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부산 이재모피자 사장 김익태 장로
부산시 광복동. 서울로 치면 명동에 해당하는 번화가. 이 거리에 위치한 수천 개 상점의 간판을 깨끗이 일괄 정비하고, 매년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트리 축제를 열어 믿지 않는 부산 시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데 앞장서온 이가 있다. 바로 이재모피자의 사장 김익태 장로(드림호산나교회)가 그 주인공이다.
최근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개척, 분립한 드림호산나교회의 개척 장로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예수 믿는 자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좋은 롤 모델이 되고 있다. 광복동 상가번영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지역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신뢰하는 예수의 작은 제자이다. 큰 키에 희끗희끗한 은발을 날리며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는 그는 대학 교수 같은 풍모를 풍겼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날 기독교들이 진정으로 지녀야 할 모습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된다.
제자반 동기들의 사랑과 주님의 말씀
1995년 그는 하루에 200만 원의 매출이 있는 술집의 오너였다. 날마다 술에 취해 살았고, 부산 시내 경찰서 중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매일 싸움과 도박에 젖어 살았다. 그런데도 마음속에는 갈급함이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술에 잔득 취해 집에 가던 자신의 모습이 마치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렸던 친아버지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전봇대에 주먹을 날리고 피를 흘리면서 ‘누가 나를 좀 구조해 달라’라고 울부짖었다. 갈급함과 허전함으로 부산의 한 교회에 발을 디뎠지만 그 교회 안에는 사랑이 없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창녀와 세리도 받아주며 품어주셨는데, 실제 그가 간 교회 안에는 사랑도 없었고 정죄만 있었으며, 사람들 사이의 벽은 높아만 보였다. 군중 속의 고독함이 느껴졌다. 그는 그럴수록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런데 인근 호산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다. 어머니는 그가 3살 때 아버지와 헤어지고 1남 2녀를 키우며 고생만 하신 분이었다. 그는 한 여자의 일생이 불쌍해 ‘낫게만 해주시면 술집을 정리하겠다’고 서원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정말 어머니의 암이 기적처럼 치유되었다. 그러나 막상 어머니의 병이 나으니, 마음이 바뀌었다. 돈 모으는 재미에 빠지자 1년만 더 술장사하겠다고 기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1년 뒤 어머니에게 다시 자궁암이 발견되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술집을 정리 하겠다’고 주님께 두 손을 들었다. 그때 교회에서 제자훈련생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냉큼 신청했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그렇게 1996년 제자훈련을 받기 시작한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 품에 안겨보는 것과 같은 따스한 사랑을 제자반 동기들로부터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주길 원하시는지 그는 고민했다. 제자반 안에 자신보다 나이 많은 형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또 말씀이 내면에 들어오니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져, 술과 담배를 끊게 되었다. 말씀은 그로 하여금 세상적인 즐거움과 이별하게 했는데, 어느 날은 술집도 과감하게 정리했다. 김해에 가구점을 오픈하고, 오토바이로 출퇴근했다. 주일날 문도 닫고 영업을 했지만 가구점 경영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그 후 그는 어머니 이름을 딴 이재모 피자집을 개업했다. 피자 만들기 노하우를 얻기 위해 안 가본 피자집이 없을 정도였고,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먹다 남긴 피자찌꺼기를 연구했다. 그리고 광복동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집으로 키워냈다.
네 이웃과 ‘화해하라’는 음성에 순종하다
형제의 사랑과 말씀의 은혜를 받았지만 친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던 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어색하고 싫었던 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것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내면에서는 자꾸 아버지와 화해하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버림받아 감옥에 끌려가고, 훗날 애굽 총리가 되어 자신에게 상처 주었던 형들을 만났을 때, “날 이리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며 대성통곡하던 심정이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깡패처럼 살았던 자신의 인생 모두가 주님의 예정하심처럼 느껴졌다. 자신에게 뭔가 사명을 주시려고 고난을 주신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수소문 끝에 수원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냈다. 아버지라는 단어 자체를 잃어버리고 산 지 오래라, 중국집에서 마주한 아버지를 보고도 얼어버리며 말도 잘 안 나왔다. 그때 부모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를 그동안 미워했던 것과 자신이 버림받아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다 큰 아들이 몇 십 년 만에 찾아오니 원망이 클 줄 알고 나왔는데, 오히려 진심이 담긴 아들의 사과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내가 죗값을 받고 있다”며 아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중풍을 앓고 있었다. 그렇게 친아버지와 화해하고 되돌아오는 길에 그는 마치 다리가 땅에 안 떨어지는 것처럼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솟구쳐 행복했다고 한다. ‘이게 말씀이 주시는 능력이구나’를 실감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가정과도 화해하기 시작했다. 예수 안에서 자존감이 회복되니 아내가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또 좋은 아빠가 되는 게 소원이었는데, 좋은 아빠는 돈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전적으로 거듭나야만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부자관계, 부부관계가 회복되니 가정이 천국이 되었다. 또 주님은 그에게 교회 안에서 미워하던 교인을 찾아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가 세 번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상대편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일단 말씀에 순종하자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 후 그 교인이 선물을 갖고 와 그때 고마웠다며 화해하게 되었다. 말씀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광복동 상점 간판 정비를 통해 주님을 드러내고 거리를 살리다
그는 가정, 교회뿐만 아니라 관이나 지역사회와의 관계도 지혜롭게 풀어나갔다. 2005년 어느 날 그는 구청장으로부터 광복동 일대 상점들의 간판정비사업을 민간이 주도해서 시행해야 하는데, 그 일을 맡아보지 않겠냐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많이 했던 그는 동사무소 여직원에게도 자신의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하며 여러 번 전도했었다. 그런데 그 여직원이 이재모 피자집 사장님은 주일 하루 400만 원, 1달이면 1600만 원의 매출이 오르는 피자집 문을 주일에는 꼭 닫을 정도로 믿음이 좋고 신뢰할 만하다며, 구청장에게 그의 얘기를 좋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리더의 자리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부산에서도 처음으로 실시하는 주민주도사업이었고, 간판정비사업이 성공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는 광복동 거리에 있는 모든 상점 사장들을 만나 간판의 크기를 10m에서 8m로 줄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상점 사장들은 기본적으로 간판이 커야 장사가 잘된다는 통념을 갖고 있어서 크기를 줄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 겸손히 낮아졌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자신이 결손가정에다 기술고등학교 출신의 학벌도 없고, 주먹질을 하던 깡패가 술집지배인으로 출발했던 것, 칼로 자해할 정도로 고슴도치 같았던 성격에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세상의 중독들에 빠져 살던 자신이 예수 믿으면서 변화된 인생 이야기를 만나는 상점 주인마다 진솔하게 간증했다. 그는 “‘나’가 ‘우리’로 바뀌지 않으면 이 광복동 거리가 살아나지 못한다”라고 설득해 나갔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성령의 영역이었다고 겸손해 한다.
당시 부산 광복동에는 피난 와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많아 관의 일방적인 통보를 제일 싫어했고, 자존심이 강했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더니 모두 한결같이 “내가 당신 때문에 간판 내릴 테니,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 간판도 내릴 수 있겠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해보겠다”고 답하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피자집 건물의 사장인,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처절한 인생의 숨겨진 아픔을 이야기하니, 상점 주인들이 모두 감동받아 98%가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공사가 다 끝나고 그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간판업자는 그의 철저한 재료 감사 때문에 10원짜리 하나도 부정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대신 부산 광복동 거리 상점 간판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모두 만들어 걸었다는 명예를 얻어, 훗날 더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 보통 이런 일을 민간이 주도하면 많은 돈이 오가고 부정이 끼어들 여지가 많다. 그런데 그가 투명하게 처리하는 모습에 오히려 공무원들이 더 감동받았다.
광복동 상점들의 간판을 바꾸자, 도시가 넓어 보이고 상권이 살아났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벤치마킹하러 각 관에서 내려왔고, 정부 성공사례로 전국에서 강사로 그를 초청했다. 어떻게 주민들을 설득했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내려놓았으며, 학문이나 기술이 아닌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서니 주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간증했다. 그렇다고 간판을 내리기 위해 종교이야기 한다고 질타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에서 우리로 바뀌는 마음이 중요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이 갈급한 사람들이 많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받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상점 주인들을 만나면서 깨달았다”며 “나 역시 사랑받고 싶었는데, 성경에서 그 사랑을 받았고, 그것을 주민들에게 전했는데 그들이 간판을 내리고 나를 믿어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간판 정비를 마치고 나니, 도로가 바뀌고, 빛과 조명, 자연이 어우러져 상점이 모두 보기 좋게 살아났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거리에 생명력이 넘쳐났다.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는 또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12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광복동 거리에 크리스마스트리 축제를 열자는 것이었다. 광복동 근처에도 큰 절들이 많았는데, 매년 종교행사를 하면 시에서 지원금이 나왔던 것. 그는 당시 기독교행사가 전무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간판으로 정비된 광복동 거리에 크리스마스트리 축제를 기획하고, 상점 주인들을 찾아가 축제를 통해 상권에 활기를 불어넣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2009년, 2010년 성공리에 크리스마스트리 축제를 열었고, 시민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 장사가 정말 잘되었다. 상점 주인들의 반응도 좋아 트리가 설치되는 지점의 상점들은 자원하여 후원금을 냈는데, 1억 원이나 모금됐다. 아시아태평양축제 때 광복동 크리스마스트리 축제가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롯데백화점에서 스폰서 제안이 왔지만 그러면 롯데 광고판을 만들어줘야 하고, 축제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아 거절했다.
그는 “미국 상하원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못 쓰게 했는데, 요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신 날을 알리고 싶어 이런 축제를 기획했다”며 “요즘 시대는 목적 없이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는데 마음이 통하고 진심으로 대하니 상가 사람들이 움직였고, 심지어 주변 절 주지스님들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 올 정도로 관계를 잘 맺었다”고 한다.
최근 그는 마지막으로 화해할 사람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남편에 대한 미움을 아들에게 퍼부었던 어머니가 사실 제일 미웠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런 어머니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거실 소파에 앉아 “사실 그동안 어머니를 미워했었다”라고 용서를 구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나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너를 사랑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주님께서는 한 여인의 아픔을 듣고 싶으셨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축복이나 성공은 환경적인 게 아니며, 내가 성령 충만하면 환경적인 축복은 자연히 따라온다”며 “자신이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예수가 되기 바란다”고 덧붙인다. <우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