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창의적 접근 선교지역에서도 빛을 발하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자유롭게 사역할 수 없는 곳, 그래서 선교활동을 펼치기에는 위험부담이 많은 곳이 아직 이 지구상에는 많다. 이러한 지역을 ‘창의적 접근 선교지역’이라 부른다. 이러한 지역에 복음을 안전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전파하려면, 소그룹 훈련으로 현지인들을 생산력 있는 제자로 키워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생산력 있는 제자를 양육하게 하고 자체적으로 번성케 하는 제자훈련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이는 현지 선교사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이 창의적 접근 선교지역에서 제자훈련 사역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선교사 부부가 있다. 바로 주반석, 이예향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이 부부가 10년 동안 현지에서 펼친 선교활동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이뤄질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태반이다. 그 무궁무진한 이야기 중, 빙산의 일각을 지금부터 엿들어 보자.
하나님께서 선교사의 삶으로 부르시다
강원도 춘천시 성도교회에서 함께 청년부 활동을 했던 주반석, 이예향 선교사 부부는 결혼과 동시에 주 선교사가 신학에로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총신대 신대원을 다니는 동안 선교동아리 CMF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방학마다 선교사 준비과정인 MTI 훈련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89년 홍콩, 태국, 필리핀 등지에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마음에 갈등을 겪었다.
열대지역에서 선교하는 이들을 보면서 ‘내가 과연 저런 숨 막히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선교사로서 특별히 소명 받은 것도 없는데, 내가 선교사로 나갈 수 있을까’하는 고민들이 밀려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이런 고민들을 안고 큐티를 하던 중 “선교는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그 후부터 단 한번도 선교에대한 비전을 바꾸지 않고, 모든 훈련에 열심히 참가하며 착실히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이후 용인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며 대학부, 고등부를 맡아 CCC와 네비게이토 자료를 사용한 제자훈련으로 2년간 맡은 부서의 부흥을 경험했다. 이후 그는 인천 K교회에 선교사 후보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이 교회에서도 2년간 청년부, 소년부, 교사 제자훈련을 통하여 1년에 배로 부흥시키는 경험을 하며, 제자훈련에 점점 매력과 자신감을 느껴갔다. 그는 “교회학교 교사들이 제자훈련을 통해 변화되고, 그러한 교사들과 함께 일하니 교회학교 부서의 질적, 양적 부흥은 저절로 따라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세 번의 인증을 받고, N시로 향하다
주 선교사는 2년 후인 95년 초 인천 K교회의 주 파송과 사랑의교회의 협력후원을 받고 창의적 접근 선교지역인 S국의 내륙에 위치해 있는 N시로 들어갔다. 그가 선교지를 N시로 정하기까지에는 세 번에 걸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93년에 현지 국가를 한바퀴 돌며 답사한 후, 유난히 인상에 남았던 도시가 N시였다. 또한 파송교회 목사와 장로들과 94년 말, 현지 국가 답사를 하는 도중 김포공항에서 우연히 N시에서 온 노부부를 만나 그곳의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답사 중 S국 선교 전문가들을 만나 브리핑을 들으면서 N시가 속해 있는 지구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온 몸에 열기가 느껴지며 가슴이 뛰는 경험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N시로 들어간 그는 단 한번의 이동도 없이 그곳에서 1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밀고 나갈 때, 그분께서 직접 진행하시는 것을 매번 느꼈다”고 고백한다. 정부의 감시가 심한 현지에서 하나님께서는 감시원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외진 곳에 위치한 집을 마련해 주셔서 소신껏 소그룹 훈련을 할 수 있었으며, 아내 이예향 선교사와 세 자녀도 문화적 충격을 느끼지 않고 현지어를 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제자훈련, 꼬리를 물고 사람이 몰려오다
2년간의 수습기간이 끝나갈 무렵, 주 선교사는 사도행전을 큐티하며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고, 빌립이 이디오피아의 간다게를, 바울이 간수장을 만났듯이 준비된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공개적인 전도가 불가능한 그 지역에서 이미 준비해 놓으신 영혼을 만난다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때 S국 모 대학의 영문과 학생과 중학교 교사를 만나, 먼저 교제를 통해 친분을 쌓은 뒤, 방학을 이용해 단기반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숙식하며 양육했다.
교리와 생활 편으로 나누어진 현지어 교재로 밤낮을 같이하면서, 훈련생들은 구주를 영접하게 됐고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됐다. 이때 그는 사역언어에 대한 진보와 현지인 제자훈련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 훈련 후 중학교 교사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훈련을 받은 대학생 형제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변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이 그에게 왔다. 일주일에 20, 30명의 훈련생을 4팀으로 나누어 제자훈련을 하며, 그는 그때 너무 행복해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표현한다.
98년도에는 제자들이 정부의 조사를 받았다. 주변에서는 N시를 떠나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쫓겨나지 않았다는 간증을 하게 해 달라’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기도응답으로 조사가 그에게까지는 미치지 않았으나, 제자훈련은 잠시 멈추었다. 위험한 파도가 몰려 올 때는 잠시 엎드려 파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창의적 접근지역 선교의 한 전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는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다가 벽에 부딪쳤을 때는 절망이 아니라, 방향 전환하라는 신호일 뿐이다”고 말한다. 현 거주지에서 제자훈련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그는 한 지하교회 지도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다른 선교사들과 한 팀을 이뤄 광활하게 번성되고 있는 지하교회들을 순회하는 사역을 6개월간 했다. 고산지대에서 숙식을 하며 가르쳤던 그는 심각한 허리 병으로 쓰러졌고,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게 됐다.
CAL세미나 받고, 제자훈련의 소명을 다시 받다
안식년 동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의사가 절망적인 선고를 내렸던 허리 병의 완치를 받고, 44기 CAL세미나를 부부가 함께 받았다. 세미나에 참가하는 동안, 현지에서 제자훈련을 하면서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을 체크하게 됐다. 그는 “가장 몰랐던 부분은 사람을 훈련해 키웠으면 사역의 장을 열어 그들도 또 다른 제자를 키우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했었는데, 그것을 못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즉 키운 제자를 사역자로 만들지 못했기에, 기관의 조사가 시작되자 훈련이 멈추게 되고 훈련받은 20, 30명이 조직화되지 못해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 |
세 명의 제자가 140명으로 번성하다
현지 언어 습득, 제자훈련, 지하교회 순회사역으로 1기 사역에서 선교사역의 터를 닦은 주 선교사는 2기 사역을 제자훈련 사역에 집중했다. 2기 사역 초기 3명으로 시작된 제자들이 5년이 지난 현재 사역훈련을 마쳤거나 마쳐가는 제자들이 대부분이며, 각자 또 다른 제자를 양성해 현 거주지에서만 30명이 배출됐다. 생산력 있는 그들이 전도, 훈련 사역을 하여 자체적으로 140명이 모이는 지하교회를 세웠고, 제자훈련 마인드의 기초 위에 교회가 든든히 서 나가고 있다.
교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젊은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의 절대 다수가 현재 제자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역동성 있는 분위기로 인해 교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암암리에 소문이 나고, 현재 나날이 급팽창해서 비밀리에 모이는 지하교회로서는 덩치가 너무 커져 정부에 드러날 위험에 처해 있다. 위험부담을 안은 즐거운 비명이었다.
S국 정부에서는 20명 이상의 집회를 허락하지 않아 교회를 두 개로 나누는 한편, 15~20명 단위의 세포교회를 조직해 지혜롭게 모이고 흩어지면서도 제자훈련 시스템의 틀 안에서 하나로 결속되어 가고 있다. 이제 제자가 제자를 낳고, 그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낳아 영적계보 4대가 한 집에 사는 가족적인 교회가 됐다고 한다.
제자훈련 코스로는 기초 양육교재로 교리편 3개월, 생활편 3개월을 한다. 중급과정으로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교재로 1년, 고급과정도 사랑의교회 사역훈련 교재와 전도폭발로 1년 6개월을 한다.
주 선교사는 “양육에서부터 한 사역자로 세워지기까지, 3년의 세월 동안 한 영혼을 매주 한번씩 소그룹 안에서 꾸준히 만나 양육해야 한다”며 “이 점이 제자훈련의 가장 어려운 점이자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앙바탕이 전혀 없는 무신론 국가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현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으나, 3년 동안 매주일 개인적으로 만나 정에 의한 관계가 끈끈해져 제자와의 결속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며 “현재 한 식당 건물을 빌려 자체 예배를 드리며, 헌금의 30%를 세계선교를 위해 따로 떼어 지원하고 있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들 지하교회들은 정부에 등록하면 정부교회에서 파송한 사역자의 지도를 받게 되고, 재정관리도 귀속되기 때문에 등록을 못하고 여전히 지하교회로 남아 있다. 지하교회는 언제든지 발각되면 심각한 처벌이 따를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가 2차 안식년을 맞이한 현재 제자훈련 받은 한 형제가 전임사역자로 세워져 그의 사역 아래 계속 자체적으로 제자훈련을 해나가고 있다. 그는 S국의 종교적 제한 속에서도 이들이 안전하게 성장해 갈 수 있도록 한국 교회의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현지 교회 목회자반·찬양학교 제자훈련을 인도하다
현지 국가에 L시 지구라는 경기도만한 크기의 인구 약 4백만에 가까운 지역이 있다. 2002년 주 선교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 지역을 총감독하고 있는 목회자 한 명을 만나게 됐다.
정부교회에 속해 있는 목회자였지만, 체험있는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열려 있는 목회자였다. 그 목회자를 중심으로 그 지역 목회자들로 남 목회자반, 여 목회자반으로 제자훈련반이 구성됐다. 주 선교사는 이들 남녀 목회자 13명을 2002년 9월부터 3년 동안 훈련했다.
L시 지구 정부교회 목회자들은 모두 합쳐도 13명이 전부다. 이처럼 현지 교회의 지도자 수는 늘어나고 있는 신도수(현 1만 명 이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주 선교사 부부는 격주로 5시간 버스를 타고 내려가, 그 다음날 2주일 분의 내용을 오전, 오후에 하고 밤늦게 거주지로 돌아오기를 약 3년간 했다. 격주로 만나기에 일상생활의 교제가 부족해 삶의 나눔에 한계가 있고, 거리와 경비 한계로 격주로 두 과를 함께 다루기 때문에 제자훈련 원형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수고로 현재 목회자들의 의식이 제자훈련 마인드로 바뀌어 평신도들을 제자훈련해 좋은 열매를 맺고 있어, 현지 다른 지역 정부 교회와는 많이 달라진 상태이다. 주 선교사는 앞으로 종교활동의 자유가 주어지면, 이 지역 교회를 제자훈련 마인드로 깨워 ‘제자훈련센터’와 현지 국가의 ‘사랑의 교회’로 성장할 비전을 갖고 기도중이다.
또한 주 선교사 부부는 현 주거지인 N시에 있는 경배와 찬양지도자학교 학생 27명을 2004년 초부터 제자훈련하고 있다. 현지 신학교를 졸업한 한 쌍의 부부 전도사가 주 선교사 부부가 제자훈련 하는데 도전받아, 자신들이 경영하는 찬양학교 학생들의 제자훈련을 부탁해 왔다. 이 학교는 피아노, 성악, 지휘법 등을 3년 코스로, 현지에 교회음악지도자를 배출하는 학교이다. 마침 영적 지도력을 갖춘 음악지도자 배출의 필요성을 느꼈을 때, 주 선교사 부부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음악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제자훈련을 받게 되고, 이들이 고향 교회로 돌아가서 교회 찬양과 성가대를 이끌며 영적 지도력을 발휘할 일꾼들이기에 훗날의 열매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현지에 맞는 제자훈련이 필요하다
주 선교사 부부는 그 외에도 현지 학교 신학생 제자훈련반, 부녀제자반 등 여러 팀을 인도하고 있다. 그는 “신학생 한 명의 마인드가 깨어날 때, 현지 교회 하나가 주님의 기뻐하시는 교회로 태어날 것이기에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말씀으로 섬겨왔다”고 겸손해 했다.
주 선교사 부부는 지금 현재 섬기고 있는 네 가지 형태의 제자훈련 사역(지하교회, 정부교회, 경배와 찬양 지도자학교, 신학생)이 현지에서의 제자훈련 모델들로 각각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이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교전략임을 확신하는 가운데 즐겁게 사역하고 있다.
이같이 주 선교사 부부는 하루도 쉴 틈 없이 제자훈련 스케줄로 꽉 묶여 있다. 주 선교사는 한 주일에 현지인 제자훈련팀 6조, 유학생팀 1조, 자녀팀 1조를 인도하며 한인교회의 예배까지 인도하고 있다. 아내도 일주일에 현지인 제자훈련팀 4조를 섬긴다. 실제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 있으며, 그것이 제자훈련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그는 “사랑의교회의 원형대로 한 팀도 있고, 환경과 거리상 현지 사정에 맞게 조정하기도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닮은 작은 예수로 훈련시키려 몸부림쳐 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S국에서 제자훈련이 정착되기까지는 아쉬운 점도 많다. 먼저 특강 자료와 독서물, 다락방 교재 번역이 시급하다. 현지 교회 일반 성도들의 학력이 낮고 문자자체의 어려움으로 훈련 속도가 느린데, 현지 교회에 맞는 제자훈련과 다락방 운영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그는 “선교하다 발각되면 기관으로부터 간첩죄로 처벌받기에 늘 신변보호에 조심하지만, 사역의 진전을 위해서는 두려움의 영을 떨치고 과감하게 전진하는 것도 필요하다”며 “주님의 보호하심을 위해 한국 교회가 기도해 줄 것”을 거듭 당부했다.
이 부부의 10년 선교 사역은 탄탄대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의 신변상 위험이 있었고, 선교기간 동안 사랑하는 아들을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 아픔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천국행을 통해 말씀에 영권을 더하셨고, 현지 교회 제자들이 더욱 굳게 세워지며 복음전파의 열매가 놀랍게 성장하는 기회로 사용하셨다. 그는 “아들의 뼈를 현지에 묻으면서, 나 자신의 뼈도 현지에 묻히기를 소원한다”며 목숨 바쳐 현지인들을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주 선교사는 “한 선교사가 현지어로 일주일에 6번 제자훈련 팀을 이끈다는 것이 실제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그러나 동역하는 선교사도 없는 실정에서 눈앞의 훈련 대상자들을 방치할 수도 없어 온 힘을 다해 뛰었을 뿐이라며, 제자훈련 마인드를 가진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많이 들어와 함께 사역을 나눴으면 한다”고 바람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주 선교사는 “이제는 배낭에 성경과 제자훈련 교재만 넣고 현지인이 살고 있는 그 어느 지역에라도 낙하산처럼 떨어진다해도, 제자훈련 사역을 즐겁게 감당할 준비와 자신감이 생긴 것, 무엇보다도 두 부부가 조금씩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어 감사할 따름”이라며 욕심 없는 미소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