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07년 12월

‘크리스마스’와 ‘주님 오신 날’

문화읽기 이의용 소장 _ 교회문화연구소

내게도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새벽송’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서울 개봉동. 그 당시에는 주위가 온통 논과 밭, 들판이었다. 성탄절 이브가 되면 상당히 넓은 지역을 돌면서 어른들과 함께 새벽송을 했던 생각이 난다. 정말 추웠고, 먼 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설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친한 아이들과 함께 돌고 싶었는데, 편성된 조가 달라 안타까워했던 생각도 난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는 남녀 친구들과 밤새도록 합법적으로 돌아다니는 게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철이 없었던 때니까.
  선물 교환 순서는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교회 바깥 어디에도 이런 흥미진진한 프로그램은 없었다. 먼저, 남학생과 여학생이 한 주 전에 추첨을 해서 선물을 줄 상대를 정한다. 물론 상대가 누구인지는 본인만이 안다. 그리고는 선물을 잘 준비하고, 거기에 짓궂은 벌칙을 적어 넣는다. 가운데에 선물을 쌓아놓고는 사회자가 한 사람씩 불러내서 선물을 개봉한다. 도대체 내게 선물을 준 사람은 누구일지 몇 주 동안 관심사였다.
  그 당시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통행이 금지 시간이었다. 그러나 12월 24일 밤과 12월 31일 밤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12월 24일 저녁이 되면 부서별로 모여 새벽 한두 시까지 선물 교환을 하며 놀았다. 그리고는 새벽에 떡국을 먹고, 어른들과 구역을 정해 새벽송을 했다. 찬양을 하고는 그 집에서 준 선물을 큼직한 자루에 넣어 메고, 등불을 들고 밤길을 걷던 생각이 난다. 그 다음 주에는 그 선물을 인근 고아원에 갖다 주곤 했다. 이른바 ‘올나잇’. 성탄절 이브의 올나잇은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에겐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온 교인 앞에서 찬양과 연극 솜씨를 자랑했던 일도 생각난다. 그때 예수님 역할을 했던 추억이 또렷하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성탄절은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 바깥의 ‘만백성’에게도 축제의 날이었다. 평소 교회에 나오지 않던 아이들도 교회가 마련한 선물을 받으려고, 또는 선물 교환에 끼고 싶어서 그날만은 교회에 나오기도 했다.

 

 

변질되어 버린 성탄절
교회에서 시작한 이러한 성탄절 축제는, 생활 여건이 나아지면서 급속히 일반사회로 확산되었다. 교회보다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흥행을 이뤘다. 특히 성탄절 전날인 12월 24일 밤은 장사하는 이들의 마케팅 전략에 따라 연인들이 흥청망청 놀고 즐기는 ‘메리 크리스마스’로 타락했다.
  교활한 상업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산타클로스라는 괴물을 출현시켜 성탄절을 백화점 매출 올리는 날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2월 24일은 비싼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는 부담스러운 저녁이 되고 말았다. 성탄절이, 누구의 생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껏 즐기는 축제의 저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 교회의 책임도 없지 않다. 그 당시 교회의 성탄절은 바깥에는 교회 내부의 축제처럼 비춰졌을 것이다. 젊은 남녀 청소년들이 밤을 새워 노는 모습이 오늘날 성적으로 타락한 성탄절 문화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모습이 상업주의와 결탁하여 오늘의 타락한 크리스마스 문화를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성탄절을 ‘주님 오신 날’로
원래 12월 25일은 로마인들의 축제일이었다. 서방 가톨릭이 이날 성탄 기념 미사(Christmas)를 실시함으로써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탄생했다. 잘 알다시피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issa)’의 합성어다. ‘크리스마스’를 번역하면 ‘성탄 기념 미사’ 정도가 된다.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다. 성탄절을 X-mas라고도 하는데,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kristovs)의 첫 글자다. 그러나 ‘X’는 미지수나 부정의 기호로도 쓰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더 이상 교회의 것이 아니다. 원래 그랬듯이, 이제는 교회 바깥 세상의 것이 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다시 찾아와 의미를 회복한다는 건 불가능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아예 성탄절을 다른 날로 바꾸어 지켰으면 좋겠다. 그게 어렵다면 이름이라도 다시 지어 불렀으면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을 과감히 포기했으면 좋겠다. 누구의 탄생일인지 분명하지 않은 ‘성탄절’이라는 말도, ‘주님 오신 날’이라고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언어는 존재의 그릇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사물이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존재’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가치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부활절’도 ‘주님 다시 사신 날’로 고쳐 불렀으면 한다.

 

 

성탄절 문화부터 회복하자
12월 25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날이다. 축제의 날로만 마냥 즐길 수 없는 슬픔의 날이기도 하다. 주님이 오신 건 소외받고 고통받고 억눌리고 절망해 있는 이들을 위해서다. 언제까지 교인들끼리 모여서 성가대의 칸타타 연주를 듣고, 아이들의 발표를 구경하고, 서로 선물이나 교환하면서 지낼 것인가? 온 교회가 12월 25일을 ‘주님 오신 날’로 지키자.
  ‘주님 오신 날’에 걸맞은 프로그램부터 마련하자. 이날에는 정말로 주님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주님을 대신해 교회가 다가서야 한다. 그런 이웃들을 교회로 초청하거나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진짜 ‘주님 오신 날’이 될 것이다.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도 달라질 것이다. 타락해 가는 크리스마스 문화도 점차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새벽송’이 아닐까?
  다시 12월이 다가오고 있다. 12월 초가 되면 교회마다 출처 불명의 오색 전등을 내건다. 예배당 벽과 나무에 걸린 오색 전등은 밤새도록 반짝이며 동네를 밝힌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밤하늘의 별도 하나씩 안 보이게 된다는 말이 있다. 도시의 불빛이 늘어날수록 ‘고요한 밤’은 ‘시끄러운 밤’으로 변해 가고, 정작 이 날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빛을 잃게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전등 대신 ‘주님 오신 날’이라는 새롭고 명확한 이름을 예배당 벽에 내걸자. 그리고 오염된 ‘크리스마스’를 집어 던지고, ‘주님 오신 날’을 ‘주님 오신 날’답게 지키자!

 


이의용 소장은 현재 교회문화연구소와 중앙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며, CBS 라디오 <크리스천 매거진>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이 통하는 교회 문화 만들기』, 『말이 통하는 거리를 산책하고 싶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