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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려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 하나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왔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아졌다. 시간을 내서 잠시 쉴 수도 있고, 사고 싶은 물건도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제 이만큼 이뤘으니 여유를 갖고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작 내게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꽉 채워진 일정표 속에 이끌려 다니는 내 모습은 지쳐 있었다. 나는 여전히 달려가고 있었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내 인생을 헤쳐 나가려고 더 큰 몸짓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에 두려워졌다. 이러다가는 내가 내 인생의 속도를 못 견뎌서 넘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를 늦추고 걸어가야겠다고 결단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결정한 것들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가지 어려운 일들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던 프로젝트 진행을 멈췄다. 더 이상 분주해지지 않도록 내 인생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 한적한 숲으로 들어갔다. 일상을 벗어나 깊은 숲길을 걸으면서 ‘성급하게 그만 달려가고, 이제 걸어가 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내가 일상에서 놓치고 사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KTX를 타고 달리는 것처럼 멀리 있는 풍경은 잘 봤는데, 정작 아주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었고, 계절을 따라 피고 지는 소중한 자연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생명이 꿈틀대는 봄, 숲길을 걸으면서 막 피어난 바람꽃을 볼 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과 돋아나는 새싹들과 새싹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내 마음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너무 빨리 달리다 놓쳤던 소중한 것들을 마주하니 내가 행복해졌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아내의 표정 속에 담긴 마음을 읽게 됐고, 훌쩍 커 버린 아이들의 생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다. 나이 들어 너무 빨리 달려가려고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기껏 달리고 달려 돌아올 자리는 내 가족과 함께하는 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