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한국 교회를 대표할 만한 선교사로는 누가 있을까 하고 떠올려보면, 제일 먼저 스치는 얼굴이 있다. 바로 한정국 선교사다.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옥한흠 목사의 제자로서 네 번째 <디사이플> 제자행진의 대열에 가세한 주인공이다. 3시간 가량 진행된 그와의 인터뷰에서 제자훈련이 또 한 명의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로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어려워하면서도 동경하는 ‘선교 분야’였다. 옥한흠 목사가 대학부 시절 유일하게 ‘신학교에 가라’고 권유했던 제자가 바로 한정국 선교사였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제자훈련이 그의 삶을 어떻게 인도했는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아직도 그가 꾸고 있는 한국 교회 선교 비전 이야기들까지 들어보았다.
복음을 스펀지처럼 몸에 흡수하던 신앙초기
서울 왕십리 개발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가난의 현장을 목격하며 자랐다. 그래서 장래희망이 정치가가 되는 거였고, 학교도 서강대 경제학을 선택했다. 그런 그가 서울사대 부속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 총무를 맡으면서 당시 기독학생회 회장이던 지금의 한인권 장로를 만나게 됐다. 서로 봉사회 일로 접촉하면서 친분을 유지하다가 방황하던 한정국 선교사를 한인권 장로가 대학교 1학년 때 성도교회 대학부로 인도하면서 미래 선교사 한 명이 태어나게 된다. 복음을 듣고 평안함을 느꼈던 그는 당시 10명 정도 모였던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옥한흠 목사를 만나 말씀의 단맛을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 스승인 옥한흠 목사가 칠판에 적어가며 말씀의 요점만 딱딱 집어 가르쳐주곤 했는데, 갓 예수를 믿었던 그는 뭐든지 열심이던 기질 탓에 말씀을 마치 스펀지처럼 몸에 빨아들였다. 이때 드렸던 예배와 말씀들은 그의 신앙의 뼈대를 형성하게 됐다. 제자훈련 숙제를 내주면 순수하게 모두 암기하고, 실천하려 노력했다. 성경전체의 흐름을 각 주제별로 용지에 메모해 그대로 암기할 뿐만 아니라, 1년도 안 되어 성경전체를 일독했다. 그러니 신앙성장이 다른 이들보다도 빨랐던 것은 당연했다.
선교단체 제자훈련 활동으로 갈등하던 시절
1972년 조그만 수양관 방안에서 치러진 성도교회 대학부 겨울수련회에서는 깊은 회개가 참석한 청년 전체에 일어났다. 이때 옥한흠 목사는 다른 프로그램 없이 오직 말씀만 전했는데, 참가한 모든 청년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 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며 마음껏 펑펑 운 ‘눈물의 순련회’였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이후 대학교 2학년 때 그는 네비게이토 활동에 빠졌는데, 서강대 근처 아파트에서 공동체생활을 하기도 했다. 네비게이토선교회 집회 때는 선교에 대한 부름을 받기도 했다.
이때 선교회로부터 교회로 옮겨 사역할 것을 주문 받았을 때, 그는 옥 목사를 찾아갔다. 그때 옥 목사의 조언은 교회와 선교단체 간의 갈등 역사와 교회의 중요성, 그리고 선교단체 제자훈련의 맹점에 관한 것이었다.
즉 집을 떠나 아파트생활을 하며 캠퍼스 복음화에 헌신한다고 했지만, 정작 가정을 소홀히 한 점 등을 깨달은 것이다. 옥 목사는 한쪽으로 치우친 그의 신앙을 짚어줬다. 그는 네비게이토 제자훈련은 기술과 효과적인 방법을 지녔고, CCC는 친교와 기도, 전도하는 열심이 있었으며, 성도교회 대학부 제자훈련은 친밀감과 사랑, 그리고 인간미가 넘쳤다고 구분했다.
그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은 정감과 본능적인 사랑이 있었고, 복음과 세상 간의 균형 감각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조언해 주는 옥 목사의 방식이 모든 것을 가르쳐주기보다는 뒤에서 코치해 주는 지금의 ‘코칭 스타일’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는 몰랐지만, 선교사로 나섰을 때 자신의 신앙의 뼈대가 이때 이뤄졌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선교에 남다른 열정을 지녔던 대학부 시절
그가 교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대학부 내 방선기 목사, 한인권 장로, 박성남 전도사, 이경준 목사, 김병재 변호사 등이 주름잡고 있던 시절이다. 양자 선택의 입장에서 교회를 선택한 그는 대신 서강대 CCC창단 멤버로 활동을 병행했다. 당시 대학부 전체가 임원화 됐는데, 그는 선교부장을 맡았다. 73, 74년도는 성도교회 대학부가 대부흥을 이뤘는데, 이때 선교부를 맡아 전도의 결실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대학부 청년들을 이끌고 빌리 그레엄 선교대회나 엑스폴러 선교대회에 참여하는 등 마치 파도가 칠 때 같이 파도를 타야 멀리 나가듯이 대학부내 선교의 바람을 일으켰다. 스스로 바람 잡는 은사 즉 ‘선동의 은사’ 하나만큼은 뛰어났다고 평가하는 그는 청년들을 선교관련 집회로 자주 인도했다. 그래서 당시 별명이 ‘사도 바울’이었다고 한다.
대학부 청년들은 성도교회를 세계적인 모델교회로 만들려고 했다.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의견을 내면 반대가 없었다. 서로 격려하는 친구들이 그저 좋았다. 옥한흠 목사에 비해 작은 리더십이었던 방선기 목사. 그는 결코 주장하는 리더십이 아닌, 옥 목사를 존경하고 메시지를 전하며 후배들이 역할분담을 하게끔 분위기를 만들었다. 훗날 옥 목사가 유학 가자 그를 중심으로 구심점이 만들어졌다. 또 영원한 총무였던 박성남 전도사는 재치 있게 참모 역할을 했으며, 주보사를 담당하며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던 박성수 회장, 홍보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한인권 장로, 그리고 선교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던 그까지 5명 모두가 각자의 은사를 인정하며 조화를 이뤘다. 이러한 팀워크는 성도교회 대학부 부흥의 원동력이 됐다.
인간미 넘치는 초대교회 공동체 분위기
당시 성도교회 대학부는 마치 초대교회처럼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 분위기가 강했다. 여기에 옥한흠 목사의 비공식적이며 비형식적인 교육과 방목하는 듯한 코칭 스타일이 만나 상승작용을 했다. 때론 청년들이 교회에서 긴 책상을 붙여놓고 이불을 덮고 자며 밥도 해먹지만, 옥 목사는 그런 청년들을 막지 않았다. 공동체성이 강화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특출 나게 보이지 않도록 학업관리에도 신경 쓰도록 조언했다. 이런 모습이 교회 어른들로부터 인정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저 너머를 보는 혜안이 옥한흠 목사님에게 있었다”며 “늘 솔직하면서 담백했던 그분의 방목이 체계를 갖고 시작했다기보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그분 안의 좋은 것들을 형식과 절차 없이 청년들에게 쏟으셨다”고 말했다.
불교집안 가족들을 14년 만에 주님 품으로
한정국 선교사는 인도네시아 선교사로도 유명하지만, 가족을 모두 전도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는 복음의 참 기쁨에 빠지자, 성탄절이나 신년예배 때 가족들이 모두 긴 의자에 앉아 함께 예배드리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무속신앙이 강한 불교집안으로, 그에겐 오랜 기간 동안 가시노릇을 했었다. 그의 가족들은 대놓고 그를 “미친놈” 취급을 했다. 형은 “거꾸로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식사기도를 하던 그에게 아버지는 머리를 세차게 때렸다. 그러니 네비게이토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영어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고, 성경은 신문지로 싸들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큰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은근히 그가 마음을 돌이켜 사업의 대를 잇기 바랐다. 하지만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자 그런 기대마저 산산이 조각났던 아버지는 모든 게 무너졌다는 표정으로, ‘다시는 내 집에 오지 말라’고 그에게 명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역시 냉랭하다가 소천하기 3년 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를 불러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거 같다”며 “형제들 중 네가 가장 평안해 보인다”며 가족들 곁에서 평화를 가져다줄 것을 권하고 본인도 예수 믿기를 시작했다. 이후 14년 만에 형제들이 하나둘씩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복음화는 먼 친척들에게까지 번졌다.
어느 해 연말 깊은 밤 12시 인도네시아 선교지에 있을 때였다. 미친놈이라 욕했던 형이 사랑의교회 서리집사로 임명받자 그에게 전화를 했다. “잠이 안 온다. 이 기쁜 소식을 너에게 가장 먼저 전해주려고 전화했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고마움과 기쁨을 전했다. 그때 그는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한정국 선교사는 가족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을 글썽이며 가족들에 대한 애정과 예수님 품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은혜에 대해 감사해했다.
신학교에 진학하며 다시 태어난 삶
5년 반 동안 종합무역상사와 미국회사의 서울지점장으로, 성도교회 재직회 부서기로서 30세까지 열심히 봉사하던 그는 선교사로서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아내와의 불화가 씨앗이 됐다. 아내 역시 대학교 4학년 때 선교에 대해 도전받았지만, 그가 선교와 사역을 위해서는 가정은 희생될 수도 있다며 치우친 제자훈련에 열심을 내자 그만 폭발해 버렸다.
부부싸움 끝에 아내가 ‘이혼하자’라는 말을 하자, 충격을 받은 그는 한울산기도원에 3일 동안 기도로 매달리며, 예수 안에서 또 한번 새로운 삶을 결단했다. 덤으로 사는 삶이라 생각한 그는 합신 신대원에 들어갔다. 그는 사실 대학교 3학년 때 옥한흠 목사로부터 ‘신학교에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옥 목사는 세상 속에서 평신도들이 은사 받은 대로 쓰임 받길 원해, 간혹 뜨거워진 청년들이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만류했다. 그런데 유독 그에게만은 신학교에 가라고 권유했다. 물론 그때 그는 평신도전문 선교사로서 남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그 권유가 7년 후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합신 신대원에서 강의 중이던 옥 목사와 다시 만나게 됐다. 그때 그는 옥 목사가 가르친 ‘제자훈련과 전도학’이 총정리되면서, 선교의 뼈대를 이룰 수 있게 됐다고 뿌듯해했다. 『평깨』 책을 먼저 내고, CAL 세미나를 연 옥 목사에 대해 그는 목회가 아닌 사업을 해도 잘하셨을 분이라고 평했다. 대학부 시절에도 타 교회에 대학부를 공개할 정도로 이벤트에 대해서도 탁월했으며, 교회 제자훈련 체계를 잡는 데 세례요한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평했다.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미전도 종족선교 눈뜨기
그는 신학교를 다니며, 남서울교회 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했다. 이미 제자훈련을 통한 신앙의 뼈대와 논리적 구성, 사람에 대한 관심은 옥한흠 목사로부터 영향 받았던 그는 이때 역동적인 설교 스타일과 실수를 용납하는 마음을 홍정길 목사로부터 영향 받았다고 한다. 남서울교회에서 3년 반 사역한 그는 목사안수를 받자마자 OMF 선교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1년 전 인도네시아 칼리만타섬(보루네오섬)에서 사역한 일본인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난 거기만큼은 못 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85년 12월 OMF 지도자들이 바로 그 섬으로 그를 파송키로 결정했다. 순종하기로 결정했지만, 비자추천 허가가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상 밖 문을 여셨다. 인도네시아 기독교대학(UKI) 경제학 교수로 그를 쓰신 것이다. 그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것이 전문인 선교사 자격에 맞고, 인도네시아 내 교수요원 부족 문제와도 맞아 떨어지자 비자가 금세 나오게 됐다. 그는 이곳에서 경제발전론과 국제경제학을 6년간 인도네시아어로 가르치며, 이 대학 내 IVF와 CCC와 함께 대학생 선교사역을 했다.
또 주말에는 순다족속교회에 출석하며 뒤늦게 ‘족속’의 개념을 깨닫고, 선교 현장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미전도 족속에게로 가서 제자훈련 해야 함을 자각한 것이다. 순다족 교단은 성도 수가 2만 3천 명에 달하는데, 그는 주말교회 개척사역과 특별 목회사역을 하며 선교 안목이 떠졌다. 이미 균형 있는 제자훈련을 터득한 그는 현지인 제자훈련에 재미를 붙여 나갔다. 그를 통해 수많은 현지인들이 예수의 제자로 세워져갔다.
선교 연합사역 이끌며 세계선교에 도전
이후 그는 90년 싱가폴 타문화권 선교훈련원 원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섬기다가, 92년 한국의 첫 OMF 대표직을 맡게 된다. 또 동시에 사랑의교회 선교목사로 9년을 섬겼다. 현재 그는 총신대 선교대학원에서 선교학을 강의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목회가 아닌 선교분야에서 제자훈련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선교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길 소망한다. 이름을 거론하면 알 만한 후배 선교사들을 많이 배출한 그는 선교계에서도 스타를 만드는 게 꿈이다. 또 합신 총회 선교회 총무로도 섬기고 있다. 2001년부터는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총무로서 한국 교회 선교연합사역을 통한 세계선교의 비전에 꿈을 실었다. 현지 선교사로서 다년간의 노하우를 축적한 그가 교단 선교의 생리도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21세기 세계선교를 위해 한국 교회를 하나로 모으는 연합사업에도 그만한 인재가 없다는 평가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더 큰 면으로 쓰시고자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총무로 앉히신 것 같다”며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세계선교대회가 2006년 6월에 열리는데 언더우드 선교사가 들어온 인천 앞바다에서 1,500명의 선교사들이 출정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1만 5천 명의 선교사가 있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로 꼽힌다. 그는 “앞으로 2025년에서 2030년 사이에 미국을 앞지르고 선교 파송국 1위로 등극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회를 통해 한국 교회의 선교에너지가 선교연합운동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앞이 아닌 무대 뒤에서 새로운 선교전략을 창출하고 큰 그림을 그리며 한국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선교과업을 위해 모든 것을 퍼부을 계획이다.
그는 “선교는 희생이 아니라, 기쁨이다”고 전제했다. 복음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쁨은 조금 고생되더라도 나중에 오는 기쁨이 크기에 그 희생이 함몰된다는 것이다. 마치 여자가 아이 낳을 때는 고통스러워도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기쁨을 느끼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기쁨을 느끼는 많은 길 중 하나가 바로 선교”이며 “선교는 특별한 사람, 부름 받은 사람만이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선교의 소명을 가져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앞으로 선교에 소명을 가진 사람을 키우고 싶다”며 “선교는 나의 천직인 거 같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서강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합동 신학대학원 석사
OMF 선교사로 인도네시아 보루네오섬 파견
인도네시아 UKI대학 경제학 교수로 6년 역임
싱가폴 타문화권 선교훈련원 원장 2년 역임
한국 OMF 한국대표 역임
사랑의교회 선교목사 9년간 역임
총신대 선교학 박사학위 과정
현 총신대 선교대학원에서 선교학 강의 중
현 합신 총회 세계선교회 총무
현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