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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열며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일치할 정도로, 교회는 늘 거짓 교훈과 싸워야 했습니다. 바울 시대에도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현대 교회에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참된 교훈을 전하는 사람들을 길러내고,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배제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오는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방법과 참된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길을 배워 보려 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며
1. 양심에 화인 맞은 거짓 일꾼들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3~5절)
-> 거짓 일꾼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며 금욕주의를 가르쳤다(결혼과 식물은 기본적 욕구인 성욕과 식욕과 관련돼 있다. 요세푸스는 쿰란의 엣센파가 “쾌락을 악으로 여겨 거부하고, 극기를 덕으로 여겨 존중하면서, 결혼을 소홀히 했다”고 말했다. 이 유대교의 변형은 헬라 철학, 특히 물질을 악으로 여기고 물질세계를 경멸했던 초기 영지주의와 결합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역설한다. 혹시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거룩해지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가능해진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지 않을 것은 없다.
2. 거짓 교사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의도를 갖고 교회 안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했다고 생각합니까?(1~2절)
-> 바울은 거짓의 일꾼들이 믿음에서 떠났다고 말한다. 이들 역시 처음에는 믿음 안에 있었지만 귀신과 미혹의 영에 ‘미혹’을 당한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가르침을 전했을지 모르나 ‘자기 양심에 화인을 맞아’ 분별력을 상실하고 무감각하게 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거짓을 말하는 거짓의 일꾼이 된 것이다.
3. 분별력을 상실하고 거짓 교사가 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6~7절) 특히 왜 그들이 금욕주의적인 성향으로 빠지게 됐을지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해 봅시다.
->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양육’(6절)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의 영향을 받아 육체의 연단보다 영적 경건의 훈련의 중요함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건의 훈련은 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일꾼이 되는 비결이다. 진리로 양육을 받지 못하면 인간의 타락한 종교심을 따르게 되거나 세상의 다른 종교나 학문에서 추구하는 바를 따르게 된다. 초대 교회의 이단들도 당시 헬레니즘 철학을 따르는 영지주의를 추구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이단들도 세속 학문이나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는다.
4. 좋은 일꾼이 되는 비결은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훈련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어떤 것입니까?(8절)
-> 금욕주의를 통한 ‘육체의 연단’은 진정한 신앙 성숙에 이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일에 장애가 된다. 경건의 훈련은 범사에 유익한데 금생과 내생, 즉 현재의 삶과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유익이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높아진 것을 사로잡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일은 단순히 ‘금욕주의’적인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다. 말씀을 통한 경건의 훈련이 필수다.
5. 에베소교회를 섬기는 디모데가 훈련을 통해 좋은 일꾼을 세우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10절) 우리 공동체는 좋은 일꾼을 세우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하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 교회 안에서 경건의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하는 좋은 일꾼을 세우는 목적은 우리 삶의 소망을 소유나 자기 목적의 성취가 아닌 하나님께 두는 사람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6.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 말씀의 훈련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훈련을 받고 있는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시작했으며, 그것이 내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나눠 봅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리만을 전하는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참 잘하였도다”라는 주님의 최종적인 칭찬을 듣고자 하는 일꾼은 자기 모습을 말씀 앞에서 부지런히 돌아보며 경건의 훈련에 힘씁니다. 반대로 믿음은 있으나 하나님이 아닌 이 땅에서 누리는 삶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는 일꾼은 ‘금욕주의’ 혹은 ‘세속주의’의 형태로 하나님과 관련 없는 인생을 경주하게 됩니다. 좋은 일꾼과 나쁜 일꾼을 구별하는 기준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아닙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전(神前) 의식을 가진 사람은 금생과 내생에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통치와 돌봄에 대한 약속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꾼이 되길 원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