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이야기 조영선 사모_ 흩어진화평교회
35년 전 남편이 부교역자였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익숙했던 가족과 친정 교회, 회사를 떠나 남편이 시무하는 낯선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힘든 것은 하나님께 헌신된 마음이 있음에도 사역의 장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내게는 하나님을 섬기고픈 마음이 충만했는데, 사모이기에 선뜻 나서기가 힘들었다.
몇 년 후 남편이 화평교회를 개척하자, 이런 내 고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르치는 일은 물론 찬양대, 밥하는 일, 교회 청소, 화장실 청소, 심방, 전도, 간사 일까지 해야 했다. 몸은 힘들고 삶도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풍요로웠다.
여전히 한국 교회에는 교회 안에서 사모가 사역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화평교회는 규모가 커진 후에도 부교역자 사모들에게 은사대로 사역할 것을 권장했다. 소그룹 지도자 교육, 신입지도자반, 가장총무 수련회 등에서 상담 사역은 물론, 부모 역할 교육 등 내가 섬길 일이 점점 많아졌지만 그 모든 섬김은 큰 기쁨이었다.
내가 이렇게 많은 교회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역하면서 받는 은혜가 컸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나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갈 길을 열어 주시고, 사역의 폭을 넓혀 주시며, 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 같다.
‘가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다
“여보! 아무래도 우리가 나가야겠어.” 어느 날 새벽기도 알람을 못 들은 채 쿨쿨 자고 있는 내게 기도하고 돌아온 남편이 큰 소리로 깨우면서 말했다. 이후 두 달쯤 지났을 무렵, 강의 차 제주도에 간 남편으로부터 새벽 시간에 전화가 왔다. “밤새 고민하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해야겠어요. 나 결정했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우리 부부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갑자기 들려온 건 아니었다. 몇 년 전 평신도지도자들에게 2010년 이전에 교회에 온 성도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모두 흩어지자고 제안할 당시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준비되지 못한 성도들의 반응에 보류하다 몇 년이 지나면서 깜빡 졸듯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다 “가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것을 결단하고 나니 기뻤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처럼,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린 떠나야 했다. 교회 규모를 봐도 자꾸 흩어져야 하는데, 그동안 8번이나 부교역자를 중심으로 떠나보냈으나 많은 성도가 함께 가지는 못 했었다.
교회가 흩어져야 할 이유, 우리가 떠나야 할 이유는 많이 있었다. 교회의 역사가 깊어지고 몸집이 커짐에 따라 큰일도 많이 하고, 의미 있는 아름다운 사역들이 놀랍게 펼쳐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깨어 근신하기보다는 그저 편안하게 안주하려는 성도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적진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 점점 후방에서 뒷짐 지고 관리·감독하며 세상적인 경영 마인드로 교회를 이끌어 가려 했다. 심지어 그렇게도 닮지 말자던 한국 교회의 어두운 모습을 닮아 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화평교회도 고인 물처럼 썩게 될까 봐 위기감을 느꼈다.
우리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생각했다. 개혁과 변화를 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물꼬를 터 줄 실천이 바로 담임목사 중심의 흩어짐이라 여겼다. 그뿐 아니라 평소 늘 남편은 한국 교회를 걱정했는데, 변질되지 않고 본질을 유지하기 위한 답은 교회가 흩어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못자리판에서 떠나지 않는 어린모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해 그대로 썩고, 고여 있는 물이 변질되듯이, 교회가 안주하고 자만해지면 변질되기 쉬운 법이다. 이제 “네가 나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남편과 함께 순종하기로 했다.
그즈음 나는 자꾸 꿈에 시달렸다. 같은 맥락의 꿈을 다른 배경으로 꾸고 또 꿨다. 벌떡 일어나면 ‘휴~ 다행이다. 꿈이어서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주님 이대로 만족합니다.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울며 지낸 1년, 하나님이 앞서 일하시다
교회 본당 건물 유리에 비친 파란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드넓은 주차장이 좋아 사진으로 남겼다. ‘언제 이 모습을 또 보겠어?’ 혼자 중얼거리며 감이 주렁주렁 열린 뒤뜰을 또 한 장 찍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시시때때로 흘렀다. 교회 마당만 들어서면 자꾸 사진을 찍고 싶었다. 지난번에도 찍었는데 뭘 또 찍나 하면서도 출근하다가 퇴근하다가 자꾸만 교회 곳곳을 사진으로 남기는 버릇이 생겼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사진도 추억의 역사도 마음 깊이 담았다.
막상 흩어지는 교회로 떠나려 하니, 지금까지 지나온 날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앞으로 한 교회가 탄생하기까지 쉽지 않은 준비와 인적·물질적 자원 등 또다시 겪어야 할 과정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려웠다. 또한 화평교회를 손에서 놓는 일, 후임자를 세우는 일들도 거대하게 느껴졌다.
날마다 눈물로 주님께 의뢰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 부부만 내려놓으면 시온의 대로가 열릴 것 같았는데, 여러가지 올무와 장애물들이 앞길을 막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일을 친히 진행하셨다.
아직도 나는 32년의 무게감을 떨쳐 내지 못하고, 사역과 관계들을 마무리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새 역사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사역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쯤 되면 성도 한 분 한 분, 아이들 하나하나 작별의 인사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그동안 행복했다고, 정말 감사했다고 한마디 인사라도 할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을 마치고 주님 품에 돌아가는 날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사하고, 정리하고, 마무리 꼼꼼히 잘하고 여유 있게 떠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그래도 화평교회 일과 새로 개척하는 흩어진화평교회의 일 모두 어려운 과정 가운데서도 기가 막힌 시간에 놀랍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절절히 느꼈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돌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어느덧 이 찬양은 내 간증이 됐다.
고목나무에 새순이 돋아나다
고목나무에 새순이 돋아나는 것처럼 신나 하는 남편을 보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60대 중반에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은 우여곡절 중에도 우리에게 위로와 큰 기쁨이었다. 32년 전 교회를 처음 개척할 때보다 더 큰 기대와 설렘으로 밤마다 청사진을 그렸다. 남편은 옛날 첫 교회 개척할 때처럼 매일 개척할 동네를 가보곤 했다.
드디어 교회 장소를 월세로 계약했다. 여러 군데 볼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장소라고 확신했고, 그에 걸맞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물 흐르듯 진행됐다. 선교 대상 지역 설정, 교회당 장소, 개척 멤버들, 필요한 개척 자금 등 어렵고 복잡하고 막막해 엄두도 못 내고 있는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실타래가 풀리듯 술술 풀렸다.
다시 개척한 “흩어져 대박(Great Blessing) 난 공동체”
‘흩어진화평교회’라는 교회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마다 선뜻 “좋네요”라고 답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랬다. 개척 교회가 “모여라! 모여라!” 해야지, 왜 흩어지느냐고 말해도 남편의 뜻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귀한 이름이란다. 교회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면 흩어져 사명을 감당하고, 또 성장해 또다시 흩어지고 흩어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다 그래야 한다는 답변뿐이다.
화평교회 후임목사가 확정된 후, 흩어진화평교회 설립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첫 기도회를 잊을 수가 없다. 30여 년 전 화평교회 개척 때, 그 시절에도 안 해 본 맨바닥에서 기도모임을 갖고, 은박지 하나 깔고 무릎 아픈 권사님들까지 모두 쭈그리고 앉았는데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화평교회 때 주보 칼럼의 주제가 될 만큼 잘 못하던 “아멘!”을 큰 소리로 외치고, 찬양과 기도와 섬김의 열기, 화기애애하고 활기찬 분위기에 우리 스스로도 놀랐다. 성도들은 기쁘고 흥분이 돼 잠이 잘 안 왔다고 한다.
흩어진화평교회 식구들은 사진을 찍을 때도 “흩어진화평교회 대~박!” 하고 엄지를 치켜든다.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이미 대박 난 공동체, 쓰임받아 기뻐하는 공동체다. 그날 이후 흩어진화평교회 식구들은 스스로 “흩어져 대박(Great Blessing) 난 공동체”라 부른다(창 12:1~3). 매주 기도모임과 소그룹 교제, 크리스마스 이벤트, 엠티 등 개척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하나가 돼 갔다.
날씨가 추워진 날 기도모임을 해야 하면, 낮에 이미 말없이 사놓고 간 난로들이 따스하게 맞아 줬다. 직장에서 바로 오느라 배고픈 성도들을 위해 만들어 온 샌드위치, 김밥, 어묵, 떡볶이, 떡 덩이들이 넘쳐 났다. 책상 의자 ‘조립데이’ 공사 후 ‘청소데이’ 등 날을 정해 봉사하자고 하면 미리 틈나는 대로 우렁각시처럼 몰래 들러 해 놓고 간 우렁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주방 봉사, 화장실 청소, 분리배출을 열심히 해 주신다. 아이들 인원수만큼 과자 선물세트를 몇 십 개 만들어 밤중에 몰래 놓고 가는 등 큰 교회 그늘 안에서 언제까지나 쉬려 하지 않고, 이젠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뭐라도 하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인테리어 등 필요한 개척 자금도 자발적으로 형편껏,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면서 기뻐했다.
목사님은 12년 전 화평교회가 20주년 되던 날 2020 Vision을 선포했다. ‘모이는 교회에서 이제 흩어지는 교회로!’ 이후 우리는 2020 Vision을 위해 늘 기도하며 12년간 흩어지는 교회를 8번 개척하고 부교역자들을 파송했다. 2020년 1월 첫 주부터 담임목사가 바로 그 흩어지는 교회의 분립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그때 주의 인도하심을 따르다 보니, 지금 여기에 와 있게 된 것이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
얼마 전 흩어진화평교회는 빨강, 초록, 하얀색의 예쁜 십자가를 세우고, 비록 조그만 상가 건물이지만 주인의 허락을 받아 건물 자체에 대형 십자가를 새겨 넣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 파란빛 LED 십자가다. 마침 우리 교회가 전철역에서 1분 거리에 있고, 국가장학재단에서 운영하는 서울지역 26개 대학생 생활관이 우리 동네에 있다.
밤마다 전철역에서 내린 젊은이들이 저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억하기를 소망한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구원과 심판의 주 되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주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도 저 십자가를 바라보고 갈망해 돌아오기를 기도한다. 영광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들은 계속 세워져야 하고, 성도들이 흩어져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가 왕성하게 확장돼야 한다. 그러나 옛날처럼 개인이 맨땅에 헤딩하는 식의 개척 시대는 지났다.
이제 교회가 교회를 낳아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기 위해서 필요한 신실한 사람들과 공간과 환경을 교회가 제공해야 한다.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리운 화평교회를 뒤로하고, 떨어져 나온 지 딱 한 달이 됐다. 위험한 늪과 고비 다 넘고, 화평교회는 화평교회대로, 흩어진화평교회는 또 흩어진화평교회대로 어엿하게 든든히 서 가고 있다.
먼발치에서 마음뿐 함께하지 못했던 화평 가족들과 흩어진화평교회로 와서 자주 보고 차도 함께 마시며 가까이 지내니 그저 좋다. 주일 신자로 가끔 결석도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성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주방 봉사를 하고, 찬양대로 서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을 보면서 이게 바로 교회들이 흩어져야 할 이유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겨울이 지나 꽃 피는 봄이 오면 날마다 간절히 기도해 왔던 선교지로 나가길 그려 본다. 교회마다 잠자던 자가 일어나고, 소외되고 구경하던 자들이 주님께 손들고 헌신하며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주여! 오늘도 흩어진화평교회에 갈한 심령, 죽어 가는 영혼들을 보내 주옵소서.
조영선 사모는 화평교회의 가정교회 어시스턴트 디렉터와 부모 역할(APT) 교육을 담당했으며, 2019년 12월 분립개척한 흩어진화평교회 최상태 목사의 아내로서 교회 이곳저곳을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