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11년 09월

종이책, 근본의 매력을 키우다

문화읽기 한기호 소장 _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0년에 종이책의 종말론이 거세게 일었다. 한 방송에서 ‘10년 후에 종이책이 사라진다’는 주제의 토크쇼를 열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주장을 태연하게 펼쳤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국내 출판시장에서 전자책의 점유율은 여전히 1% 내외에 머물고 있으며, 종이책은 여전히 건재하다. 미국 출판시장에서도 전자책은 겨우 15% 수준을 맴돌고 있다.
그렇다고 종이책이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종이책과 웹, 그리고 앱은 3자 공존을 통해 각각 시장성을 키워가고 있다. 검색의 장점을 키운 콘텐츠들은 웹에서 확실한 영역을 구축한 지 오래고, 앱 또한 시장성을 가파르게 키워가고 있다.
외국어 등의 실용서, 수식화와 도표로 설명이 가능한 자기계발서, 킬링타임성이 강한 콘텐츠들은 앱에서 세력을 빠르게 키워가고 있다. 따라서 종이책은 웹이나 앱과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매력을 갖추지 않으면 생명을 이어가기 어렵다.
그동안 아날로그 종이책은 디지털의 장점마저 수용하되 디지털에서는 결핍된 부분, 즉 자신만의 장점을 키워가면서 독자적인 생존 영역을 넓혀왔다. 그렇다면 아날로그 종이책의 매력을 어떻게 키워왔을까?

첫째, 스토리텔링을 강화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책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이야기성은 출판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방법론으로 우뚝 올라섰다. 영상이 범람하면서 인간은 머리(뇌)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 외부환경(트렌드)까지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 다음 결정을 내린다.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소비자에게 상품은 스토리텔링으로 각인된다.
따라서 정보를 다루는 지식 책도 분절된 정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하나의 실에 꿰어 감동적으로 설명해주어야만 한다. 한 권의 책에서 정보·교양·오락 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네트워크세대의 감성에 맞는 글로, 재미와 유익함뿐만 아니라 스릴과 서스펜스를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책이 다루는 내용이 검색에 맞게 바뀌고 있다
검색이 보편화되면서 책의 세계에서는 분할과 통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분할이라 함은 한 권의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갈수록 잘게 쪼개지는 것을 말하고, 통합은 그 책이 설명하는 방식이 통합된다는 뜻이다. 개론이나 원론에 있던 ‘차례’들은 모두 한 권의 책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이때 책의 서술은 다양한 분야의 모든 지식을 통합해서 전개해야만 한다.
 
셋째, 요약된 정보를 다룬 새로운 유형의 책이다
오늘날 디지털 텍스트는 우리가 그 정보 더미에 깔려 죽고도 남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바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시간’과 물리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꼭 필요한 정보의 핵심만 정확하게 요약해놓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이런 구조에 맞는 책이 ‘사전형 책’이다.
18세기의 디드로 등이 그때까지 생산된 모든 지식을 압축한 『백과전서』로 대중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던 것 같은 일이 지금 다시 재현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 18세기와 다른 것은 기계적인 서술이 아닌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개성적인 글쓰기가 넘쳐난다는 점이다.

넷째, 활자와 이미지를 상생시킨 책 만들기이다
디지털 영상이 넘쳐나면서 시각문화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보의 저장이나 전달 속도와 양에서 디지털 매체에 밀려나던 종이책은 종이의 물성적 차원을 출발점으로 해서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책의 편집과 디자인, 제작 등을 결합한 ‘만들기’가 매우 중요해졌다.
기획편집자는 의미전달기술과 함께 이미지적 표현요소가 강해지고 있는 활자의 특성과 이미지의 활자적 요소를 주목해야 한다. 장식의 단계를 넘어선 이미지는 활자의 도움 없이는 의미가 부여되지 않기에 활자로 이미지의 의미를 확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울러 책의 판형이 매우 중요하다. 컴퓨터와 텔레비전의 고정된 화면과 형태를 달리하는, 세로보다 가로가 훨씬 큰 판형을 사용하고, 페이지를 분할하지 않고 펼침면으로 그림을 전개한 그림책은 직사각형의 획일적인 디지털 영상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 디지털 영상시대에 그림책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다섯째, 책의 절절한 포장이 중요하다
오늘날 독자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로 대변되는 모바일 혁명과 소셜네트워크의 무서운 성장이라는 회오리에 휘말려 있다. 따라서 종이책은 웹과 앱에 익숙한 사람들의 정서를 충분히 배려해야 한다. 트위터를 통해서 전달하는 것은 문자언어가 아니라 영상이미지다. 트위터는 140자까지 쓸 수 있지만, 가능한 한 짧은 문장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책의 차례와 개별 글의 중간 제목도 제목처럼 절절하게 포장된 수준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상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진 책은 웹과 앱의 속도성이나 검색성보다, 정보 자체의 신뢰성, 휴대성, 보존성 등을 중시하는 독자의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책이다. 이 밖에도 종이책이 살아남기 위한 조건으로는 임팩트, 팩션, 구어체, 시공간의 트리밍, 강력한 캐릭터, 망각의 힘과 브리콜라주적인 지식, 간결함, 새로운 감성, 인류의 지적 문화유산의 재구성, 주제의식이 뚜렷한 만화, 페티시즘 등을 들 수 있다.
 
종이책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가기 위해서는 책의 근본(basic)이 무엇인가에 대해 꾸준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근본이란 웹과 앱이 결코 구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웹과 앱의 결핍을 보완하여 종이책만의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장점을 지닌 책만이 인간의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
검색으로 정답만을 찾아대는 사람보다 종이사전으로 필요한 항목을 찾다가 의도하지 않은 다른 항목을 읽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사람이 어휘력을 더욱 크게 키울 수 있으며, 그것은 곧바로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인간이 웹과 앱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종이책만의 매력을 누리는 한 종이책의 생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할 것이다.


한기호 소장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출판전문 격주간지 <기획회의>와 월간 <학교도서관 저널> 발행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디지털과 종이책의 행복한 만남』, 『디지로그 시대 책의 행방』, 『책은 진화한다』,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