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
진정한 고백이라면 거기에는 그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모든 경험과 지식, 감정까지 녹아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진솔한 고백은 그를 훤히 들여다보게 하는 창문이 된다. 바울의 여러 서신 가운데 자기 고백 없이 적어간 편지는 단 한 통도 없다. 고린도전서 역시 바울 자신의 절절한 고백이 편지를 더욱 힘 있게 한다. 이렇게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창문을 곳곳에 만들어가면서 이 글을 쓴 바울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갈증이 생긴다.
고백의 사람
이번 묵상 본문 가운데 특별히 내 영혼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대목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2장 2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바울은 무슨 의미로 예수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더욱이 그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인가?
바울이 “예수와 십자가만 알기로 한다”고 선언한 것은 1장의 문맥 속에서 나온 고백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믿음의 공동체 안에 분파주의로까지 발전한 성도 간의 갈등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소명이 오직 복음 전파에 있다는 점과, 이 소명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1:21)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전도라는 방법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도’란 요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런 전도 방법이 아니라 전도의 내용,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킨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주장하는 방식은 이 세상 속에 가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놓고 따져야 한다고 주장하는(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당시 로마제국으로부터 실제 해방되는 것)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걸림돌이었고, 또 인간 이성의 논리와 깊은 사색을 통한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봤다. 바울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1:23~24).
그러므로 바울의 “예수님과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한다”라는 고백은 사람들이 아무리 미련하다고 하고, 걸림돌이 된다고 해도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5)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람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그가 참으로 십자가의 사람인 것을 확인한다.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해서만 알기로 한다는 것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구원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말이다. 즉, 그 어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나 노력 혹은 종교적, 윤리적 능력으로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이뤄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바울은 철저한 십자가의 사람이었다.
바울은 자신처럼 되지 않고서는(참조 고전 11:1) 고린도교회라는 신앙 공동체가 직면한 갈등, 분열, 무질서, 영적 혼란, 음행, 권위, 우상 숭배 등과 같은 문제들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전서를 통한 십자가의 사람, 바울 탐구는 세속화와 다원주의 세상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믿음의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