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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절망과 경건 사이에서 쓰임받은 사가랴

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사랑의교회)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제사장 사가랴와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한다(눅 1:5~25, 57~80). 사가랴에 대한 말씀은 영적으로 압도하는 위대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그것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절망의 상태를 동시에 묘사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눅 1:5~7).


절망과 경건 사이에서
어찌 성경이 인간에 대해 이렇게 위대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부부를 함께 말이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더욱 놀라운 일은 이들 부부가 성령 충만함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눅 1:41, 67). 이는 오순절이 돼서야 비로소 교회가 경험하게 된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 사건 이전이라 더 놀랍다.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삶의 난관을 돌파하는 기적 같은 이야기가 가득하지 않았을까? 아니, 최소한 이들의 믿음을 증명할 만한 실화 하나쯤은 소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그 부분에 대한 언급 없이 스가랴 부부의 슬픔과 절망의 현실을 드러낸다.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눅 1:7).
구약과 유대교의 관점에서는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불임과 동시에 나이 많음은 가장 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 말해, 사가랴는 당시 가장 저주스러운 현실인 불임에, 나이 많음까지 더해진 주인공이었다. 이것이 견디기 힘든 상태였으며, 특히 사람들 앞에서 힘들었음은 엘리사벳의 고백에 배어난다.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눅 1:25).


의인이지만 불임으로 절망했던 사가랴
바로 그런 사가랴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인물이자(눅 1:15~17), 메시아의 길을 앞서 준비하는 인물(눅 3:4)인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된다. 사가랴는 어떻게 이런 영광스러운 믿음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특히 믿음에 있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눅 1:20). 그는 아들을 낳으리라는 주의 사자의 예언에 대해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눅 1:18)라고 말함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넘지 못한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사자가 전하는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반응을 보인 인물이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된 사가랴
하나님 앞에 의인이면서도 불임과 노년이라는 절망의 상황에 놓인 사가랴, 흠이 없으면서도 스스로의 한계를 넘는 믿음의 자리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사가랴. 그런 그가 메시아 시대를 준비하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된 사건은 크게 두 가지의 영적 도전을 준다.
첫째, 그는 기도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눅 1:13a). 여기서 ‘간구’는 사실 아들을 달라는 기도였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눅 1:13b). 사가랴는 기도의 인물, 임신의 희망이 사그라드는 때에도 끊임없이 기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세례 요한으로 응답되는 길을 열었다.
둘째, 그는 찬양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눅 1:64, 참조 1:68). 아이를 낳으리라는 주의 사자의 말씀에 불신으로 반응하다가 출산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된 사가랴는 다시 입을 열게 됐을 때 첫 반응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주님을 향한 솟구치는 찬양과 감사를 누르고 누르며 참다가 터뜨린 것이다.
누가복음 묵상을 통해 사가랴가 보여 주는 쉬지 않는 기도와 터져 나오는 찬양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가득하기를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