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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열며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신앙적, 신학적 문제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 또는 논쟁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한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느냐?”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요구합니다. 객관적으로 자기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화된 신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그런 질문에 대답을 듣지 못함으로 인해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그런 대답에 자신이 그럴듯하게 질문을 하기라도 하면 우쭐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질문이 신앙적으로 볼 때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각자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이야기해 보고, 그동안 성경 내용이나 신학적 문제에 대해 의문 나는 것이 있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말씀의 씨를 뿌리며
1. 예수님은 구원을 얻는 자들의 숫자에 대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주셨습니까? 왜 예수님이 이런 동문서답 같은 대답을 하셨다고 생각합니까?(23~24절)
2. 유대인들은 ‘부활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식의 신학 논쟁을 하며 그런 내용으로 선생과 제자가 되어 그 지식을 전수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십니까?(26~27절)
3.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기며 끝없는 신학 논쟁에 빠져들었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어떤 경고가 주어졌습니까?(28~30절)
4.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그 숫자가 적습니까?”라는 질문은 어떤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5. 우리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질문과 관심사를 돌아봅시다. 우리의 삶과 실천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허망한 지적 논쟁에 빠져 있습니까?
6. 우리 각자의 관심의 초점이 변화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제나 순종과 실천이 전제된 지식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어떤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 구원을 얻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 수가 적을까?”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식의 질문은 당시 유대교 랍비들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었고, 그에 대해 잘 대답하는 랍비가 유능한 랍비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그런 질문의 관심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 지식의 체계를 얻고자 하는 태도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교묘하게 나의 죄와 한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실천과 분리된 지식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식은 언제나 나의 실천과 적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몇 명이 받게 될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는 구원을 받을 만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