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이원희 목사(한국성지미디어 원장)
아우(남 유다)로 비유된 소돔의 폐허(겔 16:46)
바벨론 포로 시대에 활동한 에스겔 선지자는 유다(이스라엘)의 간음과 임할 형벌을 예언하는 가운데 그들을 향해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하는 어머니의 딸이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다. 또한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 네 형은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소돔’이라고 외쳤다.
소돔의 지명은 어원의 파생에 따르면 ‘들판’, ‘불탐’, ‘둘러싼 공간’ 등을 의미한다. 소돔의 위치에 대해서는 몇 곳이 주장되고 있다. 그중 한 곳은 사해 동쪽 리산 반도 바로 남쪽으로, 오늘날 요르단의 밥 에드 드라(Bab edh Drhra)라고 불리는 곳이다.
1987년에 이 지역을 조사한 라스트(Rast)는 이곳이 BC 2500~2350년 청동기 시대의 거주지였으며, BC 2350년에 두 마을이 폐허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창 19:24~28)에 대한 성경의 기록과도 시대적으로 부합한다.
소돔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창 18:32)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고 유황불로 멸망당했다. 이 일로 성경은 여러 번 교훈을 들어 소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신 29:23, 사 13:19, 렘 23:14). 예수님도 심판 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성을 언급하셨다(마 10:15).
오늘날 불에 타고 남은 이곳의 흔적은 그 옛날 에스겔 선지자가 타락한 소돔보다 더 부패한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에 대해 외친 말씀(겔 16:47~50)을 떠오르게 한다.
오홀라로 비유된 사마리아의 로마 때 광장(겔 23:4)
에스겔 선지자는 음란한 두 자매의 비유에서 사마리아를 형인 오홀라로, 예루살렘을 아우인 오홀리바로 비유하며 사마리아의 음란에 대해 심판을 외쳤다.
형으로 비유된 사마리아(Samaria)는 본래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이 세멜(Shemer)에게 은 두 달란트를 주고 매입한 산 위에 건축한 성이다. ‘사마리아’라는 성 이름은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왕상 16:24).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 74㎞ 지점, 세겜 북쪽 13㎞ 지점, 지중해로부터는 동쪽으로 약 40㎞ 지점에 있는, 오늘날 세바스티아(Sebastia)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의 중앙 산악지대에 위치한다. 고대 세겜(텔 발라타)으로부터는 서북쪽으로 직선거리 12㎞ 정도 떨어져 있다.
여로보암 2세 때(BC 786~746) 최고의 번성기를 누린 사마리아는 여로보암 2세의 죽음과 동시에 그 번영의 막을 내렸다. 이후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때 살만에셀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왕이 된 사르곤(Sargon) 2세에게 BC 721(722)년 함락되었다. 멸망 후 이곳에 있던 주민들은 추방당했으며, 사마리아는 다른 정복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거처가 되었다. 이로 인해 다시 건설된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중요 행정구역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 이곳 세바스테(사마리아)에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신전과 오바댜 선지자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유적과 그 외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특별히 사마리아 성을 포함한 중부 산간 지방 전체를 사마리아 지방이라 부르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칭한다. 이들은 앗수르의 포로 생활 때 대부분 앗수르의 혼혈족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들을 멸시하는 말로 ‘사마리아인’이라 불렀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에 대한 감정이 나빴다. 오늘날 이곳에는 그 후손들이 거의 없고, 세겜이나 그리심 산 중턱, 텔아비브 옆 호론 지방에 600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제사터를 비롯한 성의 폐허 속에서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지라”(겔 23:49)라는 에스겔 선지자의 경고 메시지를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