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
바디매오, 마가복음 10장 46~52절에 그에 대해 말하는 두 가지 칭호가 있다. 곧 맹인이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참조 눅 18:35)이라는 것. 이 둘 가운데 하나로만 불려도 당시에는 죄인으로 취급받았기에 바디매오는 ‘이중 불행’에 빠진 ‘확실히 불행한 사람’이었다.
불행의 사람, 그러나…
바디매오를 지칭하는 이름들에는 그에게 가장 커다란 삶의 근거요, 배경이 되는 유대교로 인해 도저히 버텨내기 힘든 마음의 고통까지 더해 있었다. 첫째로 맹인은 죄와 연관돼 있다는 사상 때문이다(참조 요 9:2~3). 둘째로 거지의 삶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참조 시 109:10).
이러한 바디매오에게 삶의 반전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 가지의 난관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맹인이요, 거지라는 사실이다. 두 번째 난관은 많은 사람들의 꾸짖음이다(48절). 정상인이라도 뚫고 나서기 힘든 많은 사람의 꾸짖음 세례를 맹인인 그가 받은 것이다. 세 번째는 두려움의 난관이다. 바디매오는 “안심하고 일어나라”(49절)는 말을 듣고서 마침내 일어난다.
이 모든 난관은 모두 절벽과도 같았고, 그를 움쩍달싹하지 못하게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만한 불가능 그 자체였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우리네 삶의 모습이 아닌가! 바디매오는 우리에게 말한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그 어떤 어려운 문제도 없다고 말이다.
복음의 사람이 되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바디매오는 마가가 말하려는 복음을 아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 된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행동으로 외치게 된다.
바디매오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마가복음의 문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지속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오해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예수님의 발걸음이다.
예수님은 적어도 세 번 이상 십자가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다(8:31, 9:31, 10:33 ~34).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문제로 분노를 터트리는 데에 이른다(막 10:35~45). 이미 “서로 누가 크냐”(막 8:34)는 논쟁으로 드러났던 터라 이 오해는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게다가 부자 청년의 사건과 이혼 문제로 하나님을 오해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완악함까지 드러낸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있던 터였다.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통해 더욱 분명해져가는 십자가 복음의 맥락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오해와 불신 또한 더욱 분명해져만 간다.
바로 그 맥락 한 가운데 박혀 있는 인물이 바디매오다. 그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는 말씀의 당사자가 되면서 ‘최고로 불행했던 사람’이 ‘최고로 복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보여 준 단적 예다.
그런 사람이 그 길을 따르게 되리
바디매오 이야기는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52절)로 맺는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막 11:1)로 이어진다. 마가는 예수님께 잘난 사람들이 많이 다가왔지만 오해에 머물렀을 뿐 정작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의 길, 곧 고난의 길을 따르는 자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바디매오는 마가복음이 시작하면서부터 말하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을 드러내는 중심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전심으로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수님을 바디매오처럼 만나야 예수의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