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05년 02월

성(聖)의 언어를 요청하다

문화읽기 이승우 소설가 _ 조선대 교수

스님들이 쓴 책은 일반인들에게 부담 없이 잘 읽히는데, 목사님들이 쓴 책은 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오래 전에, 그러니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던 청년 시절에 했다. 그 의문은 내 안에 잠복해 있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었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법정은 말할 것도 없고, 틱낫한의 책이 베스트셀러이고, 현각이나 원성의 책들 역시 대중들에게 인기다. 달라이라마도 빼놓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지금 나는 그 의문에서 비롯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풀어 보려고 한다.


책은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
우선 일반인들이 많이 사서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이 곧 좋은 책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이른바 베스트셀러에 대한 평가의 문제이다. 잘 팔린다고 해서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조건 나쁜 책이라고 매도할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이라면, 무엇이든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꼭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잘 팔리는 좋은 책이 있고, 잘 팔리는 나쁜 책이 있다. 아니, 잘 팔리고 안 팔리고는 통계의 문제이므로 규정이 가능하다고 쳐도, 엄밀히 말해서 좋은 책이냐 나쁜 책이냐는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책의 평가는 그 책을 읽은 사람, 이른바 개별 독자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읽는 사람에게만, 좋거나 나쁘거나 한다. 그러니까 이 평가는 아주 경험적이고 주관적이다. 독자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진 독립된 왕국의 군주이다. 그곳은 외부와 구별된 자치구이다. 누가 무슨 책을 좋다고 말하느냐는 주권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 사람에게 좋은 책이 저 사람에게는 좋지 않을 수 있다. 이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책이 저 사람에게는 놀라운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책이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책의 좋고 나쁨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일반인들에게 부담 없이 잘 읽히는 스님들의 책과 그렇지 못한 목사님들의 책을 비교했다. 이 말은 해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우선 법정 스님이나 현각 스님의 책을 사 읽는 독자를 ‘일반인’이라고, 그러니까 불교 신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근거가 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통계적인 근거는 없다. 불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들의 종교적 표현이나 태도의 차이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책이 불교 지도자들이 쓴 책보다 덜 팔린다고 단정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나에게는 통계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서적 출판사들이 불교서적 출판사보다 월등히 많다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출판사들이 펴내는 출판물의 양도 아마 상당히 많을 것이다. 문제는 그 많은 출판물들이 기독교 내부에서만 소화되고 만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현상의 내막과 그 구조를 들여다보고 싶은 것뿐이다. 내부의 믿음을 키우고, 기존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체계화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아마 기독교 출판물들 대부분이 그런 목적과 필요에 의해 집필되고 제작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적 세계관이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거나 이질적인 특별한 체계라는 식의 의견을 내야 하는데, 그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기독교의 세계관은 이질감이나 생소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충분히 보편화되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세계관이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이해를 유도해 내기가 어렵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기독교 성직자들의 책이, 출판되는 양에 비해,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의 책에 비해,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 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독교 저작물, 보편성을 고려하라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출판되는 기독교 저작물들의 필자들이 기독교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일의 중요함을 크게 느끼지 않고 있다. 그것은 울타리 안의 신자들을 위한 훈련과 교육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거나, 일천만이 넘는 기독교 독자들만을 대상으로 해도 상업적 이해타산이 맞는다는 식의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세상과 차별화 하려는 욕구가 너무 강해서 일종의 순혈주의적 사고를 만들어 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두려움이거나 오만이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요소들이 두루 연관되어 있겠지만, 최소한 일반인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저작물들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지엽적이고 이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네’ 책이라고 찍히는 순간 일반적인 유통은 불가능해진다. 울타리 안에 있는 신자들의 교육과 훈련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울타리 바깥에도 독자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일반 독자들을 고려하는 글쓰기에 소홀하다는 것은 선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관심을 가진 한국의 기독교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보편을 얻지 못한, 또는 보편을 그 안에 끌어안지 못한 특수는 불편함의 정서를 야기하기 쉽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사님들의 글이 일반인 독자들을 다소 불편하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때문이다.


삶에 대한 통찰의 언어를 담아라
독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글을 통해 얻으려하는 것은 정신의 고양이나 삶에 대한 남다른 통찰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언어를 통해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 언어는 세속의 언어와 구별된 정신의 언어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스님들의 언어가 상대적으로 일반 독자의 종교 저작물에 대한 기대심리를 더 많이 충족시켜 준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언어 역시 종교적 표현이나 태도의 차이에 의해 달라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대적으로 외향적이고 윤리적이며 현실 참여적인 경향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언어 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신의 고양이나 삶에 대한 남다른 통찰의 요청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이 지나치게 세속화되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신자들의 삶을 이끄는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의 발현인지 모르겠으나, 더러는 평신도들보다 훨씬 세상 이치에 밝고 처세를 잘 하고 출세를 위한 전략에도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세속의 삶을 필요 이상으로 속속들이 너무 잘 꿰고 있다는 생각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눈에 보이는 외형의 근간이고 토대인 정신과 영혼의 깊이에 대해서 둔감해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일반 독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더불어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이 영혼의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메시지들이 뜬구름 잡는 식이어서는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재테크나 처세술 강좌 같으면 더 곤란하지 않겠는가. 깊이를 상실하면 종교의 언어는 천해진다. 성(聖)의 통속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이승우 교수는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이후 1993년 대산문학상, 2002년 동서문학상 수상했다. 현재 소설가로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드러나는 작품들을 창작하고 있으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생의 이면>, <에리직톤의 초상>, <식물들의 사생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