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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고린도의 첫 회심자 스데바나

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1:2)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신앙 문제들을 다룬다. 따라서 교회에 속해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가르침을 많이 준다.
고린도에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됐고(1:17; 행 18:1), 그 복음을 받아들인 고린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라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1:2).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1:21)인 십자가의 복음에 어울리지 않는 삶의 모습들이 있었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의 분열이나 우상의 제물 등에 대해 책망도 받고 바른 신앙의 길도 배워야 했던 고린도교회의 영적 실상 그 한가운데서 바울에게 칭찬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고린도 지역의 첫 회심자인 스데바나이다. 고린도전서는 그가 사도 바울에게 위로와 기쁨이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6:17~18). 물론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는 성도요, 그리스도의 제자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고린도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 끝에 권고와 인사의 말을 건네면서 특별히 스데바나를 언급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를 ‘아가야의 첫 열매’(16:15)라고 소개한다. 본문이 스데바나를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아가야 지역에서 첫 회심자라는 것의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가야는 당시 로마 제국 그리스 반도 남부를 아우르는 주(州)다. 이방 땅 로마 제국의 주요 지역 중 하나인 아가야 주 전체에서 첫 회심자라는 말이다. 특히 고린도에서 말이다. 경제적으로 풍요했고, 종교적으로는 ‘신전의 도시’라 칭할 만한 고린도가 어떤 도시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는 바로 그 이름이다. ‘고린도인이 되다’라는 헬라어 ‘코린티아조마이’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다’는 뜻으로 통용됐다.
그러면서도 고린도는 선비요 변론가와 같은 ‘지혜를 찾는 자’(1:20, 22)로 불리기를 자랑스러워했던 도시였다. 고린도의 관점에서 한없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스데바나의 회심이 진정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는데(1:16), 물질과 쾌락, 종교와 철학을 자랑하는 고린도에서 그가 십자가 복음 앞에 온전히 굴복하지 않았다면 결코 세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데바나는 우리를 반성의 자리에 서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무시하는 이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분명한 ‘제자의 길’에 서라고 도전한다.

소명에 응답하고, 충성됨으로 섬기다
스데바나는 회심한 이후 소명에 응답할 뿐 아니라, 그 소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인물이었다. “형제들아…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 지라”(16:15). 이 본문을 새번역성경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이라고 옮겼다.
스데바나는 십자가의 복음을 만난 후, 성도를 섬기는 삶을 소명으로 발견했다. 이런 섬김은 마침내 그가 여러 곤란한 문제들 앞에 갈등하고 분열돼 있는 고린도교회를 대표해 바울에게 갈 수 있을 만큼 충성스런 인물임을 보여 준다. 분열과 갈등으로 고통하는 고린도교회 공동체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지 않고는 대표자로 세워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고린도교회를 대표한 스데바나의 방문이 바울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16:17).
가슴 아프게도 오늘날 이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지역 교회 안에는 약점이 있고, 아픔이 있으며, 진통하는 과정이 있는 게 현실이다. 이번 달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면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보고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깨달을 뿐 아니라, 고린도의 첫 회심자 스데바나를 통해 우리 모두 신앙적 도전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