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2006년 09월

옥한흠 목사의 제자행전 ⑫ “1년 제자훈련이 평생 살아갈 신앙 컬러를 만들어줬다” - 국방과학연구소 황태연 연구원

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목자와 양’. 흔히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목자는 오랜 시간 양떼와 함께하며 언덕 위에서 꼴을 먹이기도 하고, 시원한 바람도 맞게 해준다. 때론 들짐승의 위협에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밤에 푹 잘 수 있도록 지켜주기도 한다. 그래서 양은 자신을 지켜주는 목자를 언제 어디서든 알아보고, 따르게 된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영향력은 이처럼 엄청난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 황태연 연구원에게도 이런 영향력을 미친 목자가 있었다. 바로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에 만난 옥한흠 목사가 그랬다. 그때 옥한흠 목사와 함께한 단 1년이라는 시간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가치관과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열기가 넘쳤던 대학부에 이끌리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는 언제나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샤머니즘에 푹 빠져 있었다. 할머니는 반 무당에 가까웠고, 어머니는 절에 불공드리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가 대학 캠퍼스 안에서 네비게이토 출신 선배의 전도를 받고 피해 다니다가, 결국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유덕종에 의해 성도교회 대학부에 1974년 8월부터 다니게 되자, 집안에서는 역적 취급을 했다. 그래서 한동안 가족들도 모르게 교회에 다녔다. 모든 것이 새로운 대학 1학년생이었던 그가 교회라고는 생전 처음 다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도교회 대학부의 첫인상은 강렬함 그 자체였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잘 가지 않던 그였지만, 대학부의 뜨거운 열기와 선후배의 밝은 표정 때문에 매주 교회로 발길이 신나게 옮겨졌다.
무엇보다 옥한흠 목사가 모임이 끝난 후 손을 꼭 잡아주며 인사를 건네면, ‘참 따뜻한 분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옥 목사가 잡아준 손의 느낌은 이후,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세 번 반복된다. 그때 그 손의 따뜻함 때문이었을까? 그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부에 출석하며 한인권 선배로부터 ‘사영리’를 배우며 예수를 영접하고, 대학부 선배들로부터 기도하는 법도 배웠다. 그해 11월 옥 목사가 “매주 토요일마다 제자훈련을 하는데, 나오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자 무조건 그러겠다고 순종했다.

 

옥한흠 목사의 마지막 제자훈련 기수가 되다
5기로 제자훈련을 받은 그는 “당시 옥 목사님이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직접 제자훈련 한 마지막 기수가 됐다”며 “내수동교회를 다니던 오정현 목사도 토요일마다 제자훈련을 배우러 와서 훈련받고 그 교회 대학부를 변화시키는 리더가 됐을 정도로 제자훈련의 영향력이 컸다”고 소개했다. 처음으로 받은 제자훈련이었지만, 성경이 너무 재미있는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성경을 읽고 의미를 물어보기도 하고, 말씀의 뜻을 풀어주고 적용까지 나누는 대화식 훈련이 매주 기다려졌다. 그는 그때 배운 ‘말씀의 맛’이 지금까지 자신의 신앙 컬러를 만들어 줬다며 자랑스러워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요한복음 강해는 성경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또 1학년 때 기독교수양관으로 간 겨울수련회나 1975년 8월 대천으로 간 여름수련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이다. 대천수련회에서는 옥 목사가 미리 워치만 니의 <좌행참(座行僭)>과 에베소서 강해를 교재로 만들어 공부하게 했고, 직접 해변에서 전도하게 했다. 일명 ‘해변전도’가 시작됐는데, 그때 그는 처음으로 전도하면서 신기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음에 ‘갈급한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옥 목사가 ‘전도하면서 느낀 그런 기쁨이 너의 삶 속에 평생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잊지 못해 했다. 이렇게 1년간 옥 목사와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함께한 시간은 그로 하여금 평생 살아가게 만든 신앙의 기반이 됐다.      

 

리더가 되어 기쁘게 대학부 활동을 하다
당시 성도교회 대학부에는 남녀 선배가 한 쌍이 되어 후배를 지도하고 있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었는데, 최화숙, 하천기 선배가 그의 멘토가 됐다. 최화숙 선배는 여러모로 그의 인생 상담 역할을 잘 해줬고, 많은 도움을 줬다. 또 당시 한국 교회 내 번역이 안 된 복음성가가 많았는데, 대학부에서 가스펠송을 원어로 부르는 게 유행이었다. 내성적이었던 그는 훈련을 받고 난 후부터 대학부 활동에 적극적이 되었다. 그는 이인호 선배, 정세열 동기들과 함께 ‘코노스톤즈’라는 중창팀을 만들어 매년 전도집회에 가기도 했다. 이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게 된 그는 훗날 대전으로 직장이 이전된 후 직장 내 중창팀에서 반주하던 자매와 만나 결혼하게 됐다.
한번은 옥 목사가 대학부 선배 리더들과 기도원에 가서 후임으로 세울 리더들을 선별했는데, 그 모임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됐다. 옥 목사가 아직 2학년이었던 그를 문서부 부장으로 적극 추천했던 것이다. 선배들은 아직 때가 안됐다며 불안해했지만, 사람을 선택하는 데 은사가 많았던 스승의 말에 순종했다. 당시 1, 2학년은 훈련을 받고, 3학년은 임원, 4학년은 리더로 섬겼지만, 옥 목사의 유학으로 2학년 기수가 임원이 됐다. 그때 문서부를 윤미선이라는 자매와 함께 맡은 그는 성경공부 교재나 신앙서적을 사러 ‘생명의말씀사’서점에도 열심히 다니며 책을 자주 접했다. 그때 본 책들이 자신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천수련회 이후 옥 목사가 유학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대부분의 청년들이 이 사실을 몰랐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옥 목사의 유학 가는 날 환송회를 교회 마당에서 했는데, 모든 청년들에게 악수하며 격려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후 옥 목사가 유학 갔다가 다시 귀국하며 성도교회 대학부에 와서 인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손을 다시 잡으며 한 말이 “너 아직도 교회에 다니냐?”였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는 그저 가능성이 있는 햇병아리였는데, 옥 목사가 귀국한 뒤 그는 어느새 대학부 헬퍼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대학부 생활이 평생 청년 사역하는 계기가 되다
당시 옥 목사의 영향을 받은 사람 대부분이 엘리트였는데, 서울대, 연대, 이대 출신이 80%를 차지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공부도 잘 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반면, 크리스천 엘리트 그룹에 속하지 못한 대학부 청년들 중에는 부득이하게 상처받은 이들도 생기게 됐다. 그래서 옥 목사가 유학을 간 뒤, 성도교회 대학부는 이 교회 중·고등부 출신의 대학을 가지 않았던 청년들이 중심 세력이 되어 대학부를 이끌게 됐다. 대학부 인도자의 성향에 따라 대학부의 신앙이나 리더훈련의 컬러도 변화가 왔다. 옥 목사가 신앙의 기본을 다잡아주며 제자훈련에 집중했다면, 그 뒤 사역자는 신학적인 부분을 강조했고, 그 뒤 사역자는 신학적 바탕에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인도했다. 오히려 옥 목사의 제자훈련 정신은 그 뒤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불을 지펴나갔다.
그는  옥 목사로부터 배운 세 가지 사명이 자신의 삶에 은혜의 짐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바로 옥 목사가  강조한 직장선교, 캠퍼스선교, 세계선교의 비전을 담은 3M비전이다. 그중 그는 캠퍼스선교 즉, 젊은이 선교에 관심이 많아, 출석하는 교회마다 청년 사역에 집중하게 됐다. 대학 졸업 후, 지금의 국방과학연구소에 들어온 그는 대전으로 직장이 이전되자 대전 충남제일감리교회에서 대학부 교사로 5년간 청년들을 대상으로 제자훈련 했다. 인생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그 시절에 만난 청년들과는 지금까지 교제해 오고 있다. 이후 카이스트교회나 지금의 함께하는교회 등으로 교회를 옮길 때마다 청년사역을 하며, 신앙의 기반을 다져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95년 미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간 적이 있었던 그는 그때도 청년사역에 관심이 많아 미국 코스타집회에 참여했는데, 마침 강사로 온 옥 목사와 만나 악수하며 손을 잡았다. 가슴이 찡했다. 성도교회 대학부에 처음 와서 따뜻하게 잡아주던 손, 유학 갔다 귀국 후 훌쩍 커버린 자신을 잡아주던 손, 그리고 20년 후 후배 청년들을 세우는 사역에 꿈을 키우던 자신을 타국 땅에 손잡아주며 반기는 스승의 손이 다시금 신앙의 첫사랑을 되새기게 했던 것이다.

 

직장선교와 선교사역의 두 가지 꿈을 준비하다
이같이 청년사역을 하며 ‘캠퍼스선교’에 비전을 뒀던 그는 직장 내에서도 신우회에서 회장으로 섬기기도 했고, 지금은 자문위원이 되어 매주 금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한편, 부서별로 믿지 않는 직장 동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중이다. 지금은 대학부 때 받은 3M 비전 중, ‘직장선교’의 비전을 남은 직장생활 10년 동안 실천하고 싶어 한다. 성도교회 대학부 방선기 선배(직장사역연구소 소장)를 가끔 만나기도 하는데, ‘대전에서 직장사역하라’는 꿈을 만날 때마다 계속 심어준다고 한다. 국방과학연구소가 무기를 연구 개발하는 곳이다 보니 주 고객이 거친 군인들이지만, 그들의 구원을 위해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그는 사내 각 구역별로 후배 직장인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며, 제자훈련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대전이라는 곳이 정체될 수도 있어 꾸준히 자기계발에도 힘쓰고 있다. 드럼과 수영도 배우고, 독일어도 개인교습 받았다. 신학대학원에서 상담도 공부한 그는 대전 ‘생명의전화’를 태동시키고, 6년간 자원봉사 하기도 했다. 자신의 은사 중 상담의 기술을 발견한 그는 훗날 이 상담기술이 잘 쓰임받기를 바란다. 퇴직 후 한국이 아닌 좀 낙후된 곳에서라도 선교의 꿈을 실현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타문화 언어나 상담 기술을 더 보완하며 자기계발에도 힘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좋아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그의 몸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고, 그의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서 그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약 력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충남대학교 기계공학과(석사)
침례신학대 대학원(목회학 석사)
과학자 교환연구(ESEP, 미국 Maryland주 APG)
국방과학연구소 직장신우회 회장 역임
전 생명의전화 자원봉사 상담원
현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유도·항공무기 개발 기술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