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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복음,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로마서는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보여 주는 데 있어서 그 내용의 깊이나 논리적 전개가 매우 탁월한, 교회의 귀중한 유산입니다. 로마서에는 복음과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열정과 함께, 그 열정을 풀어내는 날카로운 지성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해하기에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약 3개월 동안 로마서를 묵상하며 바울의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지성, 그리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체험하기 바랍니다.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초대 교회에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이전부터 이미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디아스포라 유대인), 로마교회는 이런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출신 중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사실을 믿으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할례와 율법(음식법, 절기법 등)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여전히 ‘할례도 받지 않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는’ 이방인은 상종하지 못할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할례 받고, 음식법과 절기를 지키라고 요구하곤했습니다.
바울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바리새인 출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태도가 복음에 걸맞지 않음을 파악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이고,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얻는다는 선포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없애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여 모두 하나임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인(1:1~3:20)
바울은 어떤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았습니다. 당시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의 집결지였고, 유대인 여행자들의 숙박시설이기도 했습니다. 안식일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바울은 그곳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하신’, ‘다윗의 혈통’,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전했습니다(1:2~4).
물론 유대인들은 바울을 모욕하며 회당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회당에는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이방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경건한 자들’, 참조 행 13:43, 17:4). 그들은 할례와 율법 등 너무 큰 문화적, 사회적 장벽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종교적 차별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가르치면서도(1:2~4), 그 구원의 은총은 유대인, 헬라인, 야만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한다고 주장했습니다(1:14~17). 구원을 얻기 위해 굳이 할례를 받고 정결하다고 인정된 음식만을 먹으며 안식일과 절기들을 철저히 지켜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했습니다(1:17). 그리고 이 사실을 유대인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논증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우선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역겨워할 만한 이방 사회의 죄악들을 열거합니다(1:18~32). 그들이 아무리 율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일반 계시(1:18~20)와 양심(2:14~15)이 자신들이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고 밝힙니다. 즉 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이방인 모두가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도 죄인임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2:1~5). 유대인이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지만 행실에서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당연히 그들도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2:17~29).
바울은 유대인이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이 무익하지 않음을 인정하고(3:1~2), 또 그들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섭리해 오셨음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범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의로울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3:3~8).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 손에 들어 사용하셨다고 해도, 그의 불신앙과 악행은 자명한 죄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닌 자가 없음을 결론적으로 선언합니다(3:9~20).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3:21~31)
바울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에 의해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구분할 수 없음을 논증한 후,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는 차별이 없는 의입니다(3:22). 이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고, 믿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의입니다(3:24~27).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주장하면서 이런 자신의 주장이 율법을 거부, 파기하는 것이라는 주장에도 반박합니다. 오히려 이 복음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입니다(3:31).

 

복음이 율법을 세우는 증거(4:1~25)
만약 복음이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1:3)에서 나신 분이라는 사실과 모순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이 율법을 오히려 굳게 세운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들어 논증합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가진 유대인을 버리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여겨진 것이 할례를 받기 이전이었음을 밝힙니다(4:10~11). 할례야말로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과도 같이 여기는 것이었지만, 정작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할례가 아니라 그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할례는 단지 그의 믿음으로 인한 의로움을 ‘인친’ 것에 불과합니다(4:11).
게다가 아브라함은 유대인만의 조상이 아니라 수많은 민족의 조상이기에,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방법대로 의롭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4:16~17).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와 같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오직 믿음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 의한 구원(5:1~21)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화평을 누리게 됐음을 선언합니다(5:1~2).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는 자는 세상의 환난을 이기는 능력을 얻습니다(5:3~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확증입니다(5:8).
그런데 하나님은 이 놀라운 구원 사역을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나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을 사용해 이루시지 않고, 예수님 단 한 분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바울은 아담을 예로 듭니다. 아담 한 사람에 의해서 온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면, 예수님 한 사람에 의해 온 세상을 구원할 의가 넘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5:12~19).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사용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기에, 유대인에 편입되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믿음, 오직 십자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6:1~23)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율법에서 규정한 여러 죄를 지어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냐”는 공격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며, 그것은 세례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6:1~5). 믿는 자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6:11). 그러므로 믿는 자가 불의에 자기 몸을 내어줄 수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6:12~13). 죄에서 해방됐다는 것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의 종이 돼 하나님의 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18).
비록 세상의 우상숭배와 더러운 죄악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연합한 자이므로 더 이상 죄에 거하지 않고, 의에 거하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기독교적 문화나 종교적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실한 믿음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결코 행동 없는 믿음, 의의 열매가 없는 믿음일 수 없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갈등하면서 정작 의의 열매를 맺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역설하고 있는 참 신앙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이 4월에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참 신앙을 묵상하고, 그 길로 순종하는 모든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