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이기혁 목사_ 대전새중앙교회
지난 해 10월에 자부(子婦)를 맞았다. 두 남매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감정을 처음 경험해 보았다. 뭐랄까?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감정? 그리고 무한 책임감? 그런 것이다. 결혼이란, 부모를 떠나 둘이 하나 되는 시작인 것을 모를 바 아니지만 책임감으로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부모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아버지가 되고, 자식들이 그들의 자식을 낳으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우리는 할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부모의 리더십은 또 다른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아들이 부탁한 주례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주례를 부탁했다. 내심 싫지는 않았지만 결혼식이 다가오면서 적잖은 부담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넌지시 주례를 모시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들은 단호했다. 저희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주례를 부탁하기로 일찍부터 결정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닮고 싶고,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는 말에 오히려 내가 격려받은 셈이 됐다. 잘해준 것도 없었는데… 오히려 자식들 보기에 미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자식이 애비에게 주례를 받고 싶다는 말이 쑥스러웠지만 가슴속은 조용하게 출렁였다. “주님, 여전히 함량미달인 부끄러운 아버지일 뿐입니다.”
부모의 가혹함을 발견하다
20년 전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가정사역세미나에 참석했다. 이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허락하신 것에 대한 감사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새삼, 우리 부부가 자녀들에게 얼마나 올바르지 못했는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목사의 자녀라는 이유로 바르게 자라야 했고, 언제나 거짓과 타협하지 않도록 정직을 강요했다. 둘밖에 없는 남매가 서로 우애하며 사랑하기를 가르쳤다. 열심히 공부해서 우등생이기를 요구했다. 더욱 예배에 관한 한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다. 선친(先親)께서 한학을 공부하신 선비이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보고 배우고 자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비의 기품을 흠모하고 있었던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게다. 물론 성경적 교훈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이면 가정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사랑도 듬뿍 받으며 자랐지만 자연스럽게 어르신들로부터 무형의 교육적 영향도 받았다.
그런데 그 그늘 속에 감춰진 ‘부모의 가혹함’이 우리 부부에게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교훈이라는 미명하에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가혹함이 상처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며 우리 부부는 밤이 깊도록 하염없이 울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상급이요 기업으로써 귀한 자녀를 우리 부부에게 맡겨주셨는데 우리의 욕심으로 아이들에게 감당 못할 짐을 지어주며, 그들의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편지를 쓰다
아이들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를 써내려갔다. 사랑하면서도 때로는 가혹했을 순간들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뉘우치며 후회하는 내용이다. 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자국이 얼룩졌다. 그것은 우리 부부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엄마 아빠가 잘못했음을 고백했고, 우리 모두는 함께 울며 기도했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이전보다 훨씬 깊은 친밀감이 더해갔다.
그 후,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춘기에 접어들어 힘든 시기를 보낼 때마다 매일의 가정예배 외에 특별가정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자녀들을 세워가셨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는 늦은 시간 혹은 주일 저녁 시간에 함께 둘러앉아 찬송을 부르고 성경말씀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눈 후 돌아가며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 시간에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하셨음을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은 그 시간, 눈물에 젖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만지셨다. 때로는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적도 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서로 안아주며 축복하고 사랑을 표현했다. 부흥회가 따로 없었다. 그것이 부흥회였다. 그렇게 청소년의 사춘기라는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때로는 뜬금없이 학교로 편지를 보냈다. 사랑을 가득 담은 편지를 보내면서 아이들을 격려하고 축복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그 모든 편지와 쪽지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가족의 성장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 가정 안에서 진정한 가장(家長)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가 주님 앞에서 받은 은혜를 통하여 회개와 회복의 삶을 추구하도록 인도하셨다. 아버지로서의 권위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의견이 엇갈려서 불편한 마음을 가졌더라도 털고 갈 수 있는 기회를 항상 주셨다. 특히 이 모든 과정에서 아내의 역할이 컸다. 아내가 아니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들이 허다하다. 부자 사이의 간극에는 언제나 아내가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다. 서로의 생각을 거침없이 나누면서 서로의 사랑을 느꼈고, 비록 갈등하더라도 대화를 통하여 그 간격을 좁혀보려고 시도했다.
가훈이랄 것까진 없지만, 우리 가정에는 ‘섬김과 배려’라는 교훈의 두 기둥이 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명기 6장 4절은 우리의 변하지 않는 계명이다.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언제든지 가던 길을 멈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감동은 지체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을 자녀들이 안다. 때로 교우들로부터 원치 않는 아픔을 겪었을 때에도 우리의 방향은 뒤틀리지 않았다.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우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안다. 어려서부터 보았고 성인이 된 지금도 동일하다. 좋은 것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나눔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배웠다.
물론 우리 가정은 특별하지도 않고 더더욱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허점투성이다. 우리의 모든 가정이 그렇지 않은가? 다만 우린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이로써 서로에게 중요한 가족임을 잊지 않는 기회로 삼는다. 좋은 것은 서로 거침없이 나누고 공유한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상대가 안전하고 평안하다면 배려하는 것을 배우며 실천한다. 축하할 일은 기꺼이 마음을 다해서 축하해 주고, 아픔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함께 아파한다는 것이 우리 가정의 문화다. 가정 안에서 사랑을 배우고, 가정 안에서 섬김을 배운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장해간다.
아버지 리더십의 중요성
가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교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초기 기독교의 출발도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의 가정으로부터 출발했다. 가정을 소홀히 다루면 교회의 기초가 부실해진다. 건강한 가정들이 모여서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에서의 부모의 리더십은 결정적이다.
현대 정통 유대인의 가정은 4,000년이 넘도록 토라(Torah)를 지키는 데 흔들림이 없다. 세대 사이에 막힘이 없다. 그러면서도 소중한 역사적 유산을 흐트러짐 없이 간직하고 있음은 현대 교육에서 유대인의 가정을 예의주시하는 이유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빚어낸 작품이다. 신명기 6장 4절, “이스라엘아 들어라”로부터 시작되는 ‘쉐마(Shema)’의 실천이다. 쉐마는 절대 순종을 의미한다. 순종은 권위로부터 나온다. 권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자발적인 순종을 가져온다.
가정에서 부모의 리더십은 자녀들에게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도록 훈련하는 일이다. 낳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성인이 되도록 훈련하고 양육해야 한다. 가정을 잃는다는 것이 곧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맞다면, 오늘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자녀양육에 실패한 가정은 힘을 잃는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감독은 자녀를 잘 양육한 자라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딤전 3:2~4) 바울은 단호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며느리를 맞으면서 그 책임감이 더욱 무거워져 옴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할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손자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과 가치관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삶으로 보여주는 교훈이 강한 힘을 갖기에 내 언어와 행동에서 흐트러짐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나이는 더해 가는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내가 계속 성장하지 못하면 우리 가정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 뻔하다.
열국의 아비가 되라
어디 그뿐인가? 교회 안에는 수많은 자녀들이 있다. 아직 유치부에 들어가지 못한 영아부 아이들부터 유치부, 유년부, 나아가 대학부까지 아이들에게 나는 아버지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목사로서의 리더십’보다는 ‘아버지로서의 리더십’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에게 우리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
이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존귀한지 모른다. 이 아이들은 친자식들처럼 내게 매달린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적지 않은 아이들의 가정이 건강한 아버지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메마르지 않는 사랑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기를 기도한다. 아픔이 있는 아이들은 보듬고, 힘에 겨워하는 아이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때로 배곯는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도 주어야 한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시고, 우리에게 그 사랑의 공동체를 본받으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모름지기 교회란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양육함으로 교회 안에서의 존재감을 갖도록 추구해야 한다. 교회는 구원만이 목적이 아니다. 성도들을, 아이들을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나가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순종을 훈련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의 절대순종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그래야 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미분화된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기능적으로만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 역할을 하는 기능, 어머니 역할을 하는 기능, 남편으로서의 기능, 아내로서의 기능. 그러나 이렇게 사회구조를 기능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기능이라면 인격적 관계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기능적 사회’는 붕괴를 촉진시키는 요소를 만들어낸다. 기능으로 이해하는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가능해진다. 굳이 여자가 아니어도 아내 역할을 하기만 하면 된다.
지금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실종된 시대라고 탄식한다. 가정도 교회도 기능이 아니다. 인격적 관계로 형성된 ‘살아있는 공동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가정이 그 현장이다. 이것이 가정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다. 90이 다 되신 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두 남매와 함께 개척을 시작했을 당시에도 우리는 목회만큼이나 가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도무지 피해갈 수 없는 부모로서의 부르심 때문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이기혁 목사는 침례신학대학교와 개혁신학연구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과 미국 Fuller신학교(D. Min.)를 졸업했다. 현재 대전 새중앙교회와 대전 CAL-NET 대표로 섬기고 있다. 2010년 <문학사랑>에서 수필부분, 신인작품상으로 문단에 등단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