 그들의 형편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문제가 있어야 훈련이 더 잘된다
그러다 훈련을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났을 때 교회 내에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부임해 오기 전부터 당회와 교회 관리집사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그것이 관리집사의 은퇴를 앞두고 터진 것이다.
사연은 복잡하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당회측은 관리집사의 섬김이 맘에 들지 않았고, 관리집사측은 장로님들이 사람을 너무 부려 먹는다는 것이었다. 성도들 대부분이 고구마 줄기로 연결이 돼 있고 자신은 외지 사람이다 보니, 그의 마음에는 ‘외톨박이’이라는 외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오히려 문제 속에서 제자훈련이 진행된 것이 복인 것 같다. 문제를 바라보면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훈련을 병행하게 된다. 예비군 훈련 때보다도 전시 상황에서 총 쏘는 법을 가르치면 훨씬 더 잘 숙지하는 것과 같다.
훈련생들과 함께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주님의 방법인지를 고민했다. 관련된 말씀을 찾아보기도 하고 큐티도 했다. 당회를 위해 특별기도를 하기도 했고, 생활숙제로 관리집사님 가족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훈련생들 사이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 교회가 갖고 있던 고구마 줄기의 맹점과 지역적인 특성이 갖는 궁극적인 문제점들을 훈련생들 스스로가 발견해 낸 것이다. 어떻게 외부 사람들을 품어야 하는지, 어떻게 그들을 도우며 함께 어울릴 것인지, 어떻게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것인지, 우리 교회가 변화해야 할 요소들을 스스로 찾아내고 그 대안을 성경 안에서 고안해 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 내 무너졌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훈련생들은 말씀과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됐다.
훈련생들의 작은 변화는 이내 고구마 줄기를 타고 각 가정에 빠르고 힘 있게 전달됐다. 그리고 인맥으로 연결된 줄기들이 교회에 좋은 소문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효과적인 전도 도구로 발전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리도 변화될 수 있구나! 우리 교회도 달라질 수 있구나!”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삶을 공개하는 것이 어려웠던 성도들이 이제는 더 처절하게 자신의 옷을 벗는다. 일가친척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고, 서로에 대해 영적으로 더 깊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서로 중보기도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런 분위기가 주일까지 이어져 성도들은 만나면 영적인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목사님, 우리 교회 소그룹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 부족해요. 공간을 좀 더 만들어 주세요.” 예배가 끝나도 집으로 돌아갈 줄을 모르고 이곳저곳에 모여 말씀을 나누느라 정신 없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가 이곳을 변화되지 못할 곳이라고 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까지 한다. 제자훈련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볼 수 없었을 모습이다.
고구마는 대부분 척박한 땅에서 재배해야 모양이 예쁘게 나온다. 나는 제자훈련도 환경이 열악할수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목회 현장에서 깨달았다.

 

 


박봉만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M.Div.) 졸업 후에 미국 사우스웨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교육학 석사(MACE), 교육 목회학 박사과정(D.Edmin)을 수료했다.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 후, 현재 경산 은혜로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