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08년 04월

깨끗한 부자,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문화읽기 김상득 목사 _ 전북대 교수

최근 부자학연구회의 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는 성인 201명을 대상으로 ‘존경받는 부자’에 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2명 중 1명은 부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았다고 생각하며, ‘현재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고 있다’고 보는 국민은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이 조사결과는 부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의 초대 장관 재산이 평균 39억원이라는 보도에 대해 누리꾼들은 강남 땅 부자를 풍자하여 ‘강부자 내각’ 혹은 ‘강금실 내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부를 비아냥거렸다.
  다른 사람의 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우리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새해 인사가 될 정도로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이는 크리스천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며, 목회자도 이에 동승하여 부자가 되는 꿈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쯤 되면 재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표가 된다.

 

 

어떻게 부자가 되는가?
그러면 부자가 신앙인들의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돈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 하나님은 재물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신다. 재물은 복음 전파와 이웃 사랑을 위해 얼마든지 선하게 이용될 수 있다. ‘부자됨’ 자체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거창한 ‘하나님의 일’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가 아닌 땀방울의 결실로 얻은 재물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따라서 재물을 얻기 위한 노력 역시 신앙적으로 정당하다. 문제는 “어떻게 부자가 되느냐?”의 물음이다. 이 물음에는 다시 두 가지 물음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수단의 물음이요, 다른 하나는 목표의 물음이다. 깨끗한 방법이 무엇이냐의 물음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세상의 법과 윤리를 온전히 준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부끄러움 없는 ‘깨끗한 방법’을 사용하여 부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쌓은 부에 대하여 윤리적, 신앙적으로 비난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후자의 물음은 부자됨을 삶의 목표로 적극 추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말한다. 물론 부자됨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신앙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다양하다. 즉,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 내지 소유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또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예를 들어, 의사는 의술을 펼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교사는 학생들을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한다. 부자 역시 재물을 통해 선교와 이웃 섬김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의사나 교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듯이, ‘깨끗한 청지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유독 부자에 대해서만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는가?

 

 

과정적 이웃 사랑과 결과적 이웃 사랑
부자됨에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이웃 사랑을 외면해도 괜찮은가의 물음이요, 다른 하나는 부자가 된 다음 과연 그 재물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자면 끊임없이 재투자를 해야 하고, 또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마땅히 베풀어야 할 이웃 사랑이 소홀히 취급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는 비단 부자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자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일정한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렇지 않았으면 베풀 수 있었던 이웃 사랑이 실천되지 않을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다.
  물론 목표 추구의 과정에서 베풀어야 할 이웃 사랑과 목표 달성 후 베풀어야 이웃 사랑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지만, 단지 이웃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자됨의 과정을 신앙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후자의 물음, 즉 재물을 선용할 수 있는가의 물음도 부자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의사나 변호사의 경우에도 항상 선하게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이웃 사랑보다는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목회를 이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목표 성취 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물음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요, 개인 신앙의 문제이지 목표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부자에게 이 물음이 심각하게 제기되는 것은 재물 내지 돈이 갖는 특성 때문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된 다음, 그 재물을 청지기로서 아름답게 사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상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후보가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원래 돈 내지 화폐는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되었다. 모든 거래는 돈을 매개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교환가치의 척도 역할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전능의 손’이 되어 버렸다.
  돈은 단지 수단적 가치를 지닐 따름이라고 아무리 역설해도 소용없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 돈이 시간이 되었고, 노동이 돈이 아니라 돈이 노동이 되었다. 돈이 아니라 쌀이 육의 양식이지만, 돈이 곧 쌀이다. 돈이 있다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돈이 없으면 교회조차 가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돈은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신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돈의 논리와 헌신된 믿음
돈은 이론적으로 분명 수단에 불과하지만 이제 인간은 돈 없이 살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돈이 더 큰 매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돈의 이중성이다. 돈이 갖는 힘으로 인해 우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싶은 유혹을 매순간 받는다.
  돈이 갖는 힘으로 인해 우리는 돈을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이기적 욕망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충동을 날마다 받는다. 돈도 양질전환의 법칙에 따른다. 즉, 돈이 얼마 되지 않을 때에는 인간이 돈을 지배할 수 있으나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거꾸로 돈이 ‘맘몬’이 되어 인간을 지배한다. 우리는 이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죄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돈의 논리’를 거스릴 힘이 없다. 오직 성령만이 돈의 논리를 거역할 수 있다.
  무엇이 되느냐? 이는 중요한 물음이나,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은 더 중요하다. 무엇이 되느냐의 물음은 꿈이요, 비전의 문제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헌신의 문제이다. 헌신의 마음으로 자신을 무장하지 않으면 동기 부여가 쉽게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하고 바르게 사용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깨끗한 부자 청지기를 꿈꾼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헌신이 요구된다.

 


김상득 교수는 서울대 및 동대학원을 거처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했다. 현재 전북대 철학과 교수 겸 하나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의료윤리학』(철학과현실사), 『윤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에클레시안)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