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룩하라’는 명령은
세속적인 세상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거룩함이란 세상과
단절된 환경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늘에서
천사들의 찬양 가운데 거하시지만, 언제나 이 땅에 임재하시며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 거룩한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고 요구하십니다.
이처럼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우상 숭배와 음란한 문화가 만연했던 고린도 지역 가운데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땠는지 살펴보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묵상해 봅시다.
용납할 것과 배격할 것(10:1~11:16)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지키려다 보면, 무엇을 용납하고 무엇을 배격할 것인지의 문제가 늘 따라다니게 마련입니다. 본문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었던 문제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예시가 제시됩니다. 그중 하나가 음식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가 옷 문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워낙 우상 숭배가 만연했기 때문에 시장에서 매매되는 고기들은 대부분 우상 숭배 의식을 거친 후 도축된 것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귀족들은 정기적인 축제를 벌이곤 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자기 수호신을 위한 제사를 통해 시민들에게 한턱내며 자신의 명성을 높이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그 축제에 참여해도 되는지의 문제가 심각한 이슈였습니다.
또, 당시 여성들은 외출하거나 남녀가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머리에 너울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여성도들은 복음으로 인해 남녀가 평등해졌기에 머리를 가리지 않고 예배에 참여하겠다고 주장해 이것이 고린도교회의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바울이 제시한 이 두 문제에 대한 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용납하고, 무엇을 배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우상 숭배와 비진리를 배격해야 하며, 그것을 용납하는 듯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10:14). 그러나 그것이 갖는 문화적, 사회적 순기능까지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은 음식에 대해, 이스라엘의 예를 들며 결코 우상 숭배를 해서는 안됨을 역설합니다(10:1~22). 그러므로 신전 앞에서 벌어지는 우상 숭배 의식에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0:20~21). 그 모임에 참여하지 않을 때 불이익이 예상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10:13).
그렇다고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먹거나 불신자들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나눌 때마다 이 음식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었느냐 아니냐를 확인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묻지 말고 먹으라”(10:25, 27)고 합니다. 식사는 몸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제물로 사용됐는지 여부를 일일이 따진다면 불신자들과 어울릴 수 없고, 교회는 세상과 장벽을 치게 됩니다. 즉 우상 숭배를 피한다고 하면서 식사의 사회적 순기능까지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 사회적 관계를 갖되,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지 않도록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10:28).
이처럼 세상 문화 중에는 배격해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따라야 할 것도 있습니다. 여자가 외출하거나 남자들과 한 자리에 모일 경우, 머리에 너울을 써서 가리는 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에게 일반적이고 단정한 옷차림이었습니다. 남녀가 평등하다고 해서, 전통이나 문화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바울은 남녀가 동등하다는 정신을 강조하면서도(11:11~12), 전통을 무시하지 말고 남녀의 질서를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순기능을 반영하라는 말입니다. 여자들이 너울을 벗는 행동은 남녀평등을 선포하는 데에 별 유익이 없으며, 다른 이들을 거북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런 경우 반드시 전통과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반드시 배격할 것 - 사회적 차별(11:17~34)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집회 때 이뤄지는 성찬에서 가난한 자들이 차별당하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모일 때, 부자들이 음식을 가져오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을 지적합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 모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로운 것이었습니다(11:17).
바울은 성찬이 갖는 영적 의미를 다시 설명하면서 그 식사가 먹고 마시며 교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11:26).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모든 이들에게 그 살과 피를 주신 것이기에 이를 기념하는 성찬에서는 마땅히 가난한 자들까지 기다려서 함께 식사를 나눠야 합니다(11:33). 이처럼 교회는 세상의 빈부귀천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임이 비슷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교제 모임이 돼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용납할 것 - 은사의 차이(12~14장)
이어서 바울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이들을 용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방언과 같은 신령한 은사를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서로 다른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 모두가 존중되고 용납돼야 합니다.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몸의 비유를 듭니다(12:12~27). 몸의 각 지체는 모두 다르게 생겼고 다른 기능을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한 몸이기에 서로를 도울 뿐 경쟁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기능이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다 이런 의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서로 더 좋은 은사, 더 높은 직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일명 ‘사랑장’도 이런 문맥에서 나온 것입니다. 각자 가진 은사가 아무리 탁월하고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랑 없이 은사가 발휘된 일이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각각 다른 배경과 다른 능력, 다른 은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랑으로 한 데 묶인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이런 원리에 의해서, 방언도 좋은 은사이기는 하나 예언을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14:1~2). 방언은 자신을 위한 은사지만 예언은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발휘할 때에도 언제나 교회의 질서를 먼저 고려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14:40). 은사의 목적은 그 은사를 받은 자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 - 교회의 연합(15~16장)
거룩함을 위해 무엇을 배격하고, 용납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그 중심에 지키고 있어야 할 것은 바로 부활의 복음이요, 교회의 연합입니다.
당시에도 부활 교리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3일째 날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 자체가 믿기 어려운데, 성도들이 마지막 날에 모두 부활한다는 가르침은 더욱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진리를 수호하는 데 있어서는 털끝만큼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논증하기 위해서 15장에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만큼 그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진리였습니다.
부활은 복음의 시작점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면 우리의 믿음이나 복음 증거가 다 헛것입니다(15:14).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일 뿐입니다(15:19).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역사적 사실이며(15:3~8),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에 이를 믿는 자들은 모두 그날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15:20~22). 부활을 믿기에 우리는 사망의 권세가 끝났음을 선포할 수 있으며, 이 세상 가운데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15:55~58).
또한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는 ‘교회는 복음으로 인해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에 대한 강력한 가르침이 끝난 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돕기 위한 연보를 부탁합니다(16:1~2).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돼 있던 고린도교회가 유대인 교회를 위해 재물을 모으는 것은 단지 가난한 자를 돕는 정도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이를 기쁨으로 실천해 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문안에서 고린도와는 많이 떨어져 있는 여러 지역 사람들의 문안을 전하는데, 이는 비록 지역적,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됐음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16:19~20).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하나이며, 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고백합니다.
2014년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왔는지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답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상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배격하며, 또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분별력을 얻고 한 해를 거룩하게 마무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