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마음의 문을 열며
“잘못된 척도를 이용하면 엉뚱한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어느 학자의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국내총생산(GDP)과 같은 단순 수치를 통해 그 나라의 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척도를 연구하고 도입해야 국가들이 다양하고도 온전한 발전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매우 일리가 있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교회나 우리의 신앙 체계 안에 이런 생각이 도입되면 어떨까요? 다른 가치관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를 존중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은 많은 것을 이루어 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없고, 사죄함을 얻지 못하는 어떠한 죄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우리 신앙의 생명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 2,000년 이래로 계속해서 부딪히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죄는 다 용서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 진리를 대항하는 죄, 즉 이단의 문제는 매우 단호하게 타협의 여지가 없는 배제의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봅시다.
말씀의 씨를 뿌리며
1. 성경의 예언과 진리에 관해 말하고 나서 바로 거짓 교사들에 대해 언급하는 베드로의 의도는 무엇일까요?(1절, 참고 1:12~21)
2.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행동에는 무엇이 있습니까?(1~3절) 베드로는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까?(3절)
3. 사람들이 거짓 교사들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2~3절) 하나님이 이들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4. 심판의 예로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까?(4~7절) 범죄한 천사들과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같은 범주에 넣어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5.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나 헛된 마음을 품게 하는 가르침과 설교로 성도들을 현혹하는 거짓 교사들이나 사역자들을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그들을 잘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6. 현재 우리 교회나 교회 주변으로 가만히 들어오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단(heresy)들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들에 대한 경계나 대책에는 무엇이 있을지 말씀에 제시된 예를 가지고 서로 나누어 봅시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모든 것을 다 품고 관용하는 것이 용서와 사랑의 기독교 정신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도 이런 유연성 있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도를 삶에서 가장 잘 구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의 측면에서만 우리의 신앙을 이야기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삶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진리의 측면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진리를 외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 청결을 행하실 때에 보여 주신 의로운 분노를 보면서 진리가 정확히 선포되어야 할 엄연한 현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경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사랑 안에서 참된 생활을 하라고 가르칩니다(엡 4:15).이런 균형이 어린아이의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성장시켜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