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이화여대 임상보건과학대학원 최화숙 교수
·약 력
이화여대 간호학과 졸업, 이화여대대학원 간호학과 졸업(간호학석사), 중앙대학교대학원 간호학과 졸업(간호학 박사), 이대부속동대문병원 간호사, 현 이화여대 임상보건과학대학원 교수, 이화여대호스피스팀장, 한국호스피스협회 부회장, 한국호스피스간호사회 부회장,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이사, 서울시 호스피스자문위원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과 절정에 달하는 시기가 있다. 때로는 그 둘이 같은 시기에 함께 오기도 하고, 다르게 오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대학시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이라면, 대학부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젊음이 주는 열정과 복음에 대한 지적 호기심 그리고 진리에 대한 갈증이 더더욱 이 시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시절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지금 한창 인생의 절정기에 달해있는 이화여대 임상보건과학대학원 최화숙 교수에게는 성도교회 대학부와 거기서 만난 옥한흠 목사가 그녀 삶의 전환점이자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저당 잡힌 인생이에요. 자기 것인 것처럼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격앙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던 옥한흠 목사의 신앙적 지도와 교훈은 그대로 최 교수에게 심어졌고, 지금까지 그 분의 명령이라면 순종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됐다. 옥한흠 목사의 수많은 제자 중 당시 여제자로서 꼼꼼하고 정확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최 교수에게서 30년 전 인생의 황금기 시절의 추억과 현재의 삶을 들어보았다.
성령에 이끌려 성도교회 대학부로 오다
중·고등학교 시절 책을 좋아했고 ‘왜 사는 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그녀는 그 갈증으로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학교 도서관에 찾아가 거기에 있는 책 3천권을 다 읽었으나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이르러 문득 “삶에는 분명 목적이 있다. 밥 먹고 공부하는 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닌데, 일단 접어 두었다가 더 넓은 곳에 가서 다시 찾아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성적은 전교 600명 중에서 400등 이하로 뚝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1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이화여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자 애를 썼는데, 정작 교회는 장학금 때문에 나오게 됐다. 실은 이화여대에 입학한 첫 해에 CCC 출신의 미국 선교사가 채플시간에 복음을 전했을 때, 일어나 영접기도를 한 적이 있었으나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단순히 장학금 신청서류에 담임목사의 도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믿지 않는 부모의 허락을 얻어 아는 분 딸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성도교회였던 것이다.
마침 최 교수가 교회에 온 날은 인도자가 결석한 날이어서, 그 날 새신자 소개를 맡았던 한정국 선교사가 “유령이 인도한 사람”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실은 성령께서 인도하셨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바로 거기서 최 교수는 옥한흠 목사를 만나게 됐고, 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뺀질거리기도 했다는 그녀는 연극도 좋아하고 감성적인 면도 많았다. 그러나 좋아하던 것들을 결국 결단하고 버렸다. 성도교회에 와서 사영리를 통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한 그녀는 대학부 생활을 통해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며 비교적 빠르게 성장해 갔다.
처음 온 교회에서 첫 번째로 만난 목회자였던 옥한흠 목사는 그녀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녀가 속해 있던 대학의 기독교 동아리가 그녀를 복음의 길로 안내하는데 기여했으나 성도교회 출석이후에는 모임 시간이 교회 수요예배 시간과 겹쳐 한동안 갈등을 겪었다. 이에 옥 목사로부터 둘 사이의 차이점을 듣고 교회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게 되었고,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선택하는 ‘작은 변화’들이 이때부터 쌓이게 되었다.
성령세례 받고 변화되어 온 가족을 전도하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 거의 다른 책은 읽지 않고 성경만 읽었다는 그녀는 성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성령이 도우셔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깨달아지고 중보기도를 통해 많은 응답을 받게 되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을 하던 최 교수는 미쳤다는 소리도 듣고 핍박도 받았으나, 교회 출석한지 2년 이내에 온 가족을 인도하는 믿음의 씨앗이 되었다. 그녀는 사도행전 10장에 있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간구했는데, 정말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실상은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신앙훈련 받으며, 180도 달라진 내면의 변화가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이 은혜를 받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최 교수는 자신이 예수 믿기 전에는 까다롭고 화가 나면 분이 그대로 표출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성령세례를 받았는데, 3일 정도 온 방을 뒹굴며 울면서 통회 자복하는 경험을 한 이후로 비 온 뒤에 세상이 깨끗해지는 것처럼 심령의 변화가 왔으며 놀랄만한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고백했다. 항상 웃게 되었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너그러워지게 됐다. 화도 안내게 됐으며, 어려운 일도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됐다. 그러니 부모를 비롯해 동생 3명까지 다 전도할 수 있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유학가기 전날까지 청년들과 상담하던 스승
최 교수는 당시 성도 대학부 학생들이 주일에는 종일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받기 위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리더들은 자신의 것 외에 새신자와 초신자들을 위해 한 두개씩 더 준비 해가지고 와서 나눠 먹곤 했다고 한다.
특히 한인권 선배는 주일마다 쌀 두 대 분량의 주먹밥을 가져와서 나눠주곤 했었는데, 그녀도 초신자 시절 몇 번인가 얻어먹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저렇게 젊은 대학생들이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와서 하루 종일 집에도 안가고 신앙훈련을 받느냐고 놀라워할 만큼, 당시 성도교회 대학부는 뜨거운 부흥을 경험했다고 떠올린다.
그 가운데서도 최 교수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영적으로 급성장했다. 처음 옥 목사는 간호학과 학생들은 워낙 실습도 많고, 공부하는 것도 많아 제대로 신앙성장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녀가 같은 과 친구들을 전도해 오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 생각이 바뀌게 됐다고 한다. 그런 그녀를 옥한흠 목사는 제자들 중에서도 아끼게 됐다. 최 교수가 워낙 꼼꼼하고 정확한 성격이라 대학부 성경공부 반 배정을 할 때도 누가 어떤 성향이고, 어떤 조로 편성되면 좋은지, 양육 커리큘럼 일정은 어떻게 짜면 좋은지 등 옥한흠 목사의 마음에 쏙쏙 들게 일처리를 했던 것이다. 대학부 목회자에게는 좋은 제자이자, 동역자였던 것이다.
최 교수의 기억 속에는 옥 목사와의 기억이 참 많다. 그녀의 기억 속에 각인된 부분 중 하나는 옥 목사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후임자를 정하진 못한 상태에서 여름수련회를 떠났었는데, 그 수련회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1주일간 열렸었다. 150여명이 참석하여 꼬박 1주일간의 신앙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모두들 꾀죄죄한 모습이었는데, 주일날 아침에 세수하고 온 얼굴은 모두들 성령으로 충만하여 번쩍번쩍 빛이 나더라는 것이다.
특히 옥 목사는 유학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수련회라, 참석한 청년들과 일일이 개인적인 신앙상담을 해주었다. 그것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이어졌고, 돌아온 다음날인 주일까지 이어졌다. 그들의 진로를 상담해주고, 젊은 날의 인생 고민 등을 들어주며 앞날을 위해 손을 붙잡고 기도해줬던 것이다. 최 교수는 “당시 사모님은 한국에 남고 싶어 하셨고, 옥 목사님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유학을 떠나고 싶어 하셨는데, 옥 목사님께서 얼마나 열심이 기도하셨는지 유학 떠나기 전 그 즈음에는 날마다 얼굴이 빛났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평생 호스피스를 통해 섬기게 하다
그녀는 대학부를 마치고 같은 교회 청년부로 올라가지 않고, 곧바로 76년 12월에 거제도로 가서 무의촌 지역의 진료간호사로 3년간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다. 이 때가 최 교수에게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아라비아 광야에 가서 홀로 주님을 만났던 것과 비슷한 시기였다고 한다. 무의촌에서 지역사회보건 활동을 하면서 주님과 깊이 만나고, 수요예배와 철야예배에 참석하는 습관도 들이고 새벽기도회에도 가고, 젊은이가 없는 시골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 교사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이후 이대부속동대문병원에서 내과와 분만실을 거쳐 정신과 책임간호사로 일했다. 결혼한 이후 첫 아이를 낳고, 집에서 잠시 쉬는 동안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간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의 소개로 호스피스 활동에 발 들여 놓게 된 그녀는 20년 가까이 호스피스 사역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료를 번역해 주는 자원봉사자로, 그 다음에는 가정방문을 담당하는 호스피스간호사로, 1992년부터는 이화여대 가정호스피스센터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동대문병원의 호스피스 병동과 가정호스피스센터를 총괄하는 호스피스 팀장으로 사역중이다. 호스피스를 하는 동안 대학에서 가르칠 기회도 얻게 되었으며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호스피스로 간호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녀는 호스피스 실무를 하면서 호스피스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사람인데, 호스피스사례집인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를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3년부터는 이화여대 임상보건과학대학원 교수로 호스피스 전문간호사들을 양성하며, 교단에서 교수로서 활약하고 있다. 호스피스를 전공한 최 교수의 삶은 자연스럽게 ‘호스피스’가 그녀의 삶에 화두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호스피스는 솔직히 힘든 일이며 육체적으로 소진되기도 쉬운 일이지만, 그로 인한 의미도 있고 되돌아오는 보람도 말할 수 없이 크다”고 말했다.
호스피스는 말기환자와 가족을 전인적으로 돕는 일이며 생명사랑운동인데, 환자마다 맞춤형 돌봄계획을 세워 간호한다고 한다. 한 명의 환자가 있으면 집, 병원, 장례, 유가족 관리 등 환자 형편에 따라 담당의사, 간호사, 복지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등 맞춤형 팀을 이룬 돌봄이 ‘호스피스’라는 것이다. 그녀는 호스피스는 자원봉사자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반드시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전문직 인력이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생명을 가진 교회가 이 일을 위해 기도로, 물질로, 헌신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시한부 환자들을 위해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호스피스 인력을 교육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참으로 소중하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기신 이유를 세월이 지날수록 깨닫게 된다고 덧붙였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오히려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것이다.
주일날은 젊은이들에게도 제자훈련하다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스승인 옥 목사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사람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본인 스스로도 체험한 최 교수는 이 일을 지금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호스피스 활동을 하며 만나는 환자들에게 직, 간접적으로 또는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자원봉사자들과 학생들에게도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이 있다. 바로 출석하는 교회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한번뿐인 삶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도전케 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잠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교회를 개척해 젊은이 선교의 비전을 실천하고 있다. 사모지만, 주일마다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양육하고 있다. 이 교회는 청년부가 3개에 100여명, 대학부가 2개에 500여명 등 20대에서 40대 초반까지의 젊은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사모이기 이전에 제자훈련을 하는 리더로서 이들을 맡아 성경공부 커리큘럼을 짜고, 리더훈련을 하며 청년 2, 3부에서는 말씀도 전하고 있다.
이곳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많은 청년들이 최 교수처럼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을 간증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보람이요, 기쁨이라고 했다. 또 각 대학 캠퍼스에 복음주의 청년들이 총학생회에 들어가 주님의 깃발을 꽂도록 하고 있으며, 신입생들의 전도를 위해서도 적극적인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적극적인 기도와 실제적인 전략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성도교회에서 배운 제자훈련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옥 목사님은 내게 있어 영적인 아버지예요. 잊을 수 없는 분이지요. 제 삶의 모든 중요한 순간에 옥 목사님이 함께 하셨다”며 그리워 했다.
세상을 위해 복음의 빚진 자로 살다
사실 그녀는 하루를 참으로 충실히 조금은 너무하지 않나 싶게 알뜰하게 사용하고 있다. 수요예배와 금요철야가 있는 날을 빼면, 거의 저녁 일찍 잠을 잔다. 서너 시간 자고 난 후에 일어나 말씀을 연구하거나 대학원 수업을 준비한다.
새벽녘에 잠시 눈을 붙이고는 아침이면 다른 이들과 똑 같이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강의와 연구, 호스피스관련 자문회의, 환자방문, 자원봉사자 상담 등 일정이 빽빽하다. 그리고 주일이면 다시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린다. 이렇게 하루 24시간을 남보다 배로 열심히 사는 이유는 주님이 주신 하루를 소홀히 할 수 없음도 있지만,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현재 소원이 하나 있다. 한 후원자에 의해 경기도의 땅을 기증받아 놓은 상태인데, 이곳에 ‘호스피스센터’를 개원하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곳에서 호스피스 봉사자들을 교육하고, 환자들이 편하고 자유롭게 쉴 수 있도록 ‘호스피스센터’를 짓는 비전을 갖고 기도중이다. 시설투자를 위해 지원해줄 후원자와 이를 위해 도움을 줄 여러 만남의 축복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녀는 “30년 전 옥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세상을 위해 복음의 빚진 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주문하셨다”며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고, 생의 마지막 시간을 사는 말기환자와 가족을 돕는 일, 특히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며 또 다른 약속을 향해 바쁜 걸음으로 나섰다.
<우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