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012년 03월

외면당한 제자도의 원형, 노예 제자도를 그리다_『슬레이브』(존 맥아더 저, DMI)

서평 송태근 목사_ 강남교회

안락함을 즐기던 21세기 기독교에 던지는 충격파. 아마도 『슬레이브』를 정직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강해 설교자 존 맥아더는 본서를 통해 복음이 말하는 그리스도인 됨의 원형이 무엇인지 매우 성경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제자도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사실상 신복음주의-이것을 하나의 색깔로 단순화시킬 수 없음에도-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소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특징적인 자세를 강조하면서 행동하는 실천가가 되는 것을 제자도의 최고봉으로 치켜세워왔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신복음주의적 제자도는 결국 종교적 도덕주의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늘 그 한계성으로 인한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흐름에서 개혁주의를 충실히 따르는 존 맥아더가 던지는 은혜 교리의 열매로서의 제자도는 고전적인 느낌이지만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급진적이다. 그는 “성경 전체에 걸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노예로 언급된다”라고 선언한다. 비록 그가 ‘제자도’라는 단어 자체는 몇 차례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과 동일시하며, 이것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로 규정한다.

외면당한 제자도, 노예 됨
한국어판 부제를 ‘우리가 외면해 왔던 불편한 진실’이라고 붙였듯이, 저자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노예로 표현되고 있으나, 사실상 그와 대조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잊혀진 가르침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는 현대 문화와 세속적 가치에 물든 기독교의 현주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충격적이게도 간단한 이유, 성경 번역상의 오류 때문이었음을 주장한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헬라어 단어 ‘둘로스’의 원의는 ‘노예(slave)’를 뜻하지만,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종(servant)’으로 대체하고 있다. 헬라 언어와 문학 속에서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는 종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의미였음을 저자는 여러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논증한다.
사실 치욕적인 서구 역사의 단면인 노예제도에 대한 반감으로 초기 영역본들이 노예 대신 종으로 번역하기 시작했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이를 시작으로 성경상의 매우 중요한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제 감추어진 진리가 되어 기독교 신앙을 ‘안일한 믿음주의(easy-believism)’로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저자는 오늘날 연약해진 기독교, 구원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이 점에서 밝힌다.
맥아더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이 쓰인 시대의 로마, 그리스 문화 속에서 ‘종’은 고용된 자요, 자치권이 있었던 반면, ‘노예’는 소유된 자요, 주인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던 자였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 속에서 노예로서의 제자도를 잃음으로 약화되어진 복음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이 전달되며,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은혜 교리의 열매로서의 노예 제자도
저자는 보다 더 근본적으로 노예 제자도의 정당성을 전적인 예속 교리, 즉 은혜 교리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이 부분이 종교적 도덕주의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제자도에 관한 최근 논쟁은 그것이 성경에서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단단한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지 못하다는 결함을 안고 있었다.
논의의 주도권을 쥔 신칼빈주의자들은 복음을 도덕적 수행과 이데올로기적인 실험으로 규정했고, 그 결과 이제는 사회적 정의를 구원의 수단과 혼동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더 이상 대속적 속죄교리에 대하여 강조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맥아더는 이렇게 희석된 현대복음주의자들의 제자도에 일침을 가한다. 저자는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위치를 죄가 “무자비하게 이용하면서도 실제적인 보상은 전혀 제공해 주지 않는 가혹한 감독관”으로서 노예 삼고 있었던 상태로 이해한다. 그리고 과거에는 죄라는 주인에게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듯이, 이제는 새로운 주인에게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노예 됨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로마 시대에 노예가 주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인이 노예를 선택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예속시키셨고, 노예가 되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임을 주지시킨다.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죄의 노예’와의 차별성을 둔 ‘의의 노예’에 관한 저자의 논지는 정당하며, 책의 전반에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정체성 인식 이후
로마 시대의 노예제도, 교회사의 증언, 교회론과의 연계성, 은혜 교리의 강조 등 저자가 펼쳐내는 노예 제자도의 논지는 일관성을 유지하며 매우 성경적인 울림으로 다가온다. 특별히 마지막 장을 할애하여 초대 교회에서 현대 교회에 걸쳐 등장한 그리스도인의 노예 됨에 대한 설교를 인용한 부분은 본서를 매우 효과적으로 마무리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급진적인 노예 제자도는 다소 ‘우리만의 리그’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떻게 현 사회 속에서 노예 됨을 펼쳐낼 수 있을지 실천적인 범주에서 종교적 도덕주의와는 차별화된 대안이 제시되기를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도 기대했다. 노예 제자도가 성경의 핵심 가르침인 전적인 은혜 교리에서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또한 실천의 영역에서도 핵심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숨어 있는 보화”인 ‘그리스도인은 노예다’라는 명제가 실제 우리의 삶의 정황 속에서 어떻게 이루질 수 있을지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한국어 성경도 대부분 둘로스를 ‘노예’가 아닌 ‘종’으로 번역한다. 서구 사회의 배경과 같지는 않지만,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이 전적인 노예라는 가르침은 강조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처럼 실천적인 범주의 부족함에도, 『슬레이브』는 사실 이 제자도가 신약성경의 신자들에게 기초적인 삶이었다는 도전과 함께, 안일한 신앙에 머물고 있는 한국 독자에게도 분명 충격적인 제자도를 그리게 할 것이다.


송태근 목사는 총신대학교대학원, Golden Gate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Fuller Theological Seminary(D. Min.)를 졸업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국제 총신 이사, 교회갱신협의회 상임 총무, 기독신문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강남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