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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열며
한 유명한 벤처 기업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든 없든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 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세에 대한 믿음만으로 현실과 치열하게 만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맞지 않습니다. 또 영원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는 동안에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너무나 허무한 노릇입니다. 다만 언젠가는 같이 없어질 동시대 사람들과 좀 더 의미 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 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거의 고행 수준의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어느 무신론자의 말입니다.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이 사람이 붙들고 있는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잡고 있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세상이 교회를 이 시대의 희망으로 보고 있지 않다면 오늘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그 단서를 찾아봅시다.
말씀의 씨를 뿌리며
1. 14절에 “그러므로”는 앞에 내용들과 어떤 인과 관계를 밝히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지침을 줍니까?(14절)
2. 베드로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15절)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대한 오해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16절)
3. 종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에 관한 베드로의 평가는 어떠합니까?(15~16절) 베드로의 관점과 바울의 관점이 다르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참고 롬 2:4) 베드로의 적대자들인 거짓 교사들이 바울의 글을 어떻게 이용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까?(16절)
4.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 보는 당시 교회들 안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잘못 해석한 이단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16절). 성도들이 이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17~18절)
5. “힘쓰라”(14절), “삼가라”(17절) “자라 가라”(18절)라는 단어들을 볼 때 무엇을 느낍니까? 베드로가 자신의 마지막 편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6. 베드로 시대에 종말을 기다리는 신앙을 강조했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기다림이 성도들의 삶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봅시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예수님이 초림해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로 세상은 늘 종말의 시대에 놓여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도들은 늘 예수님의 재림, 즉 종말을 기대하며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혹자는 고난의 시대에는 성도들에게 종말 의식을 심어 줌으로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도록 하고, 편안한 시대는 편안한 대로 늘 종말 의식을 가지고 신중하게 살라는 식의 경고를 하는 것은 아전인수식 해석이 아니냐며 비아냥거립니다. 하지만 종말의 긴박성 가운데서도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풍성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회개하지도 않고 그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엉뚱하게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범하는 극히 어리석은 생각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반면에 종말을 기대하는 진정한 성도는 힘쓰고, 삼가고, 계속해서 자라 가려 애쓰는 행동주의적 삶의 태도를 끝까지 견지해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