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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부적응자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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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이 뒤바뀐 시대다. 특히 자녀양육은 대표적인 예다. 몇 해 전 방영된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애를 봐 달라고 맡겼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아이가 뜨거운 국에 데어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이 일로 화가 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뺨을 때렸다. 시어머니는 온 종일 분한 마음을 삭히다 퇴근한 아들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아들은 싸늘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맞을 짓을 했네요. 애 좀 잘 보지 그랬어요? 애 엄마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갑자기 비가 쏟아진 날이었다. 양손에 짐을 잔뜩 챙겨 들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 택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온 몸은 비에 흠뻑 젖어들었다. 마침내 택시가 도착했다. 달려가 손잡이를 잡는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아줌마, 제가 먼저 서 있었어요! 왜 새치기하고 그러세요?” 분명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누굴까 싶어 돌아보니 초등학교 1학년으로 보이는 딸과 엄마였다. 어깨에는 학원 가방을 메고 각기 우산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채 반응도 하기 전에 모녀는 나를 밀치고 택시를 탔다.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보니 서글펐다. “저 아이가 무엇을 배울까?”
일류 대학 진학이 목표가 돼 인성, 영성, 품성, 감성, 도덕성은 내팽개쳐진 지 오래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 영유아기 자녀들도 예외는 아니다. 오죽하면 두 살배기 자녀에게 언어장애, 정서적 자폐, 소아 우울증이 생기겠는가? 집집마다 군림하고 있는 오만한 왕자와 공주는 사회 부적응자를 양산하는 통로가 된다.
성경은 말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상 모든 사람이 옳다고 따라가더라도 그 유행에 부적응자로 남아야 한다는 말이다. 비단 자녀 양육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부적응해야 할 일은 많다.
한 아버지의 고백이다. “저는 자존심 세우는 일, 다른 사람 흉보는 일, 아내에게 소리치는 일, 잠자는 아내 깨워서 잔심부름시키는 일, 가족 외식자리에서 카톡하는 일, 학교 성적으로 아이를 평가하는 일에 부적응자가 되고 싶습니다.”
시대적 조류는 일시적 현상이어야지 주된 흐름이어서는 안 된다. 비정상이 정상인 것이 시대적 조류라면, 정상이 정상인 것 그것이 주류여야 한다. 이 흐름을 이끌어야 할 이들이 있다. 바로 부적응자가 돼 부적응 선언문을 낭독하는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