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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종교생활에서 참 믿음으로

과월호 보기 김철우 목사

가정의 달, 5월입니다. 가족만큼 가깝고도 어려운 인간관계는 없습니다. 특히 신앙적인 면은 조금도 숨기거나 위선을 부릴 수 없습니다. 가족에게 인정받는 신앙인이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 달에 펼쳐질 말씀에는 종교생활이란 딱딱한 껍질 속에 꽁꽁 숨어 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주님의 질책이 쏟아집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생명으로 나아온 소자들을 기뻐하시고 품어 주신 주님의 따뜻한 사랑도 펼쳐집니다.

 

15장 본질을 잃어버리고 전통만을 고집하는 바리새인들의 추악한 종교성과 개처럼 취급받던 가나안 여인의 순백한 믿음이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흉악한 귀신 들렸던 어린 딸이나 각양 지체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케케묵은 전통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16장 예수님이 물고기 두어 마리와 보리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예수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하시고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시며 그들을 떠나십니다. 표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표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그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과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알려 주십니다.

 

17장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대화하셨던 예수님은 다시 고난과 문제가 가득한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그곳엔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온 안타까운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믿음 없는 패역한 그 시대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에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18장 예수님은 개인적인 믿음의 차원을 넘어 관계 속에서 믿음이 증명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권하는 목적은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적 잣대로 정죄를 일삼던 자들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불가능한 요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임을 알 때,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장 이혼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사회적 문제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허락한 것은 억압받는 여인들의 인권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본질은 잊고 죽은 의문에 사로잡혀 있던 종교인들은 이것을 이혼을 정당화하는 일에 악용했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께 나아왔다가 많은 재물로 근심하며 돌아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심지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 나중 될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20장 천국에 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천국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일이 가능한 곳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가장 나중에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세 번째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으뜸이 되고자 다투고 있습니다. 목숨까지 주시려는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제자들의 연약한 모습 속에서 여전히 높아지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21장~22장 드디어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은 전혀 다른 ‘공의의 왕’이셨습니다. 주님은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맹렬히 진노하십니다. 불순종한 첫째 아들과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마태는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형식과 전통만을 고집하다가 본질과 생명을 놓쳐 버린 당시의 종교인들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봅니다. 초심을 잃어버린 채 관성에 의해 신앙생활 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달을 맞아, 바쁘다는 핑계 혹은 성공이라는 미명하에 뒷전으로 밀려나고 적당히 무시해 왔던 가족을 향한 우선순위를 정립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은 아무리 외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천국에 합당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명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