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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죽겠네 = 주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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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힘들어 죽겠다.” 짐을 나르다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한마디. 남편이 말한다.
“죽으면 되나? 살아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말에 ‘죽겠네’가 너무 많다. 이어령 교수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란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말끝마다 좋아 죽겠다고 하고, 슬퍼 죽겠다고 하고, 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배고파 죽겠다고 하고, 배가 부르면 이번에는 배불러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런 동족들이 싫었고 부끄러웠지요. 하지만 죽음은 삶의 극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에게 잊지 못할 슬픔을 안겨준 세월호 사건은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고백해야 할지를 가르쳐 줬다. IMF를 통해 전 국민이 제대로 된 ‘경제 교육’을 특별 과외 받았듯이, 이번엔 ‘가족 사랑’의 가치를 깨달았다. 나아가 우리는 ‘죽음 교육’을 통한 삶의 예방 백신을 접종받아야 할 때다. 모든 생명이 주께 있음을 깨우칠 때는 언제일까?
한 선교사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던 가사 도우미는 말끝마다 ‘죽겠네’를 연발하고 다녔다. “더워 죽겠네.” “힘들어 죽겠네.” “짜증나 죽겠네.” “하기 싫어 죽겠네.” 그 말을 새겨들은 선교사의 보고기(報告記)는 이랬다.
“한국 사람들의 신앙은 보통이 아닙니다. 한 순간도 놓칠 새라 ‘주께 있네’를 고백하며 삽니다.”
‘죽겠네 = 주께 있네’
이 얼마나 멋진 고백인가? 괜스레 설거지를 하다 말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생명 주께 있네. 능력 주께 있네. 소망 주께 있네. 주 안에 있네.’
극한의 상황이 닥쳐올 때도 난 여전히 노래한다.
“생명 주께 있네. 능력 주께 있네. 소망 주께 있네. 주 안에 있네.
생명 다해 주 찬양하리. 힘을 다해 주 찬양하리.
내 생명 다해 내 힘을 다해 모든 소망 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