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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열며
전형적인 구약의 선지자들은 상향식 의사 구조보다는 하향식 선포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통로로 주로 사용되지만 인간을 대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심판받는 백성들의 상황을 하나님께 절규하듯 아뢰며 하소연하는 경우는 있지만, 오늘 본문의 저자 이사야처럼 곡조 있는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심판을 선포하는 가운데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삶의 여유와 내면의 힘은 어디서 연유했을까요?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의 인생의 진면목이 녹아져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역사서에 나타난 다윗의 일생을 시편과 함께 읽어 보면 전혀 새로운 각도의 묵상이 가능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삶의 모든 우여곡절 속에서 내면의 소리를 끌어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기자처럼 오늘 선지자 이사야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며
1. 이사야 25장에서 이전까지 계속되던 심판과 책망의 메시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심판과 재앙을 선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2. 이사야가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라고 외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절)
3. “성읍”, “견고한 성읍”, “궁성(궁궐)” 등의 표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2절) 이 대상들에 대한 심판의 결과는 어떠합니까?(2~3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열강들과 성읍들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참고 19:23~25)
4. 마지막 때에 있을 잔치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이사야의 찬송은 절정을 이룹니다(6~8절, 참고 2:1~4). 이 잔치는 누구를 위해 베풀어지는 것입니까? 종말에 있을 시온 산의 잔치를 통해 제거될 것은 무엇입니까?(참고 고전 15:54, 계 21:1~4)
5. 실망, 수치, 모욕, 죽음에 이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마지막 날의 잔치가 내 삶에 어떤 의미와 영향을 주는지 나누어 봅시다. 심판과 고통의 선지자적 선포 가운데서도 찬송할 이유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6. 당신이 현재 신뢰하고 붙들고 있는 성읍과 궁궐(권력, 업적, 명성 등)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런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그중에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항목을 찾아 결단하며,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도록 기도합시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구약의 선지서들은 심판과 회복이 동시에 선포되는 독특한 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개념들이 어우러져 함께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 역사의 성격 때문인 듯합니다.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인류의 단절을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은 인간이 죄짓는 그 시점부터 구원에 대한 약속과 선포를 시작합니다(창 3:15). 즉,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견디기 힘든 심판을 바라보면서도 찬양해야 할 이유는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수치를 물러가게 하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천국 신앙은 잔치 신앙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견지하고 붙들어야 하는 이 신앙은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인생의 질고와 고통을 해결하는 잔치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잔치를 베푸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인생의 자연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