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15년 02월

굴복하는 자는 살고 맞서는 자는 죽는다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기에 죄인을 즉시 치시지는 않습니다. 우선 말씀이 임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몇 번 경고를 하시며 그중 돌이켜 회개하는 자들을 받아들이시고, 끝까지 저항하는 자들에게 마지막 심판을 하십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바로를 다루실 때도 먼저 모세를 보내 말씀으로 경고하시고, 열 가지 재앙으로 경고성 타격을 가하신 후 홍해에서 마지막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또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심판을 내리신 예들은 모두 그 원리를 살펴보면 일맥상통합니다.
또,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자주 나오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예수님의 통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할 때부터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살게 하셔서 ‘아직 점령하지 못했으나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땅’을 차지하며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공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굴복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9장)
하나님께서는 먼저 말씀으로 죄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이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는 소식이 가나안 전역에 퍼졌습니다. 이 소식은 가나안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이면서 또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복음은 ‘심판’과 ‘구원’을 함께 가진 양날의 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저항하는 것은 곧 자살행위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바로가 그랬듯이, 가나안의 왕들은 모여서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려고 합니다(9:2).
하지만 가나안 사람들 중에서도 다른 판단을 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기브온 주민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가나안의 ‘왕’들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려 하지 않지만(9:1~2, 10:3~6), 기브온의 ‘주민’들은 하나님께 굴복하고 이스라엘의 종이 돼도 좋다는 판단을 한다는 사실입니다(9:3, 8, 10:1).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왕’들을 향합니다(10:16~27).
기브온 주민들 역시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히위 족속이었습니다(9:7, 참조 신 20:17).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침공하기 전까지 그들도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악을 저지르며 살았던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한 방법도 계략과 속임수입니다(9:4~6). 그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이를 묻지 않은 실수 때문에 겨우 조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9:14~15). 이는 그들이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들이 아니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여호수아서는 기브온과 조약을 맺은 이스라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브온 주민들이 가져온 ‘양식을 취했다’(9:14)는 표현은 언약을 맺기 위한 식사를 의미하는데, 정작 그 양식은 상해서 먹을 수도 없는 것(9:12)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기브온에게 속았고, 당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기브온에게 대해서는 우호적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방식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굴복했기에 살 수 있었고, 주위 도시국가들의 침공에 대해 이스라엘의 보호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10:1~7).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 어떤 이들에게 주어지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깨끗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맞서는 자는 심판을 당한다(10~11장)
이에 반해 하나님 앞에 맞서는 자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브온이 이스라엘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에 가나안의 다섯 왕들이 기브온을 공격했다가, 도우러 온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수아에 의해 전멸을 당합니다.
이 기브온 전투에서 여호수아는 태양과 달에게 하늘에 머무르라는 명령을 내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말대로 하십니다(10:12~13).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편이 돼 싸우시기에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이 명백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결국 다섯 왕은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 위에 돌
무더기가 쌓였으며(10:26~27), 이후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가나안 남방 지역을 점령해 갔습니다(10:28~43).
남방 지역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북방 하솔 성의 왕 야빈이 동맹군들을 모아 총력전으로 이스라엘에 맞섰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여호수아의 일격에 흩어지고 맙니다(11:1~8). 사실 이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상대해 보지 못한 가장 큰 군대였으나(11:4), 하나님께서는 단 일격으로 그 군대를 깨뜨려 버리십니다.
이 일격은 가나안의 머리를 깨뜨린 것이었고(11:10),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이 가나안 전체를 정복해 갑니다. 마치 애굽의 바로처럼, 기브온 주민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읍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대항했다가 진멸당합니다(11:19~20).

 

‘이미’와 ‘아직’의 원리(12~21장)
여호수아 12장부터 21장까지에는 이스라엘이 정복한 지역의 왕과 땅의 이름이 열거되는 본문이 많습니다. 큐티 본문으로는 선택하지 않았으나, 여호수아서는 이 이름들을 통해 ‘이미 얻은 땅’과 ‘아직 얻지 못한 땅’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긴장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약속하신 땅을 받았으나(21:43), 그럼에도 ‘아직’ 점령해야 할 땅이 남아 있습니다. 12장에 이미 점령한 도시의 왕들이 제시된 후, 하나님께서는 나이가 많아 늙은 여호수아에게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3:1). 이미 31명의 왕을 죽였기에 그 땅의 주인은 이스라엘이 됐습니다.
그러나 아직 얻어야 할 땅이 남아 있기에 여호수아는 각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합니다. 이미 정복한 땅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아직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는 땅도 미리 나눠서 그 땅을 정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이미’ 얻은 땅에 대해 언급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열거되는 왕과 땅의 이름은 모세가 죽기 전, 즉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갓 지파가 차지한 요단 강 동편입니다(13:8~33). 요단 강 서편은 유다(14:6~15:63), 에브라임(16:5~10), 나머지 므낫세 반 지파(17:1~13), 베냐민(18:11~28), 시므온(19:1~9), 스불론(19:10~16), 잇사갈(19:17~23), 아셀(19:24~31), 납달리(19:32~39), 단(19:40~48) 지파에게 주어졌고, 이렇게 땅을 받은 이스라엘은 여호수아(19:49~51)와 레위 지파(21:1~45)에게 거주할 성읍을 떼어 줍니다.
갈렙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모범적 태도를 보여 줍니다(14:6~15:19). 갈렙이 요구한 땅은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이며, 아낙 자손이 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그 땅을 이미 얻은 것처럼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14:12).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아직’ 얻지 못했으나 ‘이미’ 얻은 것으로 여기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그에 비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가져서는 안 될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미 차지한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았습니다(16:10, 17:12~13). 게다가 주어진 분깃이 적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을 스스로 개척하라는 여호수아의 말에 대해 그것이 넉넉하지도 않고, 그곳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들이 철 병거를 가졌으니 차지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17:14~18). 이들은 ‘아직’ 차지하지 못한 지역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큰 민족을 이룬 자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일갈합니다.
여호수아가 나머지 일곱 지파를 재촉하는 모습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어떻게 임하는지 잘 나타납니다.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서 세 사람씩 선정해 아직 차지하지 못한 땅을 정탐하고,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라고 합니다(18:1~6).
그렇게 땅을 나눈 후(18:11~19:48), 여호수아가 자기 몫의 땅을 받아 기업을 나누는 일은 끝이 났습니다(19:49~51). 그 후 도피성이 결정되고(20장), 이스라엘 각 지파가 레위 자손들이 거할 성읍과 목초지를 줌으로써(21:1~42), 이스라엘 국가 건설은 완성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각 곳에 가나안 족속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다”(21:43, 45)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허락하셨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의 31명의 왕을 죽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구원의 소식임과 동시에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복음 앞에서 굴복하는 죄인은 영생을 얻을 것이고, 대항하는 죄인은 영원한 사망에 이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온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께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는 책망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지금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음을 묵상하는 2월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