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관 추태화 교수_ 안양대학교
인간은 본질상 관계적이다. ‘인간’(人間)이란 단어를 뜯어보면 사람 인(人)자와 사이 간(間)자가 결합돼 있다. 사람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대상과의 ‘사이’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회적 존재’(homo sociologicus)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작동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부부가 탄생했다. 여기서 사회의 가장 기초가 되는 가정이 시작됐다. 가정이라는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전제돼야 하는가?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사랑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성경은 모든 사회의 기본을 ‘사랑’이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속성 중 일부를 인간에게 허락하셨다. 그 ‘공유적 속성’ 중 하나가 사랑이다.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도 인간 차원의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다. 사람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의무인 동시에 권리며, 존재의 궁극적 이유다. 선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토대가 돼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을 기초로 한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깨닫고자 했던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신 복음의 원동력도 바로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로,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예수님께서는 신적인 아가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그리스도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이 사랑이 실천될 때 죄로 물든 세속 사회, 왜곡된 인간관계가 구원의 여정을 따라 성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율법의 완성은 곧 사랑에 있다고 강조했다(롬 13:10).
죄와 인간관계
문제는 어느 시대이고 온전한 사랑이 작동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죄악이 깃들어 있고, 죄악은 그 관계를 지극히 이기적으로 변질시킨다. 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homo politicus)은 이로부터 발생한 갈등과 대치하게 된다. 갈등이 긍정적인 역할을 할 때는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순기능적으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라면 분명 비상한다. 그러나 인간 사이에 사랑, 공의, 정의, 용서, 화해, 상생의 지혜가 부족할 경우, 갈등은 역기능적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 비극적 종말이 전쟁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친구는 과연 누구인가? ‘역경 속에 있을 때 진정한 친구를 구분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누가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장)를 들어 이 문제를 풀어주신다. “너도 (자비를 베푼 자와 같이)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넉넉한 뒤주에서 인심난다”라는 말처럼, 좋은 시절에는 어떤 관계든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원수’같이 느껴질 때, 누군가를 별 이유 없이 시기하고 그에게 원한을 갖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윗처럼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시 3:7)라며 원색적으로 저주를 퍼부어야 할까? 아니면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마 5:44) 해야 할까? 보통 사람의 감정으로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경우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진다.
신앙 양심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유하지만, 인간적 속성은 뺨이라도 한 대 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감정을 노출하거나 폭발하면 신앙 없다는 정죄의 화살이 빗발칠 것만 같다. 말씀은 이렇게 가르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공의로운 감정이요, 신앙에 따른 행동이란 말인가.
진리로 자유로워지자
신앙 때문에 자아를 너무 억누르다 보면 스트레스로 병이 생길 수 있다고 상담 이론은 경고한다. 어느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모든 것이 내 탓이오’라고 말하며, 무한 책임을 느끼고 조직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른바 ‘메시아 콤플렉스’다.
이는 그리스도인 주부가 집안의 모든 일을 ‘자기 탓’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와 유사하다. 모든 사건을 신앙관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메시아 신드롬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처럼 긍정적으로 승화돼 공동체에 활력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 변질되면 심각한 불안장애나 연극성 성격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신앙 때문에 인간관계의 가면을 쓰게 되는 부담을 버려야 한다. 감성과 감정이 인간관계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대, 불편한 관계에서 자유하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인간(人間)은 사랑과 자유가 불어오는 큰 숲에서 행복한 호흡을 해야 하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